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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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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오래된물건 ] 부끄러운 디즈니 필통

등록 2006-07-20 00:00 수정 2020-05-03 04:24

▣ 한초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이거 우리 아빠가 미국에서 사온 거다~.” 디즈니 필통을 흔들며 하늘로 치켜든 선아의 턱은 꼭 나를 찌를 것만 같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 부럽잖게 살던 실공장 막내딸이었던 나. 값싼 중국제가 밀려온 80년대 후반, 문 닫는 공장 사이에서 우리 집 공장도 부도가 나 소공녀처럼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었고, 빚쟁이들의 방문과 집의 공매 처분, 단칸방으로의 이사가 이어졌다. 사춘기 초등학생의 자존심을 지키기엔 턱없이 좁은 방과 차가운 수돗물은 발에 맞지 않는 신발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차에 단짝의 필통 자랑은 11살 소녀의 가슴에 질투의 불을 지폈고, 급기야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필통을 훔치고야 말았다. 필통이 없어졌다고 울먹거리는 선아에게 모른다며 시치미를 뗐지만 심장이 꽹과리처럼 울려댔고 지금은 숨기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이후, 마음이 넉넉한 선아는 좋은 것은 나에게 양보하며 배려해주었고 그 따뜻한 마음은 불평 많은 나를 다독였다. 같은 중학교를 진학하면서 더욱 사이가 돈독해졌다. 다행히 집의 형편이 좋아지게 되어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선아와 제대로 작별도 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그 뒤 이어진 선아의 편지는 외로운 내게 위로가 됐다. 지난해 대학원 졸업 준비에 한참 바쁜 때에 결혼한다며 선아에게서 불쑥 전화가 왔다. 나 한국 가면 결혼하라며 고집 부리던 나에게 “그렇게 됐다”며 선아는 결혼을 했고 난 내심 서운했다. 그리고 11년간의 타향 생활을 마치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방을 뒤적이다 책상 깊숙이에서 노랗게 변해버린 선아의 디즈니 필통을 발견했다. 부끄러웠던 마음도 그곳에 함께 있는 듯했다.

다음주면 사랑스런 나의 친구 선아를 만나게 된다. 속도위반으로 낳은 딸 은호도 본다. 6개월 만에 태어났으니 학교도 일찍 보내야겠다는 내 농담에 너털웃음으로 때우는 선아의 남편도 만난다. 지난날 그렇게 꿈꿨던 만남. 플로리다의 디즈니랜드에서 사온 은호의 미키마우스 신발과 책상 속 미키마우스 필통과 함께, 오랫동안 감춰둔 내 양심을 불러 고해성사하듯 선아에게 용서롤 구하려 한다. “사실은 내가 그랬어. 용서해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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