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근처에 5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의 지하 출입구는 업소용 냉장고 문처럼 생겼다. 냉기가 쏟아져나올 것 같은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1층 커피숍을 지나 2층에 올라가면 100평짜리 거대한 주방이 나타난다. 주방에는 줄지어 늘어선 조리대와 싱크대, 가스레인지와 오븐, 반죽기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주방에 딸린 홀도 없고 식탁·의자, 손님도 없다. 그럼 요리를 가르쳐주는 학원일까? 그것도 아니다.
신생 벤처기업 ‘심플프로젝트컴퍼니’(브랜드명 ‘위쿡’)가 운영하는 이곳(위쿡 사직지점)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공유주방’이다. 음식을 만들고 싶은 이들은 이 주방을 시간 단위로 빌려 음식을 제조·가공하고, 일반 소비자나 다른 유통기업에 팔 수 있다. 임대료는 시간당 1만5천원으로 이용하는 시간이 길수록 깎인다. 60시간을 이용하면 60만원 수준이라 한다. 기본 조리도구들은 갖춰져 있고 자신이 쓰던 것을 가져올 수도 있다. 단순히 주방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재료를 보관할 수 있는 냉장·상온 창고와 만든 음식을 포장하는 공간도 별도로 있다.
집기 구매비나 월세 대신 시간당 이용료
이곳에서 만드는 음식은 쿠키부터 김치까지 다양하다. 위쿡 자료를 보면, 8월 기준 사직지점 멤버십(회원제)에 가입한 팀은 150곳이다. 소스나 잼, 과자·빵, 음료, 간편식을 만들어 온라인에서 유통하는 곳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아직 본격적인 제조·생산을 하지 않더라도, 제품 개발을 목적으로 공유주방을 이용하는 이도 많다.
8월26일 기자가 찾은 날도 이용을 희망하는 예닐곱 팀이 이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위쿡 관계자는 “아이디어는 있는데 어떻게 사업화할지 고민하는 ‘초기 단계’ 푸드메이커(식품 자영업자)도 있고, 이미 하는 사업을 공유주방을 근거로 확장하려는 분들까지 물어보는 분이 아주 다양하다”며 “실제 이곳을 이용하기 위해 투어(견학)하는 분들도 한 달에 200명 가까이 된다”고 말했다.
공유주방을 사업 기회로 삼는 이가 늘어난 것은 온라인 식료품 주문·배송 서비스 성장, 그리고 ‘규제샌드박스’ 덕분이다. 최근 새벽배송이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온라인에서 식료품을 주문하는 플랫폼 서비스가 급성장하고 있다. 집에서 음식을 해먹는 사람이 줄어들고, 미식 열풍으로 수요 형태 또한 다양해져 식품 제조업 역시 성장하고 있다. 마켓컬리·쿠팡플래시 같은 주문 플랫폼에 입점해 음식을 판매·유통하는 기회가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공유주방에서 만든 음식의 비투비(B2B·기업 간 전자상거래) 유통이 가능해진 것은 얼마 안 됐다. 현행 식품위생법에선 동일 주방을 다수 사업자가 공유하는 창업이 불가능하고, 공유주방에서 만든 식품을 최종소비자가 아닌 다른 유통기업에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주방이라는 공간이 있어야만 사업자 신고를 할 수 있는데, 그 공간을 여러 사업자가 쓰면 불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위쿡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에 ‘실증특례’ 신청을 내 7월11일에 통과됐다. 위생관리 책임자를 운영하고, 제품별 필수 표시사항·유통기한 명시 등의 조건이 붙었다.
‘수키’라는 브랜드로 쿠키를 만드는 엄수연(40) 대표도 위쿡 사직지점을 이용할 예정이다.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한 뒤 건축자재 관련 회사에서 15년 동안 근무하다, 2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파티시에(제과제빵사)로 변신했다. 엄 대표는 “업계 내에서 이직도 해가면서 오래 일했지만, 건강에 무리가 오고 무엇보다 이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컸다. 내가 좋아하고 오래 할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파티시에를 준비하게 됐다”고 했다.
1년 남짓 준비해 위쿡 공유주방에서 사업을 시작하려 했지만 규제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지난 4월 서울 광화문 주상복합건물 상가에 작업실을 냈다. 상품은 온라인에서 팔거나 카페에 납품하기 때문에 굳이 손님을 맞을 공간이 필요 없었다. 과자를 굽고 포장하는 공간만 있으면 됐다. 엄 대표는 “오븐을 포함해 기본 집기를 갖추는 데만 700만원 정도 들었고, 월세·관리비는 100만원 가까이 든다”며 “이제 공유주방을 이용하게 돼 작업실을 정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유주방에서 조리하고 배달 플랫폼에서 배달
비투비 공유주방은 이제 시작이지만, 배달을 중심으로 한 비투시(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공유주방은 이미 성업 중이다.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배달형 공유주방 브랜드가 30개 넘는 것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배달형 공유주방 역시, 배달의민족·요기요 같은 음식 주문·배달 플랫폼의 성장에 따라 더욱 커질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업계는 배달음식 시장을 20조원 남짓으로 추산한다. 배달형 공유주방을 통해 창업하면 음식점 창업에 장벽이 되는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싸고, 권리금이 없다. 굳이 매장을 꾸밀 필요도 없다. 주방과 요리사, 주문 플랫폼을 통한 마케팅 정도면 식당을 운영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손실이 덜하다.
