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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거친 바다에 배 띄우다

등록 2004-08-27 00:00 수정 2020-05-03 04:23

열린우리당 의장 취임으로 정치적 도약의 발판… 이회창 지지 전력과 당내 분파 조종자라는 한계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만년 비주류’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던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이 아버지의 친일 행적 거짓말 파문으로 중도 하차한 신기남 전 의장을 대신해 열린우리당 의장에 취임하면서 정치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3년 8월 ‘독수리 5형제’의 리더로 김영춘·김부겸·안영근 의원, 이우재 전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한 지 1년 만에 원내 과반수 정당의 선장이 된 것은 그에게 더없는 행운이자 기회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운 정치적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

“자격 없다” 네티즌 반발 줄이어

무엇보다, 과거 한나라당에 몸담으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을 상대로 강경 투쟁을 거듭해온 그의 ‘정치적 과거사’는 의장직 수행에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부영 의장 체제 출범 뒤 열린우리당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그의 ‘과거사’를 거론하며 의장직 승계를 비판하는 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과연 이회창에게 충성한 분들이 (열린)우리당을 잘 이끌 수 있을지, 태풍처럼 내 마음도 종일 답답하다.”(아이디 초코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못살게 굴던 사람, 제정구 전 의원이 ‘DJ 암’ 때문에 죽었다고 하고, 이회창 대선후보 연설단을 결성해 전국을 돌던 이부영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런 사람이 우리당 당 의장을 하다니 정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zeusdeo) ‘국민’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이제 과거 흔적을 지우려고 한나라당을 열나게 욕하겠지. 안 봐도 뻔하다”고 조롱했다. 이 의장이 열린우리당 선장을 맡을 만한 이력과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했다는 의문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통합민주당의 재야 몫으로 공천받아 당선된 그는 95년 김 전 대통령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자 비주류의 길에 들어섰다. ‘3김 청산’과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우며 ‘꼬마 민주당’에 몸담았고, 97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한나라당에 합류해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보탰다. 그와 함께 ‘3김 청산’을 부르짖던 노무현 대통령과 김원기 국회의장 등 여권의 핵심 인사들 대다수가 ‘선 정권교체’와 ‘동서화합’의 명분 아래 DJ를 지원한 것과 정반대의 길을 간 것이다. 이 의장은 특히 99년 한나라당 원내총무로 선출된 뒤 ‘반김대중, 대여 강경투쟁’의 선봉장 역할을 도맡았고,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이회창 후보에게 패배한 뒤에는 노 대통령을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다. 이 의장은 이런 이력 때문에 지난 1월11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3위로 상임중앙위원에 선출됐지만, 당내 입지 확보에 애를 먹었다.

물론 열린우리당 의원 상당수는 네티즌들의 이런 분위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김현미·우상호 등 소장개혁파 의원들은 “이 의장이 한나라당 출신이지만 개혁을 위해 탈당해 열린우리당에 합류했고, 그 대가로 4월 총선에서 낙선하는 희생을 치렀다”며 “이미 1월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의 평가를 받은 만큼 의장직 승계는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원들의 이런 관대한 분위기는 당내 리더십의 위기가 파국으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와, 과거사 진상 규명을 놓고 한나라라당과 전선이 형성된 상황, 내년 1·2월 전당대회까지 공정한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각 계파의 현실적 이해 등이 맞물린 ‘정치적 타협점’이라는 이 의장 체제의 성격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이 의장 체제 출범을 적극 지원한 수도권의 한 의원은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되면 정치의 중심은 국회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누가 당 의장이 돼도 내년 1월 전당대회의 공정한 관리자라는 제한된 역할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다”며 “굳이 당헌 당규상 의장직 승계권이 있는 이 의장을 배제해 불필요한 당내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냐”고 말했다.

