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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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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출산할까

원인도 대책도 잘못 짚은 3차 저출산·고령사회 계획안… 일·가정 양립 정책은 없고 결혼 연령 낮추겠다는 헛발질만
등록 2015-10-27 18:24 수정 2020-05-02 04:28
지난해 12월2일 부르키나파소 수도 와가두구에서 블레즈 콩파오레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스러진 6명의 넋을 기리는 추모집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토마 상카라 전 대통령과 이자크 지다 전 총리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을 펼쳐 보이고 있다. REUTERS

지난해 12월2일 부르키나파소 수도 와가두구에서 블레즈 콩파오레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스러진 6명의 넋을 기리는 추모집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토마 상카라 전 대통령과 이자크 지다 전 총리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을 펼쳐 보이고 있다. REUTERS

10월19일 박근혜 정부는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안을 발표했다. 아이를 적게 낳고 노인이 많아져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 아이를 더 낳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3차 기본계획을 보면 ‘백화점’식 대책이 나열돼 있다. 내년부터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 한도(수도권 기준)를 1억원에서 1억2천만원으로 높인다. 전세임대주택 입주 대상이 되는 신혼부부 소득 기준도 도시근로자 월평균 가구소득의 50%(2014년 2인 가구 189만원) 이하에서 70%(265만원) 이하로 확대한다.

어릴수록 전세임대주택 당첨 가산점도 준다. 임신·출산 관련 의료비 부담도 줄인다. 임신 중 초음파 검사와 난임치료 시술비에 대해서 건강보험을 적용한다. 국공립어린이집을 확충하고 사교육비 부담을 덜기 위해 공교육을 강화하기로 했다. 남성이 육아휴직을 할 때 주는 인센티브는 늘리기로 했다. 심지어 청년 세대 미팅도 정부가 주선한다.

취학연령 낮추는 게 패러다임 전환?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10월21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협의회에서 “(3차 기본계획은) 만혼 추세를 저출산의 핵심 문제로 진단하고 기혼 가구 보육 중심에서 젊은 세대가 결혼과 출산을 주저하게 하는 교육·주거 등 근본 원인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새누리당은 이날 취학연령도 낮추고 초·중·고 교육 기간도 1년 줄이는 방안을 정부에 제시하기도 했다. 젊은 세대를 빨리 교육하고 빨리 결혼시켜 빨리 아이를 낳게 하자는 이른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그러나 200여 쪽에 이르는 계획안에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이 있다. 이아무개(38·남)씨는 “아이를 낳기 어려운 사람들이 정부가 전세대출 조금 늘려주고, 의료비 등 보조금을 더 주는 정도로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이번 대책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계획안이 환영받지 못한 이유는 많다. 먼저 정부가 내놓은 주거, 보육, 일·가정 양립 등에 관한 대책은 ‘장미빛 계획’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주거의 경우 신혼부부의 전세자금 대출 한도를 2천만원 늘리는 데 그쳤다. 최근 전세난에 시달리고 있는 서울·수도권 지역의 경우, 전세보증금이 1년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가까이 오르고 있는 상태다. 빚내서 전세보증금을 올리는 건 한계가 있다. 정부는 월세 부담이 있는 ‘뉴스테이’(민간 임대아파트) 공급을 확대해 신혼부부의 목돈 부담을 줄이겠다고 했다. 원래 뉴스테이는 중산층을 위한 주거 공간이라면서 정부가 내놓은 아파트였지만 신혼부부를 위한 임대아파트로 탈바꿈시켰다. 민간 건설 사업자에게 이익을 보장하는 뉴스테이는 정부가 2017년까지 최소 6만 가구를 짓겠다고 했다. 하지만 신혼부부들이 선호하는 공공건설임대주택의 경우 확대 공급의 방향만 알리고 공급 규모를 밝히지 않았다.