8월21일 오전에 찾은 서울 신사동의 위쿡 신사지점은 배달형 공유주방이다. 지하철 압구정역 근처 건물 지하 1층에 130평 규모로 자리한 신사지점은 모두 10개 업체가 들어올 수 있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주문이 접수되는 포스(POS·판매시점 정보관리시스템) 10대가 줄지어 있고, 배달원들이 음식을 가져가는 공간도 있다. 주문 접수부터 배달까지 모두 위쿡에서 대행해, 음식점주들은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다. 임대료는 보증금과 매출에 따른 비율을 정해 수수료 방식으로 낸다.
미국식 중국요리를 파는 ‘부웍’은 푸드코트에 있다가 이곳으로 9월 초 이사 왔다. 장혜정(38) 부웍 대표 역시 은행에 10년을 다니다 3년 전 퇴사하고 창업했다. “배낭여행을 할 때 자주 찾았던 외식 프랜차이즈를 직접 운영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창업교육을 받고 서울 상암동의 푸드코트에 입점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푸드코트라 홀이나 인력 관리 부담은 적었지만, 임대료와 관리비 부담이 컸다. 방송가다보니 시간과 요일에 따른 매출 차이도 컸고, 같이 입점했던 업체들이 하나둘 떠나는 걸 보니, 아예 배달 쪽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3년 계약이었지만 위약금을 내고 1년 만에 나왔다.”
프랜차이즈로 운영되는 테이크아웃 샐러드 전문점 ‘투고샐러드’도 입점해 있다. 박주희 투고샐러드 운영지원실장은 “가맹점 하나 내려면 1억~1억5천만원이 드는데 권리금 없이 입점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며 “배달만으로 운영이 가능할지 의심했지만 기대보다 매출이 잘 나와 긍정적으로 보고 추가 출점도 공유주방을 이용하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푸드스타일리스트·마케터가 멘토링 교육도
공유주방을 이용해 창업한 뒤 만족도가 높은 이유는 비용절감 때문만은 아니다. 음식점을 창업한 이들에게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도 제공한다. SBS 예능 프로그램 <골목식당>에서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해당 상권의 자영업자들에게 메뉴 개발과 식당 운영 전반을 도와주는 것과도 비슷하다.
위쿡 사직지점에는 배달음식 전문점에 ‘생명’과도 같은 음식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스튜디오가 있다. 요리사·푸드스타일리스트·마케팅 전문가가 입주한 이들에게 멘토링 프로그램도 상시 운영한다. 창업자들이 기본 사무 업무를 볼 수 있는 ‘코워킹스페이스’(공유 사무실)도 있다. 엄 대표는 “브랜드 작업이나 쿠키 포장, 쇼핑몰용 사진 촬영까지 많은 자문을 해준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건물주와 임대료 갈등을 빚다, 대표가 ‘특수상해’ 혐의로 구속된 ‘서울 서촌 궁중족발’도 대표자의 아들과 아내가 위쿡 신사점에서 ‘족발의 여정’이라는 이름으로 재출발했는데, 위쿡에서 메뉴 개발 등을 비롯한 도움을 받고 있다.
외로운 자영업자에게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도 힘이 된다. 위쿡 관계자는 “배달형 매장은 주문 플랫폼에 입점하는 것부터 고객 응대·배달까지 모두 함께 서비스를 한다”며 “공유주방 브랜드 가운데는 임대만 해주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직원이 상주하면서 대표님들께 최대한 많은 서비스를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장 대표는 “바쁠 때 매장 매니저가 와서 설거지도 해주고 포장용기를 정리해주기도 한다. 같이 입점한 대표님들이랑 새 메뉴가 나오면 시식도 해보고, 식자재를 공동으로 사기도 한다. 여러모로 힘이 된다”고 말했다.
집 주변이나 직장, 번화가의 음식점들은 계절에 따라 풍경이 바뀌듯 언젠가 생겨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진다. 통계청의 기업생멸행정통계를 보면, 2017년을 기준으로 전국에 음식점(주점업 포함) 기업 77만8932곳이 있었다. 그해에 15만5283개가 생겼고, 13만5644개가 사라졌다. 숙박업을 포함한 숙박·음식점업(이 업종 가운데 숙박업 비중은 5% 남짓에 불과하다) 기업의 1년 생존율은 2016년 기준 61.0%지만, 5년 뒤엔 5곳 가운데 1곳(18.9%)만 살아남는다. 이 수치는 전체 기업 생존율 65.3%, 28.5%와 비교해 낮다.
“외식 자영업자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
공유주방이 자영업자들을 도울 수 있을까. 또 산업 자체는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김기웅 심플프로젝트컴퍼니 대표는 “현재까지 음식산업은 부동산을 빌려야만 영업이 가능해 ‘공간’ 중심으로 생태계가 구성됐지만, 생태계가 ‘음식을 만드는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식품 제조업과 음식점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패러다임 변화에 공유주방이 놓여 있다고 본다”며 “앞으로 외식 자영업자를 ‘소상공인’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할 것이 아니라 ‘성장’시킬 수 있는 기업으로 바라봐야 하고, 거기에 공유주방이 긍정적 도움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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