중재자 역할 잘해낼 수 있을까

열린우리당 안에서는 이 의장이 ‘공정한 관리자’의 한계를 넘지 않는 한 안정성이 보장되겠지만, 그가 내년 전당대회에서 선출직 당 의장 자리를 탐하거나 대권 경쟁에 뛰어들 경우 심각한 정체성 공방에 휘말릴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수도권의 다른 한 의원은 “이 의장이 주어진 관리자 역할만 충실히 한다면 당내 모든 세력이 적극적으로 돕겠지만, 정치적 욕심을 부리면 얘기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의장도 자신의 이런 한계를 인식한 듯 선의의 관리자에 머물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 의장이 8월20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나는 세를 끌어모으는 일에 열중하지 않아, 지금 이런 처지에 있다”면서 “내일 당장 정치에 지장이 있더라도 (계속) 그렇게 할 생각이며, 내년에는 아무것도 안 해도 상관없다”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뚜렷한 세력 기반이 없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등장한 이 의장 체제가 당내 각 세력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불편부당한 중재자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웃사이더인 그가 이른바 ‘천신정’(천정배 원내대표, 신기남 전 의장, 정동영 통일부 장관)으로 대표되는 당권파의 비토 움직임을 뚫고 의장에 오른 것은 이들과 경쟁 관계에 있는 당내 다른 세력들의 도움 덕분이다. 정동영 의장과 대권을 다투는 김근태 의원 계보인 ‘국민정치연구회’ 소속 장영달, 유선호, 문학진, 우원식, 선병렬, 이영호 의원 등이 지도 체제 논란이 한창인 지난 19일 모임을 열고 “신 의장 사퇴로 당이 혼란스러울 여지가 있으나 당헌·당규상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이 의장직을 승계하는 게 적절하다”며 이 의장 손을 들어준 게 대표적 사례다. 여기에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전에서 천정배 원내대표에 맞서 이해찬 총리를 후보로 밀었던 문희상·임채정·유인태 의원 등 당 중진그룹과 김원웅 의원 등 개혁당 출신들도 신 의장의 사퇴를 압박하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결국 당내 기반이 취약한 이 의장은 자신을 밀어준 김근태 계보와 중진그룹, 개혁당 의원의 입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 셈이다. 국민정치연구회 이사장인 장영달 의원은 23일 “이 의장에게 협조한다는 의미에서 필요할 경우 연구회 멤버들이 당직을 맡을 수도 있다”며 벌써 당직 인선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모습이다.

이 의장은 일단 청와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는 과거사 진상 규명 드라이브를 통해 자신의 기반과 정통성을 다지려는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 의장은 20일 “앞으로 정치에 지장이 있더라도 언론 개혁과 과거 청산에 매진할 생각”이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군 복무 행적, 공산주의자로 군대 내 프락치 총책 활동 경력 등을 거론하고 나섰다. 이 의장의 이런 태도는 “친일 진상 규명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차지하는 비중은 털끝만 한 정도다. 박 전 대통령을 친일 규명(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던 7월21일 발언과는 180도 바뀐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 의장이 과거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한계와 취약한 당내 입지 등을 인식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더욱 각을 세울 것”이라며 “과거사 문제를 풀어가는 데 이 의장은 누구보다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간당원 자격 완화 논쟁 뒤로 미뤄

하지만 당내 각 계파가 분란을 거듭해온 기간당원 자격 완화 논쟁이라는 더 어려운 숙제가 이 의장 체제 앞에 놓여 있다. 현재 당권파는 ‘매달 2천원씩 6개월 이상 당비를 납부할 경우’에 주어지는 현행 당원 자격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신기남 전 의장 시절 월 당비 인하, 1년치 당비를 한번에 내는 ‘연납제’ 도입, 일정 기간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당원 자격 부여 등 다양한 개선안을 추진해왔다. 반면 신기남 의장의 사퇴를 압박했던 김원웅, 유시민, 유기홍 의원 등 개혁당 인사들은 “당비 대납으로 잡탕 정당이 된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해왔다. 여기에 이 의장을 지지한 국민정치연구회쪽도 당권파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 듯한 분위기다. 국민정치연구회 소속 한 의원은 “현행 기간당원제가 너무 폐쇄적이라 다변화하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연납을 허용하고 교육을 통해 당원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우리당을 옛날로 되돌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년 1월 전당대회와 차기 대권 경쟁의 승패가 달린 기간당원제 논란에 관한 한 당권파도 양보는 있을 수 없다는 강경한 분위기다. 당권파쪽의 한 의원은 “지금처럼 6개월 동안 매달 2천원씩 당비를 내는 사람에게만 당원 자격을 줄 경우 20~30대의 개혁당 출신 당원 2만5천여명이 주요 당직은 물론, 각종 공천권까지 다 장악하게 된다”면서 “당원 인정 수단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장은 일단 어려운 숙제를 뒤로 미루는 듯한 모습이다. 그는 20일 기자회견에서 “(기간당원제는) 황희 정승과 같은 입장을 취해야 한다”며 어느 한쪽 편에 서는 것을 피했다.

오랜 비주류 생활 끝에 집권 여당의 새 선장이 된 이부영 체제가 과연 복잡한 당내 역학관계 속에서 안착할 것인가. 관심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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