국공립어린이집 늘리자고 해놓고 예산 축소

보육 정책의 경우에는 정부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3차 계획안을 통해 정부는 “국공립어린이집 등 믿을 수 있는 어린이집이 여전히 충분치 못한 상황”이라며 “2025년까지 전체 보육 아동의 과반수가 공공성 높은 보육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국공립어린이집이 부족한 현실을 제대로 진단했다. 그러나 올해 내놓은 보건복지부의 2016년도 예산안을 살펴보면 정부의 진단과 달리 국공립어린이집 확충 예산이 줄어들었다.

참여연대는 “국공립어린이집 비율의 획기적 확충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올해 예산은 지난해 대비 10% 가까이 줄어든 302억원(전체 보육예산 대비 0.6%)이 책정됐다”고 밝혔다. 경제적 부담이 적고 더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국공립어린이집은 대기 아동이 여전히 넘쳐나는 상태다.

일·가정 양립 정책은 정부의 의지가 의심된다. 한국의 연노동시간은 2057시간이다. 세계에서 제일 오랫동안 직장에 붙잡혀 있다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들이 아이를 더 낳는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다. 최장 노동시간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경영계는 주당 노동시간 한도를 주 60시간으로 줄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전에는 고용노동부가 토·일요일 휴일근로를 연장근로로 인정하지 않아 주당 68시간까지 가능했다. 노동계는 주 52시간으로 줄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할 경우 일자리가 더 늘어나는데도 정부는 노동시간을 대폭 줄일 의지가 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말 함께 낸 ‘초저출산·초고령화 사회: 여성의 사회집단별 위험과 대응전략’ 보고서는 “전일제 장시간 근무로 일터에만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노동시장이 변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단순한 경제적 보상은 기꺼이 다른 것을 포기하고 출산을 만들게 하는 유인이 되지 않는다”고 연구 결과를 밝혔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낸 ‘2015 삶의 질’ 보고서는 한국 아빠가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하루 6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OECD 평균은 47분이다.

무엇보다 3차 계획안이 ‘출산 파업’을 막을 수 없는 이유는 정책에 성평등 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는 수십조원을 투자해 양육수당과 같은 경제적 지원, 육아휴직과 시간제 노동 등 다양한 정책을 쏟아부었지만 낮은 출산율(1.21명·2014년 기준)은 다시 오르지 않았다.

왜일까. 여성들에게 출산을 중심으로 한 가족 재생산에 대한 책임과 어머니 역할만 강조하고 양육을 분담해주지 않는다면 여성은 출산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이 만든 ‘초저출산·초고령화 사회’ 보고서는 “저출산 정책은 가족지원 정책이면서 동시에 양성평등 정책이어야 한다는 관점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보고서의 국제 비교 연구를 보면 한국은 출산율이 낮은 국가(1.5명 미만) 내에서도 가정생활 만족도가 가장 낮은 나라였다. 가사와 육아 부담이 여성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4.89점(높을수록 만족도가 높음), 일본은 5.59점이었고, 평균점수는 5.47점이다.

가정생활 만족도가 가장 낮은 나라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저출산이 심화되는 핵심 이유로 늦은 결혼을 들고나왔다. 여성이 35살 이후 결혼하면 평균 자녀 수가 0.84명에 그친다는 통계(25살 미만일 경우 2.03명)를 근거로 냈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다’는 식의 전통적 가족상으로 청년 세대를 내몰고 있는 셈이다. 전통적 가족상은 여성에게만 출산·육아·가사 부담을 지우는데 누가 결혼을 결심할까.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 4시30분에 퇴근해야 하니 인터뷰는 4시15분까지만 하자.”

지난 9월 덴마크를 방문해 만난 한 남성 직장인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어렵게 약속을 잡아 질문 한 보따리를 가져갔는데 그는 대뜸 40분만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아내 대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덴마크에서는 때때로 아이가 아프면 아침에 갑자기 부모가 휴가를 내거나 약속을 취소해도 이해해준다고 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왜 코펜하겐 거리에 오후 5시만 되면 퇴근하는 자전거 행렬이 기다랗게 늘어서는지, 왜 덴마크 출산율이 높은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양성평등과 가정친화적 노동 여건이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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