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성장을 하다보면 필요한 역량이 달라진다. 총싸움을 하고 있는데 칼을 갖고 나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초기 멤버가 얼른 총을 쏘는 법을 배우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지만, 만일 열심히 해도 안 된다면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을 데리고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중략) 가장 이상적인 것은 초기 멤버의 ‘그릇의 크기’가 회사 성장 속도보다 빠르게 성장하거나, 최소한 회사의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수준으로 커지는 것이다. 꼭 그랬으면 좋겠지만, 정말로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다음카카오는 어쩔 수 없다고 본 걸까.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투자사 케이큐브벤처스 임지훈(35·사진) 대표는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걸까. 이 글은 그가 2013년 12월 개인 블로그와 회사 누리집에 ‘회사의 성장과 그릇의 크기’라는 제목으로 남긴 것이다. 스타트업 운영을 조언하는 글이었다. 1년8개월 만에 이 글은 그에 대한 얘기가 됐다.
다음카카오는 8월10일 오전 이사회에서 새 단독 대표이사로 임 대표를 내정했다. 지난해 10월 다음커뮤니케이션즈와 카카오가 합병한 뒤 공동대표 체제를 유지한 최세훈·이석우 대표는 모두 물러나기로 했다. 주식 시가총액 8조원대 거대 정보기술(IT) 업체 다음카카오의 30대 대표 발탁은 다음카카오 임직원들도 깜짝 놀란 파격 인사였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조직 서열을 따지지 않고 전임 대표들보다 10살 이상 어린 외부 인사를 대표로 정한 것은 매우 신선하다. 더구나 동종 업계 임원이나 서비스 운영자도 아니어서 파격적”이라고 말했다.
임 대표는 ‘두뇌 회전과 의사결정이 빠른 진취적인 투자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력과 전해지는 일화가 이를 방증한다. 그는 2003년 카이스트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2년간 컨설팅업체 액센츄어의 IT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2005년 NHN 기획실 전략매니저를 거쳐 2006년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로 일한 뒤, 2007년부터 5년간 소프트뱅크벤처스 수석심사역으로 재직했다.
임 대표는 2010년 카카오톡이 출시된 지 넉 달 만에 김범수 다음카카오 이사회 의장을 임의로 찾아가 투자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같은 해, 그로부터 수년 뒤에야 카카오톡 게임 ‘애니팡’으로 이름을 알린 ‘선데이토즈’에 투자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카카오가 2011년 개발자들의 능력을 높이 사 인수한 위치기반 모바일 전자상거래 업체 ‘로티플’에 대한 투자를 이끈 것도 임 대표였다.
합병 뒤 통합리더십 구축 위한 묘안?반면 한 IT 업체 대표는 “소규모 금액을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일 자체가 빠른 변화 속에서 유독 빠른 투자 결정을 요구하는 일이어서 임 대표에 대한 평가가 그에 맞춰 나오는 면도 있는 것 같다. 대규모 IT 업체를 이끌게 되면 조금 느려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대표는 ‘김범수의 남자’ ‘김범수 키드’로 불린다. 김 의장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임 대표 내정에도 김 의장이 깊게 관여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김 의장은 2011년 카카오의 로티플 인수 과정에서 임 대표를 눈여겨봤다고 한다. 2012년 4월에는 자신이 설립한 케이큐브벤처스 대표 자리를 임 대표에게 제안하기에 이른다. 임 대표는 당시 32살로 벤처캐피털 업체의 최연소 대표가 됐다. 당시에도 파격적인 발탁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임 대표 내정에 대해 “다음카카오 합병 뒤 조직이 잘 융화되지 않고 김 의장의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단순한 파격 인사가 아니라 이전 세대들은 물러나라는 김 의장의 메시지로도 볼 수 있다. 실제 주요 책임자들이 최근 여럿 나갔다”고 말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다음카카오 합병 뒤에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할 만한 인물을 내놓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30대 젊은 외부 인사를 대표로 내세우는 것도 한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대표가 이끌어갈 다음카카오는 현재 수익성 강화와 해외시장 진출에 애를 먹고 있다. 다음카카오가 8월13일 발표한 2015년 2분기 실적에서 매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0.6% 증가한 데 그쳤고, 영업이익은 81.6% 감소한 114억원, 당기순이익은 62% 줄어든 214억원을 올렸다.
최세훈 공동대표는 이날 “(고스톱·포커 등) 웹보드 게임과 같은 새로운 장르를 확대해나가겠다”고 했다. 카카오택시와 같은 온·오프라인 연결(O2O) 사업도 확대할 계획이다.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이렇다 할 계획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임 대표 발탁에 기대할 만한 점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임정욱 센터장은 “다음카카오가 영업이익이 많이 떨어지고 글로벌 진출도 해야 하는 등 여러 과제가 많은데 스타트업 생태계에 밝고 네트워크가 있는 투자자로 활동해온 임 대표를 영입해서 외부의 혁신을 내부로 받아들이려고 할 것 같다. 해외 비즈니스 상황을 잘 꿰고 있고 해외에도 알려진 분이라 글로벌 비즈니스에서도 기대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카카오’의 문제, 해결할 수 있을까임 대표는 평소 ‘창업은 문제 해결 과정’이라는 소신을 강조해왔다. ‘어떻게 창업을 할 것인가’보다는 ‘정말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는가’를 깊게 고민하고 그 문제를 푸는 과정으로서 창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공적인 서비스나 창업은 일상생활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임 대표가 이끄는 다음카카오가 세상에 어떤 또 다른 서비스를 내놓을지 기대할 만한 대목이다.
스타트업 창업 투자를 이끌어온 그가 거대 IT 기업의 수장이 되는 것에 대해 업계에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모바일 인지도와 여러 회사와의 네트워크가 좋기 때문에 벤처나 스타트업과 상생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지만 너무 잘 알아서 역으로 카카오가 주도권을 잡거나 다른 업체들을 이용만 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실제 임 대표는 스타트업도 대기업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이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그는 지난 5월 ‘비즈니스는 전쟁이다’라는 제목의 개인 블로그 글에서 “내가 의미 있는 분야를 잡았으면, 누군가는 당연히 따라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다른 스타트업일 수도 있고 막대한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일 수도 있다”고 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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