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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전자 전기차 충전기 사업 일방적 철수에 ‘날벼락’… 엘지 “협력사 손해 최소화 위해 지원 방안 마련”
등록 2025-09-26 10:56 수정 2025-10-01 09:01
엘지(LG)전자 비에스(BS)사업본부장 장익환 부사장이 2024년 10월10일 경기도 평택 디지털파크에서 엘지전자의 비즈니스솔루션(BS) 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엘지전자는 ‘의료용 모니터·전기차 충전기 등 유망 신사업을 육성해 지속 성장하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6개월 뒤 엘지전자는 전기차 충전기 사업 철수를 발표했다. 엘지전자 뉴스룸 제공

엘지(LG)전자 비에스(BS)사업본부장 장익환 부사장이 2024년 10월10일 경기도 평택 디지털파크에서 엘지전자의 비즈니스솔루션(BS) 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엘지전자는 ‘의료용 모니터·전기차 충전기 등 유망 신사업을 육성해 지속 성장하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6개월 뒤 엘지전자는 전기차 충전기 사업 철수를 발표했다. 엘지전자 뉴스룸 제공


 

N사는 2022년 2월 설립된 작은 전기차충전사업자(CPO)다. CPO는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해 전기를 판매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이 회사는 여느 CPO들과 달리 오직 엘지(LG)전자 전기차 충전기만 취급했다. 비밀유지계약(NDA)을 맺고 엘지전자 전기차 충전기 연동규격 등을 받아 엘지전자 충전기에 맞는 관제 시스템과 애플리케이션을 개발·보완해온 것이다. ‘대기업 CPO’(GS차지비, LG유플러스 등)가 아닌 신생 중소기업으로는 유일한 사례다.

시스템도, 앱도 엘지전자 전용으로 구축

영업도 엘지전자와 관한 것만 했다. 2023년 7월부터 2024년 2월까지 부산·충청·호남·강원 등 엘지전자 B2B(기업 간 거래) 대리점들을 대상으로 일곱 차례 영업 방식에 대한 설명회도 열었다. 지방자치단체나 시공사 등과의 영업 상황도 엘지전자와 공유했고, 공급계약 관련 양해각서 등을 체결할 때도 함께 했다. 이런 특별한 대접 덕분일까. N사는 전기차 인프라 업계의 ‘거물급 신입’으로 눈길을 끌었다. 2023년 8월 엘지전자 전기차 충전기 제품이 출시되기 직전, 서울 코엑스 전기차 충전 인프라 특별관에서 처음으로 ‘엘지전자 충전기 전시회’를 연 것도 N사였다. “사실상 협력업체를 넘어 자회사처럼 같이 움직였던 거죠.” 2025년 9월18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한겨레21과 만난 N사 장아무개 대표가 말했다. 이날 엘지전자의 한 내부 관계자도 한겨레21에 장 대표의 말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그런데 2025년 4월 엘지전자가 갑자기 전기차 충전기 ‘사업 철수’를 결정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장 대표는 이 날벼락 같은 사업 철수 소식을 사업 철수 한 달 전 다른 협력업체를 통해 들었다. 그간 엘지전자는 보도자료·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전기차 충전 사업을 연 매출 조 단위 규모로 키우려고 전사 차원 노력 중”(2024년 3월)이라거나 “2025년까지 충전기 제품 라인업을 보강하겠다”(2024년 10월) 등과 같은 메시지를 내놓았는데, 몇 개월 사이에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장 대표는 5월28일 ‘엘지그룹 정도경영 신문고’에 호소문을 올렸다. “사업 철수에 따른 대응 방안을 엘지전자 쪽에 문의했으나, 제대로 된 답변을 얻지 못했다. 피해가 막심하다. 철수라는 판단을 하게 되면 당연히 협력 기업이 감당해야 할 치명적 이슈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지원·해결을 제안하는 것이 당연한데 몰래 조용히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너무도 실망스럽다.”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7월1일 엘지전자는 “(해당 내용은) 독자적 사업 활동에 따라 추진된 것으로 당사와 무관한 제삼자 간 거래이기에 손실 보상이 되기 어렵다”고 답했다. 다만 “충전기 무상 에이에스(AS) 기간을 2030년까지 제공하고, 재고(73대) 환불 조치는 하겠다”고 덧붙였다.

사업 철수 한 달 전, 다른 업체 통해 소식 들어

“(엘지전자 쪽이) 갑자기 지난 3년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더라고요.”

