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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물려주고 아빠가 키웠네

언니 ‘땅콩 회항’에 이은 동생 ‘물벼락’ 갑질로 위기 맞은 대한항공
등록 2018-04-24 14:56 수정 2020-05-03 04:28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둘째딸 조현민 전무의 ‘물벼락’ 갑질 사건은 재벌 3세의 전형적인 ‘오너 리스크’에 해당한다. 이들의 갑질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둘째딸 조현민 전무의 ‘물벼락’ 갑질 사건은 재벌 3세의 전형적인 ‘오너 리스크’에 해당한다. 이들의 갑질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한진그룹 총수 일가 ‘갑질’의 끝은 어디일까.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막내 조현민(35) 전무의 ‘물벼락’ 사건을 계기로 한진 총수 일가의 갑질 내력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큰딸 조현아(44)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의 ‘땅콩 회항’과 장남 조원태(43) 대한항공 사장의 70대 여성 폭행 등 이미 드러난 사건 외에 그동안 쉬쉬하던 갑질 행태가 내부 인사의 증언 등으로 공개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조현민 엄마 이명희도 폭언 </font></font>

조 전무는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벼락을 퍼부은 것 외에 사내 간부급 직원에게 고성을 지르는 음성파일이 공개됐다. 대한항공 쪽은 파일에 등장하는 여성이 조 전무인지 확실치 않다고 했지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직원들은 직장인 익명 게시판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에 조 전무가 맞다는 증언을 올렸다. 당시 조 전무에게 질책을 당했던 이는 핵심 부서의 부장급 직원이었는데, 이후 한직인 인천공항 게이트 근무 부서로 발령난 것으로 전해졌다.

조 회장의 부인이자 삼남매의 어머니인 이명희(70)씨의 ‘폭언’ 의혹은 더 충격적이다. SBS는 4월18일 이씨로 추정되는 여성이 2013년 여름 자택 리모델링 공사 중 작업자들에게 욕설과 폭언을 퍼붓는 내용의 음성파일을 공개했다. 파일에 나오는 여성은 작업자에게 “세트로 다 잘라버려야 해. 아오, 저 거지 같은 놈이, 이 ××야!”라고 고성을 질러댔다.

파일을 제보한 ㄱ씨는 SBS에 “녹취 파일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라고 했다.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ㄱ씨는 “(이씨는) 아침에 오면 오늘 뭘 보자, 뭘 보자, 해서 한참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성질낸다”고 말했다. “(한 인부의) 무릎을 꿇리고 갑자기 따귀를 확 때렸는데 (이 인부가) 고개를 뒤로 해서 피했다. 그랬더니 더 화가 나서 막 소리를 지르며 무릎을 걷어찼다.” 이씨는 또 회사 임원들에게 폭언과 욕설을 하고, 운전기사 얼굴에 침을 뱉거나 폭행을 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한진 총수 일가의 갑질에 수사기관을 비롯한 정부 당국은 강력히 대응하고 있다. 경찰은 조 전무를 폭행 혐의로 처벌하기 위한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4월19일 대한항공 본사에 있는 조 전무의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앞서 4월17일 조 전무를 폭행 혐의 피의자로 입건하고 출국 금지했다.

경찰은 조 전무에게 특수폭행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 전무가 사람을 향해 유리컵을 던진 것으로 확인되면 특수폭행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특수폭행은 반의사불벌죄가 아니라서 피해자의 뜻과 상관없이 처벌할 수 있다. 앞서 광고대행사 직원들은 경찰 조사에서 조 전무의 형사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한 광고업계 관계자는 “광고대행사가 대기업과 거래 끊기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총수 일가의 처벌을 요구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오너 리스크’ 만성화 조짐 </font></font>
조현아 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피해자인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가운데)이 4월1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현아 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피해자인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가운데)이 4월1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진 총수 일가를 겨냥한 곳은 경찰뿐만이 아니다. 국토교통부는 미국 시민권자인 조 전무가 진에어의 등기임원으로 재직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조 전무는 2010년 3월부터 6년 동안 ‘조 에밀리 리’라는 이름으로 진에어의 등기임원을 맡았다. 국내법상 외국인은 항공사 임원을 맡을 수 없다.

관세청은 한진 총수 일가의 관세 포탈 의혹을 조사했다. 조 회장 등은 대한항공 지점을 이용해 고가의 명품을 무관세로 반입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블라인드에는 조 회장의 부인 이씨와 두 딸이 외국에서 구입한 명품을 인천공항 세관 당국의 통관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국내로 밀반입했다고 폭로한 회사 직원의 글이 올라왔다. 외국에서 산 명품을 세관에 신고하지 않을 경우 관세법 위반으로 처벌된다.

