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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분배 조중동 프레임 이 기시감 뭐지?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조·중·동의 집요한 공격…

문재인 정부도 노무현 정부처럼 실패하려는가
등록 2018-10-06 17:38 수정 2020-05-03 04:29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다를 수 있을까. 2003년 6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은 지난 7월 인도 국빈 방문 중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났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다를 수 있을까. 2003년 6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은 지난 7월 인도 국빈 방문 중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났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연합뉴스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분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직 회장님 한 분이셨다.” 1990년대 초 어느 큰 신문사 사주의 고희연에서 계열사 사장이 바친 헌사라 한다. 그런 밤의 대통령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미디어가 되는 시대를 맞아 위세가 예전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수십 년 요지부동의 권력이 있다. 바로 재벌체제다. 재벌 대기업의 투자와 수출에 기댄 성장을 숭배하고, 그 ‘낙수효과’를 믿으며,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규제를 확 풀어야 한다는 믿음이 밀고 가는 체제다. 그 뒷면에는 분배는 망국으로 가는 포퓰리즘이라 눈 흘기고, 노동자의 권리는 억압돼야 한다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래 수십 년간 언론, 학계, 정치권 등 요소요소에 깊숙이 스며들어 이제는 공기처럼 되어버린 체제다. 여야 정치권력을 교체하고, 군의 하나회를 숙정하며, 전직 대통령을 잇달아 감옥에 넣은 대통령은 있었으나 재벌체제라는 경제권력을 교체한 대통령은 없었다.

물론 불공정·불평등의 역기능이 커지는 재벌체제를 개혁하겠다고 공언한 정권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늘 익숙한 실패의 길을 갔다. 초기에 개혁에 나서지만 곧 보수 언론을 앞세운 공격이 시작된다. 마침 닥친 경제적 난관은 좋은 빌미가 된다. 위기감은 고조되고, 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정책에 책임의 화살이 돌아간다. 국민은 실망감을 나타내고 국정 지지율이 하락한다. 초조해진 정권은 재벌에 손을 내민다. 개혁을 추진하던 인사들은 짐을 싸고 그 자리는 관료에게 돌아간다. 결국 바뀐 것은 없고 종전의 경제사회 패러다임(체제)은 유지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경제권력은 교체된 적이 없다</font></font>

지난 7월18일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 등 진보 지식인 323명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선언문을 냈다. 현 정부의 사회·경제 개혁 포기를 우려하고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출범 1년 남짓한 시점에서 진보 진영이 집단으로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 옳으냐는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서명에 동참한 것은 ‘기시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 즉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것 같은 예감을 말한다. 이들이 걱정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행로에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겹쳐 보인다는 것이었다.

잠시 15년 전으로 눈을 돌려보자. 노무현 정부도 1990년대 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양극화가 심화하고,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돼 종전 경제 패러다임으로는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특히 노 대통령은 재벌과 정권,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이전 대통령들과 다르게 풀어가려 했다. 당선인으로 노동단체를 방문해서는 “우리 사회는 힘의 균형점이 지나치게 재계에 쏠려 있는데 이는 시정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이 되겠다”거나 “재벌을 개혁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같은 개혁정책을 입안했다.

재계의 위기감은 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중심으로 경제정책 기조를 개혁에서 성장으로 바꾸려 분주히 움직였다. 이들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작업한 ‘국민소득 2만달러로 가는 길’이란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며 국정과제로 채택하도록 로비했다. 언론을 움직여 여론을 조성하려고도 했다. 보고서가 담은 정책 기조는 형평이나 공정이 아니라 개방을 통한 성장이었다.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세율을 내리며, 산업 평화를 이루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정책 기조를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 이유</font></font>

노무현 정부는 버텼다. 몇 달은 개혁 기조를 끌고 가는 듯했다. 그런데 취임 직후 경기가 급작스레 나빠졌다. 그 전 김대중 정권에서 비롯된 ‘카드 사태’가 터진 것이다. 언론의 논조도 ‘개혁’보다는 ‘경제위기’나 ‘성장’에 힘이 실렸다. “아마추어 정권이 경제를 망친다”라는 공격이 먹히며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계속 떨어졌다. 3월에 70%를 넘던 지지율이 5월엔 50%대 중반, 7월에는 40%대로 내려갔다. 이듬해 4월에는 국회의원 총선이 예정됐다. 이대로는 총선에서 지고 정권 2년차에 레임덕(지도력 공백)이 올 것이란 말들이 나왔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재벌에 손을 내밀었다. 6월 초 청와대 앞 토속촌으로 총수들을 초청해 땀을 흘리며 삼계탕을 먹은 것은 상징적이었다. 서민적으로 보였지만 정책 기조는 반대로 가는 전환점이었다. 그 확인은 8월 광복절 대통령 기념사에서 재계가 요구하는 ‘2만달러 국민소득 달성’이 국정 의제로 선언된 것이었다. 개혁정책들은 힘을 잃었고, 개혁을 추진하던 인사들은 쫓겨났다. 노무현 정부는 이후 “왼쪽 깜빡이 켜고 오른쪽으로 갔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 뒤에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아예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를 표방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후보일 때 진보적 의제인 ‘경제민주화’를 치고 나오며 무언가 할 듯이 보였다. 당선인 시절엔 전경련을 방문해서는 “재벌도 좀 변해주길 바란다”며 짐짓 각을 세웠다. 하지만 재계가 경제민주화 의지가 담긴 정부의 상법 개정안에 불편함을 토로하자 큰 고민 없이 후퇴한다. 취임 첫해 7월에 “경제민주화는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끝을 흐리더니, 8월에는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점심을 대접하면서 “(투자해주면) 만사 제쳐놓고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로 돌아와보자. 촛불 민심을 딛고 탄생한 정부는 경제의 패러다임 전환을 공언했다. 정치적·법률적 적폐 청산 못지않게 불평등과 불공정을 재생산하는 경제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겨울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든 국민의 뜻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7월에 내놓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더불어 잘사는 경제’로 표현했다. 이는 “경제의 중심을 국가와 기업에서 국민 개인과 가계로 바꾸고, 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경제”를 말했다.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가 새 패러다임의 축으로 제시됐다. 이는 수요와 공급이 균형 있게 경제를 이끌도록 하며, 혁신이 일어나는 중소기업과 모험기업으로 인재와 자원이 흐르도록 불평등·불공정한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 설명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지난해 말부터 보수 언론의 집중포화가 시작됐다. 발단은 최저임금 인상이었다. 이들은 16.4% 오른 최저임금의 부작용을 집중 부각하며 소득주도성장, 나아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이들은 외부 학자들의 칼럼을 통해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말을 마차 앞에 세우지 않고 마차를 말 앞에 세운 정책” “한 번도 검증된 적 없는 아마추어의 실험” 등의 주장으로 비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좌고우면하는 문재인 정부</font></font>

