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는 황량했다. 지난 3월8일 오후, 인적 끊긴 인천 옹진군 연평면 신작로에는 스산한 바람만 온종일 불었다. 포격당해 전소된 가옥은 넉 달째 흉물스럽게 방치됐고 재가 된 살림살이들 위로 더께가 쌓였다. 폴리스라인 너머 타다 남은 가재도구만이 여기가 사람이 살던 곳임을 말해주었다. 마을은 적막했고, 골목 어귀에도 주민들은 보이지 않았다. 공 차는 아이들이 없었다면 분명 ‘유령의 섬’이라 불릴 만했다.
이날 북한의 포문이 열렸다는 풍문이 돌아 주민들이 대피소로 피신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한-미 ‘키 리졸브’ 훈련에 따른 북한의 ‘불바다’ 발언으로 남북 긴장이 고조된 시점에 불거진 슬픈 해프닝이었다. 소문은 말 그대로 바람보다 빨랐다. 북한 동향을 잘못 파악한 군인 남편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피하라고 일렀고, 이 말은 삽시간에 온 동네로 퍼졌다. 북한의 추가 포격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은 부랴부랴 대피소로 몸을 숨겼다. 학습된 공포가 불러온 일사불란함이었다. 면사무소의 안내방송이 나간 뒤 대피소를 나와 집과 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임시 거주지로 돌아갔지만, 주민들의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실제 연평도 주민 상당수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호소하고 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전쟁·고문·자연재해 뒤 지속적인 공포와 고통을 느껴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질환이다. 2월10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경기 김포 양곡지구 임시 거주지에서 실시된 심리검사에서 연평도 주민 287명 가운데 252명이 고위험군 심각 판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포탄이 앞뒤로 떨어진 현장을 직접 목격한 주민 김영애(52)씨도 그런 경우다. “그날 이후 커피포트의 물 끓는 소리만 들어도 놀라요. 어제는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 놀라서 잠을 못 잤을 정도니까요. 없던 고혈압도 생겼어요. 그날 이후 어디를 가도 출구를 먼저 찾고, 여기가 포격을 맞으면 난 살 수 있을까 없을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남편도 포격을 목격했는데 서로 신경이 예민해져서 사소한 일로도 크게 싸우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날의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 그는 인터뷰 내내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섬에 들어오길 꺼렸다는 이점례(57·가명)씨는 거의 매일 부둣가에 나가 육지 쪽을 보며 눈물짓는 게 일과가 됐다. “나가고 싶어요. 인천에 방 한 칸이라도 있었으면 들어오지 않았을 거예요. 단 1년만이라도 살다 들어오면 좀 나을 텐데, 무서워서 살 수 없어요.” 이씨는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다는 주민들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반강제로 입도시킨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야속하고 원망스럽다고 울먹였다. 그에게 연평도는 더 이상 고향이 아닌 듯했다.
안정을 찾던 주민들도 이처럼 섬에 돌아와 다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 2월에 이어 두 번째 의료지원을 나온 인천의료원 사회협력과 안재형씨는 “지난번에 진료소를 찾아온 주민 50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호소했다. 섬으로 돌아오니 예전 일이 생각나서 못 살겠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정성훈 정신과장은 “오늘 진료소를 찾은 환자 30여 명 가운데 16명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환자였다. 대부분 장기간 치료를 요하는데, 도서 지역의 특성상 진료의 연속성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편 피해 복구에 대한 지자체와 주민 사이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본격적인 복구 작업은 시작도 못했다. 수십 년 동안 집을 조금씩 넓혀 살아온 주민들은 등기부등본대로만 집을 복구해준다는 지자체 안에 수긍할 수 없었다.
연평도에 정부는 없었다. 한순간에 집과 고향을 잃은 이들의 상처난 마음을 어루만져줄 정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연평도는 오늘도 공포와 불안으로 숨죽여 울고 있다.
연평도=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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