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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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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준법감시위 이재용 살릴까

김지형 전 대법관 “독립성·자율성 확약받아”… 면피용 우려도
등록 2020-01-11 05:47 수정 2020-05-07 00:59
1월9일 서울 충정로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열린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전 대법관이 인사하고 있다.

1월9일 서울 충정로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열린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전 대법관이 인사하고 있다.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김지형 전 대법관(변호사)의 위원장 선임 사실만으로도 많은 논란을 불렀던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위원회)의 대략적인 얼개가 공개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 농단 사건 재판부의 주문에 따라 설치된 위원회가 자율적·독립적 운영을 강조한 김 전 대법관의 포부대로 제대로 운영된다면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을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면 위원회가 이 부회장만 살리는 면피용으로 전락하리라는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다.

“삼성그룹 내부에서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피고인들뿐 아니라, 박근혜 전 대통령, 최서원(최순실)씨도 이 사건 범죄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이같은 범죄가 재발될 수 있다.”

이 부회장 직접 ‘약속’받고 수락

지난해 10월25일 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재판장은 이 부회장의 국정 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첫 재판에서 이 부회장에게 준법감시제도를 마련하라는 이례적인 주문을 했다. 두 달 전인 8월에 대법원이, 삼성이 최씨에게 제공한 말 세 마리를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뇌물로 인정하는 취지의 파기환송을 판결했기에, 집행유예 상태인 이 부회장의 재구속 여부는 정 재판장의 판단에 달렸다.

이러한 이례적인 주문에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이 내부 통제 장치를 강화한다면 이 부회장을 봐줄 수 있다는 취지로 해석될 수 있어 부적절하다”는 성명을 내는 등 비판이 잇따랐다.

삼성은 재판부의 주문을 수용하면서 김 전 대법관을 선택했다. 김 전 대법관의 1월9일 기자간담회 발언 내용을 종합하면, 그는 애초 “삼성의 진정한 의지에 대한 의심이 있었고, 위원회가 혁신적인 개선 조처를 이루지 못한다면 ‘이용만 당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위원장 수락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김 전 대법관을 직접 만나 위원회의 완전한 자율성과 독립성 보장을 “확약”해 위원장직을 수락했다는 것이 김 전 대법관의 말이다. 그는 “삼성이 변화의 문을 먼저 열었다는 점이 중요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실패해도 뭔가를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인용 삼성전자 사회공헌업무총괄 고문(전 커뮤니케이션실장), 고계현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총장, 권태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국정 농단 사건 수사 당시 대검찰청 차장이던 봉욱 변호사, 공정거래·자본시장 전문가인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 심인숙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6명의 위원도 김 전 대법관이 직접 선임했다.

김 전 대법관은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등 조정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수년 동안 해결 기미를 보이지 못했던 직업병 피해자와 삼성 사이의 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위원장, 서울 구의역 사고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이른바 ‘김용균 특조위’) 위원장을 맡아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공익적 조정 역할을 맡기도 했다. 김 전 대법관을 잘 아는 한 변호사는 “삼성 백혈병 조정위원회를 하면서 삼성 백혈병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백도명 서울대 교수를 위원으로 선임하는 등 삼성과 마찰이 굉장히 심했던 것으로 안다. 삼성이 조정위를 컨트롤(조종)하려 했지만, 김 전 대법관이 이를 방어하고 조정을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간담회에 앞서 지평 건물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노동단체 회원들이 김 전 대법관의 준법감시위원장 내정을 비판했다.

간담회에 앞서 지평 건물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노동단체 회원들이 김 전 대법관의 준법감시위원장 내정을 비판했다.

삼성전자 등 7곳 위법행위 감시

문제는 그동안 온갖 불법을 ‘은밀히’ 저질러 총수는 물론 고위 경영진이 줄줄이 수사 대상이 된 삼성에서 김 전 대법관과 위원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다. 삼성은 여러 차례 준법경영과 윤리경영을 약속했고, 준법감시제도 역시 두고 있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선언’에서 “도덕성 회복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고, 2011년에도 ‘무관용 준법경영’을 선포했다. 2010년엔 준법감시 전담조직인 ‘컴플라이언스팀’을 신설했다.

그러나 1996년 경영권 승계를 위한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과 2007년 비자금 사건이 터져 특별검사의 수사를 받았고, 이건희 회장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또 2010년 이후에는 그룹 차원의 광범위한 노조 파괴 사건이 일어났다. 최근엔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박근혜 정권 실세에게 뇌물을 줬다. 이러한 위법경영은 삼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

위원회는 사무국에 조사관을 둬 삼성전자 등 계열사 7곳의 위법행위를 감시하고 최고경영진의 위법행위는 별도의 신고를 받는다는 계획이다. 위법사항이 발견되면 위원회 차원의 요구와 권고를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홈페이지 등을 통해 외부에 공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은밀하게’ 이뤄지는 경영진의 불법행위를 제대로 감시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임자운 반올림 활동가(법률사무소 지담 변호사)는 “삼성은 그동안 외부 독립기구의 감시를 받으라는 요구를 정체불명의 내부 감시 조직을 만드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 조직들은 결국 제 기능을 못했고, 삼성의 불법은 이어졌다. 이번 위원회가 그 조직들과 어떻게 다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위원 가운데 유일한 내부 인사인 이인용 고문의 존재는 위원회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지적된다. 이 고문은 이 부회장의 서울대 동양사학과 선배로 대표적 측근으로 꼽히며, 언론홍보 담당 사장을 맡으며 삼성의 ‘거짓 해명’을 비롯한 ‘위기 대응’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 전 대법관은 이 고문의 구체적인 역할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다 할 답을 하지 않았다.

김 전 대법관 “유성기업 소송대리 철회”

위원회의 활동 대상을 “설치 뒤 발생한 사항”으로 한정한 것도 한계로 꼽힌다. 국정 농단 사건에서 유죄를 받은 이 부회장을 비롯해,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임직원 상당수가 ‘현직’이다. 김 전 대법관이 말한 것처럼 위원회가 “회복적·치유적 정의를 돕는 존재”라면 과거 위법행위에 대한 단절이 필요하다. 그러나 위법행위를 한 임직원에게 회사 차원의 징계를 권고할 것인지에 대해 김 전 대법관은 “위원회는 설치된 이후의 사항을 중심으로 다루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김 전 대법관은 준법감시 분야에 “성역을 두지 않겠다”며 노동 관련 리스크도 관리하고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조 와해 사건을 부른 ‘비노조 경영 원칙’ 철회 등의 사안에선 “위원들과 함께 논의해서 구체적인 것을 마련하겠다”고 답하는 데 그쳤다. 본인 스스로 대표적 ‘노조 파괴 기업’인 유성기업 관련 소송에서 회사 쪽을 대리한 점에 대해서는 “미처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제 잘못이고 스스로 돌아보는 좋은 계기로 삼겠다”며 기자간담회 이틀 전에 소송대리를 철회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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