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경기 침체라면….” “여기선 그 단어를 쓰면 안 돼요.” “그럼 뭐라고 하죠?” “아무거나 다른 것. 이를테면 베이글?”
미국 백악관을 배경으로 삼은 드라마 <웨스트 윙>에서 참모들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그 단어, ‘경기 침체’를 끝내 ‘베이글’로 하기로 한다. ‘2분기 연속 마이너스성장’이라는 어느 정도 합의된 개념을 가진 미국 정부조차 ‘침체’라는 단어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침체’ ‘둔화’ ‘부진’의 차이
광고
침체 기준 자체가 불분명한 우리 현실에서 경기 침체 논란은 한층 복잡하고 미묘하다. 기획재정부가 매달 발표하는 <최근경제동향>(일명 ‘그린북’)을 통해 현재 경기 상황을 평가하는 우리 정부도 ‘침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베이글보다 더 모호하고 다양한 표현을 동원한다. 지난해 6월까지 ‘회복 흐름’이라는 문구가 주로 쓰였고, 이후로는 ‘회복 흐름이지만 (주로 국외 요인에 따른) 불확실성이 확대된다’가 자주 활용됐다. 이달 들어선 ‘부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파도치듯 오르락내리락. 경기변동은 자본주의 경제의 숙명이다. 저점을 찍고 올라오다가(회복) 과열(호황)된 뒤, 서서히 내려가며(둔화) 다시 저점(침체)으로 향한다. 확장기(회복·호황)와 수축기(둔화·침체) 두 단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정부는 경기에 따라 조세·재정·통화 정책을 조정하고,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늘리거나 줄인다. 시민들도 경기에 따라 씀씀이를 늘려야 할지 줄여야 할지 고민한다. 경기 국면 판단이 경제주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한국 경제는 1972년 이후 10번의 파도를 겪었다. 2013년 이후 지금은 11번째 파도를 타는 중이다. 아직 이번 파도의 꼭짓점(정점)이 어디인지 정해지지 않았다. 경기 판단 기관인 통계청은 6월께 이번 경기 순환기의 정점을 발표할 계획이다. “2017년 2분기와 3분기 사이가 될 것”이라고 강신욱 통계청장은 잠정적으로 밝힌 바 있다. 즉, 경기가 정점을 지나 이미 수축기에 접어들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래서 ‘둔화를 넘어 침체인가 아닌가’다.
침체냐 아니냐. 최근에 만난 정부와 경제분석기관의 담당자들은 이를 두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예민한 반응이 당황스럽다”고 한숨을 내쉰다. 지난 한 달여 벌어진 ‘경기 인식 논쟁’을 이야기하면서다. 정부는 그린북 3월호에서 최근 경제 상황에 대해 ‘긍정적 모멘텀’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안이한 경제 인식을 내보였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이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그동안 경기 상황을 ‘둔화’라고 판단했던 데서 ‘점차 부진’으로 조정하면서, 정부의 경제 인식에 대한 공격은 더욱 힘을 얻었다. 그린북 4월호에서 정부는 결국 “실물지표 흐름이 부진한 모습”이라고 KDI의 ‘부진’ 표현을 따랐다. 이번에는 정부가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위해 경기 인식을 비관적으로 돌렸다”는 비판이 시작됐다.
광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5월에는 그린북에서 ‘회복 흐름 지속’이라는 문구를 빼놓았다가, “정부가 경기 인식을 전환했다”는 기사가 쏟아지자 3시간 만에 정부는 ‘회복 흐름’ 문구를 다급하게 추가했다. 비슷한 시기 김광두 전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의 쓴소리에서 시작된 ‘경제위기’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총리가 ‘그린북’ 표현을 살피기도
문제는 이런 논란이 ‘경기 용어’에 대한 ‘피치 못할 오용’과’ ‘의도된 오해’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안이한 경제 인식 논란을 일으킨 ‘긍정적 모멘텀’에 대해 홍민석 기획재정부 경제분석과장은 “그린북 3월호는 당시까지 사용할 수 있었던 1월 지표가 모두 전월 대비 상승세를 보인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경기 전반에 대한 풀이가 부담스러웠던 탓에 그때그때 활용 가능한 지표만 설명하는 표현으로 대체했다는 의미다. 정부의 안이한 경제 인식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 KDI의 ‘부진’ 표현 역시 급격한 경기 침체를 나타내는 단어로 쓰인 것은 아니다. 김현욱 KDI 경제전망실장은 “대부분 지표가 마이너스를 가리키는 상황이니만큼 둔화 표현에 변화를 준 것이었다”며 “다만 경기의 급격한 하락이 나타나지 않은 만큼 침체나 하강 대신 강도가 덜한 부진이라고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회복·호황·둔화·침체 같은 표현을 정리하는 대신 뉘앙스만 담는 에두른 표현, 현재 지표 설명에만 그치는 한정적 표현으로 혼란을 자초한 것일까? 여러 사정이 있다. 먼저 정부 처지에선 ‘많은 이가 경기 침체를 확신하는 순간 더 가파르게 경기가 가라앉는’ 경제의 자기실현적 속성을 고려해 단어를 골라내야 하는 고민이 있다. 정부가 이렇다 할 대책 없이 비관적 경제 인식을 먼저 내보이는 경우 민간부문은 투자, 고용, 소비를 줄이며 더욱 움츠러든다.
