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감당하기 버거운 재앙을 의식하며 살도록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를 계기로 ‘탈핵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후쿠시마에서 날아오는 방사성물질, 해류를 타고 퍼지는 방사성물질, 버섯이나 생선에서 검출되기 시작한 방사능, 이곳저곳 떠다니는 정보들은 운동보다 시민들의 불안감을 계속 자극했다.
“방사능 오염된 물품 왜 들여오냐”
그런 불안감에 흔들리던 차에 후쿠시마현을 다녀온 강내영씨에게서 그곳 주민들의 소식을 접했다. 그가 찍어온 사진들 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후쿠시마의 예전 아름다운 모습이나 방사능에 오염된 땅을 제염한다며 산처럼 쌓아올린 검은 비닐주머니, 텅 빈 도시가 아니었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그곳에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그 죽음의 땅에서 왜 아직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래서 만나고 싶었다. 지난 1월9~11일 서울, 대전, 부산, 경남 밀양에서 진행된 ‘후쿠시마 현지 활동가 초청강연회’를 준비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배우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다시 마을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언제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과 지하철이 무너질지 몰랐듯이, 언제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한국에서 미래를 꿈꿀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강내영씨를 중심으로 탈핵과 후쿠시마에 관심을 가진 단체를 모으기 시작했고, 여러 생활협동조합연합회 등 14개 단체가 함께 행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강연회를 불과 닷새 앞둔 1월4일에 일이 터졌다. 강연회를 알리려고 만든 웹자보에 연락처를 남긴 분들에게 항의 전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강연회 참가비를 받지 않는 대신 관심 있는 사람들이 후쿠시마 지역에서 제작·판매되는 인형과 티셔츠를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협 홈페이지에 올라간 공지문 때문이었다. 그런데 항의 전화를 걸거나 인터넷에 댓글을 다는 곳은 방사능에 눈감고 핵발전을 지지하는 보수단체가 아니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에서 자주 만났던 ‘82쿡’과 방사능으로부터 아이들과 미래를 지키려는 ‘차일드 세이브’, 진보적인 사이트로 알려진 ‘오늘의 유머’ 같은 곳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방사능에 오염된 물품을 들여오느냐는 비판이 시작되었고 담당자들의 전화번호를 공유하며 집중적으로 연락하자는 댓글까지 올라왔다. 생협의 물품을 신뢰할 수 없으니 조합을 탈퇴하겠다는 얘기부터, 준비하는 사람들을 친일파라며 비아냥대는 글까지 다양한 댓글이 달리고 항의 전화가 왔다.
물품을 판매하려는 게 아니라 그곳 주민들의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며 함께 연대할 방법을 찾는 자리라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판매도 전시도 안 된다고 하더니, 조금 지나자 강연회 자체를 취소하라는 의견이 빗발쳤다. 강연회 취지를 지지하는 의견이나 취지는 좋지만 물품을 들여오는 건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조금 올라왔지만 곧 비난 댓글에 파묻혔다. “니들보다 훨 잘사는 일본인들 걱정 말고 그런 일 하느니 밀양이나 강정에다 신경 쓰라고 일갈하고 싶네요”라는 글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
결국 물품 전시는 취소한 채 강연회는 진행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강연회에 참석했다. 서울, 대전, 부산, 밀양 등 여러 지역에서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다. 비판·비난하는 댓글을 달거나 항의 전화를 걸었던 사람들이 강연회에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분들이 와서 이야기를 들었길 바란다.
나는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으로 위안
강연회는 잘 끝났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2008년 촛불집회를, 그리고 이후 촛불의 ‘진화’라고 묘사하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하나의 사건으로 전체 흐름을 평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나, 이번 사태로 진보로 호명된 흐름 속에 잠재된 균열들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강연회를 반대했던 이들은 정보에 민감하고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자기 주장을 분명하게 전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계속 ‘자기’에 머물렀다. 나의 불안함을 더 이상 자극하지 말라고 요구했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강연자로 온 시마무라 모리히코의 ‘마음의 병’이라는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모든 문제를 후쿠시마의 문제로 돌려버리고 나는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으로 우리는 위안을 삼는다. 그런데 이 모든 건 후쿠시마 탓이야, 라며 경계를 짓고 벽을 세우는 우리는 누구인가. 왜 일본 방사능에 대한 공포는 한국에 있는 핵발전소와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막는 힘으로 진화하지 않을까. ‘안전’에 대한 공포가 이야기를 가로막을 때, 과학으로 검증되지 않은 공포가 과학으로 측정될 수 없는 삶을 배제할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친일파라는 비난처럼 ‘안전’이 ‘안보’로 전환돼 시민들의 연대를 가로막을 때 이를 어찌할 것인가. 방사능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방관도 문제지만 매우 민감한 사람들의 공포와 회피도 무섭다는 점을 이번 강연회를 통해 배웠다.
어떻게 마을 한가운데에 송전탑 세우냐
2008년 이후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생협에 조합원으로 가입한 사람이 많다(2008년 이후 생협들의 조합원 수는 50% 이상 늘어났다). 그러면서 소비자로서 민감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 생협에서 늘어났다. 그런데 ‘소비자주권’과 협동조합운동의 ‘조합원주권’은 연결되지만 다른 개념이다. 협동조합은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를 연관지어 생각하는 조합원이 주권을 가진다. 항의 전화를 걸었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생협 조합원이라고 밝혔고 조합원이 반대하니 행사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렇지만 주권은 ‘나의 주권’만 있는 게 아니라 ‘너의 주권’ ‘타자의 주권’, 다양한 주권‘들’을 통해 실현된다. 타자 없는 주권은 없는데, 조합원들은 어느 순간 개별화된 소비자로서 권리를 주장했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자신의 권리에 무관심한 사람도 문제지만 나의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의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도 이번 기회에 배웠다.
일본 활동가들은 한국의 상황에 굉장히 놀라워했다. 방사능에 그토록 민감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핵발전소를 그대로 둘 수 있느냐고. 어떻게 시민들이 사는 도심에 핵연료 공장을 세우느냐고. 어떻게 마을 한가운데에 송전탑을 세우느냐고. 고맙게도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일본이 한국보다 안전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이번 강연회를 통해 밀양 주민들에게 중요한 점을 배웠다. 왜 우리는 ‘후쿠시마와 밀양의 만남’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하고 ‘후쿠시마 현지 활동가 초청 강연회’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왜 우리는 듣고 싶은 질문만 던졌을 뿐 그들이 우리에게 묻고 싶은 질문에 답하지 못했을까. 어느 누군가는 또 걱정하고 비난하겠지만 서로의 손을 잡으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