이처럼 전례 없이 강한 사정 당국의 압박에 대한항공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조 전무가 선임한 변호인에게 언론 대응을 미루고 회사 차원의 공식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있다. 이씨의 갑질 의혹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문제”라며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다. 총수 일가의 리스크가 회사 차원으로 번지는 것을 잔뜩 경계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한진그룹에 닥친 진짜 위기는 총수 일가의 형사처벌이 아니다. 그룹에 더 치명적인 위기는 총수 일가의 ‘오너 리스크’가 만성화될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진은 2014년 12월 ‘땅콩 회항’ 사건이 터졌을 때 강력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조 회장은 직접 언론에 나서서 “제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2015년 1월 신년사에서는 “덕망 있는 분들을 모셔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소통위원회를 구성하고, 경계 없는 의견 개진을 통해 기업 문화를 쇄신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조 회장이 공언한 소통위원회는 유야무야됐다. 대한항공은 대신 사내 익명 게시판인 ‘소통광장’을 만들었지만, 3년여가 지난 지금 직원들에게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히려 경영에서 손을 뗐던 조현아 사장을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기도 전인 지난 3월 계열사 사장으로 복귀시켰다. 조 회장이 공언한 대책이 결국 “눈 가리고 아웅” 식의 꼼수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이 조 회장에게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총수 일가 갑질의 정점에 조 회장이 있다는 것이다. 한 전직 임원은 “조 회장은 ‘직원들은 팍팍 굴려야 잘 돌아간다’는 전근대적 습성에 젖어 있다. 부인과 두 딸도 조 회장을 따라 직원을 머슴 부리듯 한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금수저 재벌 3세, 리더 부적합”</font></font>

만성화된 오너 리스크는 구성원들의 소신 있는 조언을 막는다. 2016년 9월 한진해운 물류 대란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를 앞두고 정부는 한진해운 쪽에 물류 대란이 발생할 가능성을 물었다. 글로벌 7위 해운사인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2~3개월 동안 수출입 화물 처리에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진 쪽은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막상 법정관리가 시작되자 우려했던 물류 대란이 현실화했다. 세계 각국의 항만에서 입·출항 금지와 하역 거부 등의 조처를 내렸기 때문이다. 한진해운 소속 선박의 절반 가까이가 해상에서 표류하는 바람에 여기에 물건을 실은 국내 수출업체들이 상당한 피해를 봤다.

당시 업계에서는 한진해운의 안이한 대응이 조 회장의 독단 경영 탓이라는 말이 돌았다. 임원들이 조 회장 앞에서 부정적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사태를 키웠다는 것이다.

재벌 3세의 오너 리스크는 한진 총수 일가에 국한된 게 아니다. 범현대가의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과 대림그룹 총수 일가의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 한화그룹 3남 김동선씨 등 최근 일어난 재벌 갑질 논란의 당사자는 대부분 3세들이다.

‘금수저’ 출신 재벌 3세들은 창업주나 2세들에 견줘 특권의식이 강한 경향이 있다. 홍성추 한국재벌정책연구원장은 2016년 출간한 책 에서 “(이들은) 온갖 특혜를 누리기만 했고, 기업 경영과는 거리를 둔 채 유학 등의 시간을 거치며 한국의 사회·경제 전반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 차후에 오너가 될 이들에게 바른말을 해줄 사람도 없다고 봐야 한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재벌 3세들은 조직의 리더로 적합하지 않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16년 5월23일치에 실린 논문 ‘부유하게 자란 리더는 더 자기중심적이 된다’(Growing up wealthy makes leaders more narcissistic)에 따르면, 금수저 출신 리더는 자아도취 성향이 강해서 공감능력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경향을 나타낸다. 이런 특성은 구성원과의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쳐 장기적으로 조직의 성과를 떨어뜨린다. 정안숙 미국 유타대학 아시아캠퍼스 교수(심리학)는 “자기애적 특권의식은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고 공격적이거나 조종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나타낸다.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행동의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특권의식이 강한 리더가)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크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재벌 3세의 경영 성적은 창업주나 2세에 견줘 영 시원찮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등은 각각 아버지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에 견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조현아 방지법’ 시급</font></font>

재벌 3세의 갑질로 생긴 폐해는 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이 망하면 생계의 터전을 잃는 직원들이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이 때문에 재벌 3세의 갑질을 제도적으로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 조현아 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이후 국회에서 이른바 ‘조현아 방지법’이 논의됐다. 이사 등으로 재직 중인 대기업 총수 일가가 기업의 업무와 관련해 금고 이상의 죄를 지었을 경우 직무정지나 면직을 시키고, 일정 기간 경영에 복귀할 수 없게 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여러 정치적 이슈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다. 동생의 ‘물벼락’ 갑질은 제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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