광고
경기 흐름을 앞으로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신호’로 보기보다 정부 경제정책의 ‘성적표’로 읽는 시각도 거세졌다. 자연스러운 경기 흐름의 한 축인 ‘경기 침체’를 곧장 ‘경제위기’로 받아들이며, 정부 경제정책이 경제위기를 불러왔다는 식의 ‘경제 실정론’이 지난해 이후 부각됐다. 경기 흐름이 예민한 정치적 논란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애초 기획재정부 실무진이 검토하고 발표하는 데 그쳤던 그린북은 지난해 이후 부총리와 차관까지 살펴본 뒤 문구를 정리하는 중요 보고서가 됐다.
다른 나라 정부도 할 수 있는 이런 보편적 고민에 한국 경제의 특수한 상황도 얹힌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저점에서 정점까지의 거리, 경기변동성이 극도로 미세해졌다. 한국은행의 ‘경기변동성 축소에 대한 재평가’ 보고서를 보면, 세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경기변동성은 위기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축소됐다. 호황이 와도 살림이 나아진 건지 모르겠고, 불황에도 폭삭 내려앉는 모습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 모습으로 서서히 잠재성장률이 줄어간다. 이는 선진국 경제가 겪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기에도 정도가 심하다. 한국의 경기변동성은 세계 금융위기 이전 주요 7개국(G7)보다 2배 정도 높았지만, 위기 이후에는 이들 국가 수준을 밑돈다.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와 이를 둘러싼 표현 논란보다 한국 경제의 특수한 모습, 즉 경기변동성 축소를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더 본질적인 경제 체질, 역동성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같은 추세가 지속될 경우 ‘파도치며 그래도 어쨌든 경제는 성장한다’는 믿음이 무너진다. 그럴수록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기업과 가계의 경제활동은 위축된다. 침체를 넘어 경제 회복과 호황을 정부가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그래서 뭐가 나아졌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강해진다.
경기 파도의 밑바닥을 헤매는 이들에게
이런 ‘호황 같지 않은 호황’은 이미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경기가 아래로 향하는 상황은 맞지만 잠재성장률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 아니니 이것만 가지고 경제위기를 이야기하는 건 과도한 것이 사실”이라며 “다만 벌써 수년째 이어지는 미약한 경기변동과 저성장 추세를 반전시키기 위해 좀더 구조적으로 경제 체질을 강화할 수 있는 쪽으로 아직 여력이 풍부한 재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짜 경제위기는 이번 11번째 파도의 밑바닥이 아니라, 잔잔해진 파도 그 자체인 셈이다.
<한겨레21>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한겨레21>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한겨레21>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한겨레21>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아래 '후원 하기' 링크를 누르시면 후원 방법과 절차를 알 수 있습니다.
후원 하기 ▶ http://naver.me/xKGU4rkW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헌재는 윤석열을 파면하라” 탄원 서명…9시간 만에 20만명 동참
“나무 꺾다 라이터로 태우려…” 의성 산불 최초 발화 의심 50대 입건
한덕수 ‘마은혁 임명’ 침묵…민주 “윤 복귀 위한 위헌적 버티기”
전한길, 불교신자 후보에 안수기도…“재보궐서 보수우파 꼭 승리”
‘윤 탄핵’ 촉구 성명 추동한 세 시인…“작가 대신 문장의 힘 봐달라”
윤석열 탄핵심판 4월18일 넘기는 ‘최악 경우의수’ 우려까지
한덕수 권한쟁의심판이, 윤석열 탄핵 선고 압박용이라고?
챗GPT ‘지브리풍’ 이미지 폭발적 인기…“판도라의 상자 열었다”
산 정상에 기름을 통째로…경찰, 화성 태행산 용의자 추적
[속보] 최상목 “10조원 필수 추경 추진…여야 동의해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