올해 봄부터 심화한 고용 증가폭 감소와 통계상 논란이 있었던 최저소득 분위 가구의 소득 감소는 “서민을 위한 정책이 정작 서민들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주장의 증거로 활용됐다. 경제 위기감을 고조하는 과정에서 보수 언론은 성장률이나 자영업 폐업률 같은 통계의 자의적 해석이나 조작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올해 2분기 경제성장률을 보도하면서 한국은 0.7% 성장했는데 미국은 4.1% 성장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다른 선진국들은 경기가 좋은데 한국만 어렵다”는 뜻이었지만 이는 심각한 왜곡이었다. 한국은 전기 대비 성장률이고 미국은 연율로 환산한 전년 대비 성장률이었다. 언론이 요구하는 것은 종전 패러다임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형평이나 분배에 신경 쓰기보다는 기업이 주도하는 성장에 방점을 두라는 것이었다. “규제를 확 풀어라” “성장하려면 기업의 기를 살려줘라” 등 익숙한 레토릭(수사)이 신문 사설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공격은 문재인 정부의 미숙함이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최저임금 인상만 해도 임대료 상한제나 프랜차이즈 갑질 방지같이 영세 자영업자의 지급 능력을 끌어올리는 정책을 먼저 마련하고 해야 했는데 덜컥 올려버려 결국 ‘을과 을’의 싸움으로 흘렀다. 최저임금 인상을 빼고는 저소득층 복지와 고용을 위한 재정 활용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증세에도 소극적이었다. 정책의 정체성을 확실히 세우지도 못하고 좌고우면했다. 보유세 찔끔 인상이 대표적인데, 이는 서울 모든 지역의 집값 급등이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정책의 장점을 국민에게 설득하고 여론의 동향을 살피는 데는 서툴렀다. 통계청장 경질이 대표적이다. 비록 바꿔야 할 이유가 있더라도 한창 소득 통계를 둘러싼 논란이 불타오를 때 교체한 것은 패착이었다. 보수 언론은 때를 만난 듯 “정권 입맛에 맞춰 통계 마사지를 하겠다는 거냐”고 공격했다. 정부가 입은 ‘내상’은 컸다.

여론은 악화했다. 정한울 한국리서치 여론분석 전문위원은 9월13일 “체감경기를 조사하면 60~70%의 응답자가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하는데 이는 1년차 정권으로는 이례적인 것”이라며 “보통 체감경기에 대한 응답은 정권에 대한 기대를 반영해 첫해에는 긍정적 응답이 많은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지지층조차 위기감을 가졌다는 의미”라고 했다. 담론에서 밀리고 여론이 안 좋아지면서 정권이 개혁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저임금에 상여금을 포함하고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속도 6개월 유예했다. 이 정도는 정책의 미세 조정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소득주도성장을 입안한 홍장표 전 경제수석이 물러나고 관료 출신으로 교체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판 중인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을 해외 순방 중 만났다. 또 혁신성장은 어디 갔냐는 보수 언론의 담론에 밀렸는지, 규제 혁신을 들고나와 금산분리 완화, 원격의료 허용 등을 밀어붙이고 있다. 진보 진영의 의구심은 한층 높아졌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기고(2018년 7월30일치)에서 “악화한 고용지표와 그것보다 더 빨리 악화하는 여론에 화들짝 놀라서 ‘일자리를 위해서는 지옥까지도 갈 각오’로 허둥대고 있”다고 표현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승부는 경제에서 난다</font></font>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민심은 한층 더 새 정부의 경제정책에 실망감을 나타냈다. 문재인 정부는 익숙한 실패의 길로 가느냐, 지금이라도 기수를 돌려 애초에 가려던 개혁의 길로 가느냐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 청와대에서 일한 박주현 전 참여혁신 수석비서관은 나중에 노 정권의 개혁 실패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2006년 9월24일치). “새로운 경제사회 환경에 맞는 패러다임 구축을 목표로 삼는다면 마지막까지 견디고 버텨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보수 세력은 아주 집요하게 저항하고 공격했다. 진보개혁 세력도 더 집요해져야 한다. 나도 이를 악물고 죽을 각오로 대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뭐 이 자리 탐나서 그런 건가’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집요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혁신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저항이 많은 법이다. 혁신을 하고 싶다면 정확한 비전과 실행의 치밀함이 필요하다. 어느 정권이든 승부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에서 났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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