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만큼 참았다? 그만 좀 해라?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 인베스트먼트’가 한국과 관련해 ‘enough is enough’라는 제목으로 투자자 대상 보고서를 내어, 한국의 주가가 다른 나라보다 낮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극소수 재벌 일가의 이익을 위해 소액주주가 고질적으로 희생되는 ‘취약한 기업지배구조’(Poor Governance)에 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외국계 투자자가 정부와 여당이 주가 하락의 원인으로 공매도를 꼽은 데 대한 정면 반박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앞서 금융위원회는 2023년 11월5일 공매도 금지를 발표하며 “증시의 공정한 가격 형성을 위해”라고 밝힌 바 있다.
2023년 12월7일 투자업계에 따르면, 조너선 파인스 헤르메스 수석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최근 보고서를 내어 극소수 재벌 총수 일가를 위한 한국의 고질적인 제도적 문제점을 꼬집었다. 보고서는 “한국에선 보통주 대비 우선주 괴리율이 50%에 이르고, 지주회사 주식은 계열사 주식에 비해 할인율이 65%에 이르는 등 이례적인 일이 넘쳐난다”며 “이와 함께 한국 주가의 저평가 상황은 취약한 기업지배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밝혔다. 한국은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 가격이 보통주보다 절반 정도 낮은데, 독일(평균 3%)과 미국(10%) 등에 비해 훨씬 괴리율이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또 “글로벌 스탠더드에 못 미치는 법률과 규제는 최대주주 일가에게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도록 하는 동시에 소액주주들을 착취할 수 있게 했다”며 “(헤르메스가) 한국에 진출한 14년 동안 이런 상황을 목도했고, 직접 영향받을 경우 최대주주와 대화는 물론 경영자, 판사 등에게까지 편지를 보냈지만 허사였다”고 했다.
취약한 기업지배구조의 원인으로 △정치권력을 압도하는 극소수의 최대주주(재벌) 권력 △최대 60%에 이르는 상속세율 등을 꼽았다. 보고서는 “소수 최대주주를 위한 법이 시민보다 우선이고, ‘자사주 소각’ ‘의무공개매수’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며 “재벌은 상속세를 적게 내려고 주가는 낮게, 배당은 적게 하면서 계열사 자산이나 일감을 자신들이 지배하는 회사에 떠넘기도록 해서 손쉽게 부를 쌓는다”고 밝혔다. 국내에선 기업이 자사 주식을 사들여 계속 갖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 등 외국에선 대부분 매입과 소각을 동시에 해서 주가 부양에 바로 영향을 미친다. 의무공개매수는 기업 인수시 최대주주에게서 인수한 주당 가치를 소액주주에게도 보장하는 제도인데, 한국에는 이런 제도가 없다.
주가 부양을 위한 일본의 노력도 소개했다. 2023년 4월 취임한 일본 도쿄증권거래소 야마지 히로미 사장은 기업들이 매출과 영업이익뿐만 아니라 주가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밝혔고, 이후 일본 기업의 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배당 인상과 자사주 매입·소각 소식이 들려온다고도 전했다.
이에 따라 헤르메스는 향후 적극적으로 의결권 행사에 나설 계획이다. 보고서는 “최근 일본 상황을 교훈 삼아 한국의 취약한 지배구조에 대응하기로 했다”며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 순자산가치 대비 주가(PBR)가 1 이하 기업에 대해 이사 재선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1 이상인 기업이더라도 부당한 일감 몰아주기 등이 있는 기업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계획”이라며 “사실 안건 부결까지 이끌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회사에 가치를 깎는 행위에 대한 불만을 가장 공식적이고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헤르메스는 한국 시장에 2조원 규모를 투자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이마트, 영원무역, 신한금융지주 등에 지분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자본시장 관계자는 “해외투자자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정부가 주장한 공매도가 아니라 기업지배구조 때문이라고 적극 반박한 셈”이라며 “2023년 적극적으로 늘어난 국내 행동주의펀드도 이에 합류할 경우 큰 변화가 올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해외 기관투자자 자금을 운용하는 국내 자산운용사의 임원은 “한국 주식시장에서는 지배주주가 일반주주에 손해를 끼치는 거래가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법상으로 보장되고 이사회도 대부분 지배주주 의도에 따라 움직여서 가치투자의 결실을 맺기 어렵다”며 “헤르메스펀드도 이같은 한국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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