장 대표가 그간 거래처나 엘지전자와 주고받은 각종 전자우편 등을 한겨레21에 보여주며 말했다. N사는 그간 다른 전기차 충전기에는 쓸 수 없는 ‘엘지전자 전용’ 관제 시스템 개발, 로봇충전기 대응을 위한 개발 인력 충원 등에 3년간 14억6천만원을 쏟아부었다. 이 정도 투자 규모는 N사의 연 매출(2024년 7억원)로 볼 때 ‘올인’에 가깝다. 공급 직전까지 갔던 거래만 39건(약 39억원, 설치비용과 기대수익 포함)에 달했다. 10년짜리 계약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시장에서 신뢰가 완전히 추락했다는 거죠. ‘야, 엘지전자가 충전기 사업을 더 키운다고 했잖아? 앞으로 네 말을 어떻게 믿어’라고들 하죠. 엘지전자라는 네임밸류(이름값) 때문에 2035년까지 10년짜리 계약을 따낸 건데, 엘지전자가 사업을 철수한다고 하면 계약을 파기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건 갑질이고 일방적인 통보잖아요. 지금 설치된 급속충전기 16대의 순수 제품가격(5억원)이라도 환불해줘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야 다른 사업을 준비할 돌파구라도 찾아보죠. 이대로라면 그냥 투자자들한테 멱살 잡히고, 파산 수순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장 대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직원이 11명이던 회사에 이제 3명만 남았다고 했다.

엘지전자의 일방적인 사업계획 변경에 따른 피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첫 전기차 충전기 출시 일정을 2022년 말~2023년 초에서 2023년 8월로 늦추면서 N사가 시공사들과 사전 협의했던 급속충전기 공급 계약들(82건, 약 82억원)이 줄줄이 날아갔다. “그때도 갑자기 출시 연기를 통보해서 ‘저희 (시공사) 회장님들한테 욕먹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했지만, 담당 임원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참아야지 어떡하겠습니까. 엘지전자랑 사업할 기회라 생각하고 이겨내려고 했죠. 그런데 결과가 이렇네요.”

이에 대해 엘지전자 쪽은 한겨레21과 만나 “N사는 엘지전자와 전기차 충전기 공급 계약을 맺은 여러 CPO 중 한 곳으로, 수주 확보를 위한 다양한 지원은 N사 외에 다른 기업들에도 해온 통상적인 일”이라며 “내부 경영적인 이유로 사업 종료(철수)를 미리 말할 순 없었다. 이 때문에 협력사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전담조직을 만들어 고장수리, 출동서비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등을 2030년까지 연장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이들은 이어 “이미 다른 협력업체들과는 대부분 원만한 합의로 적절한 보상을 마무리 지었다. 여러 차례 N사 쪽에 근거자료 제출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아 진행이 안 되고 있을 뿐”이라며 “소통이 잘 안 된 점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수주 시도나 관제 시스템 개발 등을 포함해 N사가 요구하는 내용이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 다만 이미 사용한 충전기를 환불할 순 없다”고 덧붙였다.

장 대표는 이에 대해 “N사가 여러 대리점 중 하나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N사는 엘지전자가 세운 내부 전략을 이행하는 데 동원됐다는 것이 핵심”이라며 “우리처럼 작은 신생 회사가 뭘 믿고 전기차 충전기 사업에 뛰어들었고 엘지전자는 또 무슨 이유로 우리랑 같이 이 많은 일을 했겠느냐”라고 말했다. 엘지전자의 한 내부 관계자는 “그룹 차원의 ABC(AI·Bio·Clean tech) 전략을 위해 국내외 많은 파트너사와 협력하며 미래사업을 준비하는데, N사와 같은 사례를 보면 누가 엘지와 신뢰를 갖고 사업 협력 관계를 유지할지 의심스럽다”며 “국내의 작은 중소 스타트업이라면 참고 견디거나 조용히 사라지겠지만 국외 업체와도 이럴 수 있을까. 추석 명절에 협력사와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위해 납품 대금을 조기에 집행한다고 홍보만 할 것이 아니라 지난 과오를 해결하고 상생을 외쳐야 한다”고 꼬집었다.

“책임질 사항 없다”만 되풀이하는 엘지전자

장 대표는 7월4일 ‘엘지그룹 정도경영 신문고’에 다시 이런 글을 올렸다.

“이게 정말 ‘인간존중’ ‘정도경영’을 표방하는 엘지의 모습인가요? 엘지전자는 경영적인 이슈로 사업을 종료했지만, 엘지전자의 사업을 믿고 모든 걸 걸고 사업을 구축하여 뛰어든 저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엘지전자 충전 사업을 담당했던 담당자는 책임질 사항이 없다는 내용의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억 울함은 하늘이 알고 현재 저희 사정을 아는 엘지전자 임직원도 다 압니다. 자사의 억울함을 해결해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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