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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원조, ‘백제류’



중국 왕조엔 정치적 역할 수행… 일본인에겐 사상과 종교, 예술의 스승
등록 2010-09-14 21:18 수정 2020-05-03 04:26
백제 기술로 만든 아스카지, 아스카지 불상. 사진 권오영 한신대 교수 제공

백제 기술로 만든 아스카지, 아스카지 불상. 사진 권오영 한신대 교수 제공

‘구다라나이’(百濟無い).

무슨 말인가? ‘하찮다’ ‘별것 아니다’란 뜻의 일본어다. 그런데 그 어원은 구다라(백제), 나이(아니다), 곧 ‘백제가 아니다’이다. 백제 문화가 왕성하게 수입되던 고대 일본에서 백제 것이 아니면 시시하다는 인식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1960∼70년대 미국과 일본 물건을 제일로 쳤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백제는 일본의 고대국가 체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일본 문화를 이루는 원류였다. 최근 드라마·영화·가요 등의 대중문화가 중국·일본·동남아·중동 등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한류’ 열풍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백제풍 문화가 일본에 압도적으로 많이 수출됐던 것이다.

사실 삼국 중 그다지 큰 인상을 주지 못하는 나라가 백제다. 고구려는 만주 벌판을 지배한 대륙의 주인으로, 신라는 삼국전쟁의 승자로 우리 기억에 남아 있다. 반면 백제는 고구려에 밀리며 수도까지 한강 유역에서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옮겨야 했고, 후반에는 신라에까지 열세를 보이다 멸망했다. 그렇다고 신라처럼 많은 문화유산을 남겨놓지도 못했다. 패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제의 대외교류사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백제는 중국과 일본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백제는 중국과 무역을 하면서 중국 해안 지방에 거점을 마련했는데, 이는 신라가 당에 신라방을 설치하기 훨씬 전인 4세기의 일이다. 남북조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 대륙의 힘이 공백 상태가 되자, 백제의 귀족들은 자체 무장력을 가지고 중국에 진출해, ‘백제군’ 또는 ‘진평현’이란 군현을 설치해 거점으로 활용했다. 이 거점을 통해 백제인들은 중국·백제 간 무역과, 백제·중국·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남북조 간의 대립 상황에서 남조의 정통 왕조를 돕는 정치적 역할까지 했던 것으로, 중국의 문헌인 나 는 기록하고 있다. 이른바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이다.

일본 나라의 백제식 가옥에서 출토된 토기류. 사진 권오영 한신대 교수 제공

일본 나라의 백제식 가옥에서 출토된 토기류. 사진 권오영 한신대 교수 제공

백제의 대외 진출과 교류에서 그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일본이다. 일본인이 ‘도래인’(渡來人)이라 부르는 이주자의 다수는 백제인이었다.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이 고대국가 체제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 기능을 담당한 불교를 처음 전해준 사람도 백제의 성왕이 보낸 노리사치계였다. 노리사치계는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일본에 가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백제는 그 뒤 577년(위덕왕 24)에 불상 만드는 기술자와 절 건축자를 보냈고, 이어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까지 보냈다. 이들은 단순한 기술자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절 짓는 목수는 ‘사사’(寺師), 기와 굽는 이는 ‘와(瓦)박사’, 탑의 상륜부를 만드는 이는 ‘노반(?盤)박사’ 등으로 불렸다. 기술자들이 박사나 스승 등의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에서 이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짐작되는 호칭이다.

한편 이보다 한참 전인 284년 무렵에도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은 와 을 전했으며, 태자의 스승과 사관이 되어 최초로 역사 기록을 맡기도 했다. 513년부터는 오경박사를 지속적으로 파견했다. 등 유학의 기본 경전인 오경에 밝은 학자인 오경박사는 국가의 지배이념이랄 수 있는 유교사상을 수십 년에 걸쳐 전파했다. 백제는 학문적인 전수 말고도 의학, 역학, 천문, 지리, 점술 등도 전파했다. 이런 백제인의 문화 전파는 일본의 고대국가 수립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고대사 최고의 인물로 평가하는 이는 7세기 초 스이코 천황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다. 그는 귀족들이 전횡하는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권력을 강화해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시키고 아스카 문화를 연 주역이다.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불교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부족제도를 초월한 보편적 교의를 가진 차원 높은 종교다. 이 때문에 불교의 수용은 씨성(氏姓)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호족 연합의 야마토 정권을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로 개혁하는 이념적 장치가 되었다. 쇼토쿠 태자는 이를 염두에 두고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불교 수용을 위해 아스카 문화의 상징이자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인 호류지(法隆寺)를 창건했다. 쇼토쿠 태자의 스승 역시 고구려의 승려 혜자와 백제에서 온 도래인이었다. 쇼토쿠 태자와 당시 개혁 세력에 섰던 소가씨 집안은 도래인의 협력으로 아스카 문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일본 고대국가 체제 형성에 백제는 이처럼 결정적인 뼈대 구실을 했다. 지금의 한류 역시 세계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미국과 일본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입하던 것과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찬란했던 백제 문화가 중국 것을 수입해 개발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류 역시 우리만의 원천 기술이라기보다는 수입·가공해 그 뿌리가 단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만의 원천 기술을 가질 때 단단한 생명력과 발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럴 때 찬란했던 백제 문화와 그 수출의 역사는 내일을 위한 성찰의 소중한 자산이 된다.

최용범 역사작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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