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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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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 타고 구제역 온다

등록 2001-04-11 00:00 수정 2020-05-03 04:21

중동에도 구제역 파동으로 식생활 혼란 초래… 각국 방역대책에 고심, 유럽과의 무역분쟁도

“먹을 것이 없다. 식탁이 푸른 초원으로 변해간다. 닭고기도 조심스럽고 쇠고기는 광우병 때문에 무섭고, 이제는 구제역이니 양고기도 겁이 난다.”

중동판 황사 ‘하마신’이 시작된 중동에도 구제역 파동이 사막의 모래바람을 타고 불어오면서 식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긴강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중동을 찾는 한국 방문자들은 늘 “중동 사람들은 뭐 먹고 삽니까”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하는데, 요즘은 정말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줄어들고 있다.

구제역은 이미 수년 전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제역이나 광우병은 유럽인들만의 골칫거리였고, 아랍인들에게는 단어도 낯선 질병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신종어가 돼버렸다. 지난 3월 중순 이후 구제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팔레스타인, 예멘에서 발생했고, 이들 아랍국가와 맞닿아 있는 터키, 이란 등지에서 발생이 공식보고되었다. 국제식량농업기구(FAO)나 국제수역(獸疫)사무국(OIE) 등은 구제역 발생이 공식보고되지 않은 다른 중동국가들도 이미 구제역의 영향권에 들었다고 보고 있다. 많은 현지 전문가들은 유럽산 수입 가축과 쇠고기 등에 혐의를 두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이는 중동에서 구제역 발병 사례가 이미 수년 전부터 포착이 되었지만 유럽의 구제역 파문이 일기 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OIE 보고서에 의하면 이미 99년 이전부터 바레인, 오만, 요르단, 시리아, 카타르 등 다른 아랍국가에서도 구제역이 발생하여 많게는 수백 마리에 이르는 양과 염소들이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구제역 청정지대’는 세계 40여개국 정도에 불과하며, 이중 중동국가는 하나도 없다.

유럽에 가축을 도살하는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면서 남의 일처럼 생각했던 중동 각국도 정부 대책기구로 구제역확산방지위원회를 구성하고 유럽산 축산물과 농산물 수입을 금지하며, 사육중인 가축들에 대한 예방접종 등의 방역 작업에 나서는 등 구제역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불안하기만 하다. 구제역 파동이 중동에 들불처럼 번져가면서 육류 소비가 감소하고 식생활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중동에서는 닭고기와 더불어 양고기, 쇠고기가 육류 소비의 주종을 이룬다. 지난해부터 유럽산 닭고기로 인해 곤욕을 치렀고 광우병에 대한 공포로 이미 쇠고기 소비가 줄어 있던 터에 다시금 양고기 소비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값비싼 어류가 안전하겠다 싶지만 어류는 주식이 아니어서 중동인들은 이제 무엇을 먹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때문에 그러잖아도 쪼들려 있는 농가와 지방경제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설상가상으로 중동국가들이 구제역 발생이 확인되지 않는 다른 유럽국가에 대해서도 축산물 금수조치를 내린 것과 곡물까지 수입금지 조치한 모로코, 튀니지 등의 행위는 명백한 불공정 무역행위라며 유럽연합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나서는 등 구제역과의 전쟁이 유럽과의 무역전쟁으로 비화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더욱 공포스런 중동의 황사

아직까지 구체적인 감염경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제역은 병에 걸린 동물과의 접촉뿐 아니라 여행자의 옷과 신발, 자동차 등 화물을 통한 전염은 물론이고, 바람을 타고 바다를 건너 300km까지 전파될 수 있다는 점이 밝혀져, 병역당국에 더욱 큰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요르단의 경우 요르단을 찾은 아랍지역 방문자의 80% 안팎이 육로로 입국하는 등 적지 않은 아랍인들은 인근 아랍국가들을 여행할 때 육상 교통 수단을 이용하고 있다. 또한 봄철 하늘을 잿빛으로 바꾸고 한치 앞을 가늠하기 힘들게 하는 중동의 황사가 강하게 불고 있다. 물론 아랍지역의 축산 방식은 좁은 공간에서 사료를 먹여 키우는 유럽이나 다른 지역과 달리 주로 방목을 한다는 특징이 있어 질병의 확산은 상대적으로 더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이 번져가는 흐름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중동인들의 일반생활 깊숙이 큰 혼란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암만=김동문 통신원 yahiya@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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