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롯데와 한국롯데라는 말이 구분이 잘 안 되고, 교포산업이냐 내국인산업이냐의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1983년 9월호)
최근 느닷없이 나온 ‘형제간 경영권 다툼’은 롯데가 일본 기업이냐 한국 기업이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롯데는 태생적으로 ‘국적’ 논란을 가진 기업이다. 이미 30년 전 기사에서도 “롯데그룹이 한국의 기업으로 뿌리를 내리고 급격히 사세를 확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일반인의 눈에는 이국적인 냄새가 풍긴다”고 썼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골목상권까지 잠식한 롯데마트·롯데슈퍼에서 과자와 반찬을 사는 한국인들이 이를 잊고 있었을 뿐이다.
자본에 국적이 있을까 묻는 것은 해묵은 질문이기도 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만든 자본이면 외국 자본과 달리 한국에 좋은 일만 할까?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연기금인 한국의 ‘국민연금’은 국외에서 환영받는 자본일까? 아니면 경영자가 한국어를 해야 한국 자본일까? 이렇게 한국과 외국을 갈라 자본을 구분짓는 게 의미 있는 일일까? 이런 물음에 대해 누구도 속시원히 답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롯데는 한국 현대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경우이기도 하다. ‘재벌’의 원조인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꽃피운 ‘재벌’로서, 롯데는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일본롯데와 한국롯데라는 두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세계 기업 역사에서 보기 힘든 이런 모습은 재벌이 국적과 정치·사회적 환경을 이용해 성장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롯데 이야기는 일제시대부터 시작한다.
1941년 일제강점 시기, 신격호는 일본으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경상남도 울주군 출신인 신격호는 아버지에게서 ‘중도에 귀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당시로는 거금인 100원을 받았다.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한 신격호는 와세다고등공업학교 응용학과(현 와세다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사업을 시작했다.
태평양전쟁 뒤 항복한 일본에는 승전국가인 미국산 물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군이 건네준 다디단 껌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신격호도 미군들이 껌 씹는 것을 보고 돈벌이가 되겠다고 생각하여 껌 사업에 뛰어들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껌 업체 간 경쟁에서 신격호는 승리한다. 껌 사업의 성공은 초콜릿 등의 성공으로 이어졌고, 롯데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과자 기업으로 자리를 잡는다.
일본에서 성공한 신격호가 한국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뒤인 1967년이다. 그는 한국에 자본금 3천만원을 투자해 롯데제과를 세웠다. 신격호가 한국에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재일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일본에서 활동하는 기업인 ‘시게미쓰’(신격호의 일본 이름), 그는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던 박정희 정권의 입맛에 맞았다.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을 총괄했던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자신이 쓴 책 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했다. 당시 롯데제과에서 만든 껌에서 모래가루와 쇳가루가 검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신격호를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정부는 신격호에게 한국에서 호텔 사업을 하라고 지시한다. 물론 신격호는 한국에서 제철소 등 중화학공업을 하고 싶었다고 나중에 술회하기도 했다.
손 교수는 “내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으로 있던 1973년 10월에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과 함께 김종필 총리에게 불려가 롯데호텔 건설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지시받았다. 김 총리가 강조한 것은 신격호가 일본인으로서 모은 재산을 모국에의 재산 반입 차원에서 다뤄야지 결코 일개 기업을 지원한다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격호는 당시 재일동포 가운데 가장 돈이 많은 사람으로 꼽혔다.
박정희 정부는 신격호의 투자에 파격적인 지원을 한다. 당시 외자도입법은 부동산 취득세와 재산세·소득세·법인세 5년간 면제, 이후 3년간 절반 감면, 관세와 물품세 영구 면제 등의 혜택을 담고 있었다. 호텔 건설에 쓰인 외국 물품과 주방·가전용품 등을 수입할 때 관세도 전혀 물지 않았다. ‘특정지구 개발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도 이즈음 마련돼, 롯데는 부동산 투기 억제세·영업세·등록세도 면제받았다고 한다.
신격호는 박정희 정부와만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닌 듯하다. 롯데가 서울 잠실에 롯데월드를 짓는 개발권을 따낸 것에 대해 손 교수는 “이미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에 의해 관광숙박업과 유통업에 명백한 실적을 쌓고 있다는 강점은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전두환 대통령과 신격호 회장의 친분이었다. 아마 전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기업인 하나를 꼽으라면 신격호가 거명될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다”고 전했다. 롯데는 이명박 대통령 시절엔 공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고층 빌딩인 제2롯데월드 건축 허가를 받기도 했다.
신격호와 정권의 밀접한 관계로 인한 ‘정경유착’은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신격호가 야구단을 산 계기는 일본 전 총리인 기시 노부스케로부터 추천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의 상공대신과 총리를 역임한 거물 정치인이다. 신격호도 기시 노부스케와 친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신격호는 2001년 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원래 보수 본류의 거두인 기시 선생과 친했다. 그러니 그 후배분들과도 잘 안다. 일본 정치인들도 정치자금을 거두지만 개인적 축재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격호의 차남 신동빈 회장의 결혼식에는 기시 노부스케 외에도 후쿠다 야스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막장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말부터다. 큰아들 신동주 부회장이 일본롯데홀딩스 대표에서 해임된 것이다. 언론에는 일본롯데의 부진한 실적 때문으로 알려졌다.
자리에서 물러난 신동주 전 부회장은 한국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신 전 부회장이 내민 카드는 중국에 진출한 롯데의 부진한 실적이었다. 롯데는 신동빈 회장이 진두지휘한 중국 사업에서 2011년부터 1조원 이상 영업 적자를 냈다. 신동빈 회장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격호 회장은 이전 인터뷰에서 “기업인은 회사가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합니다.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면 신중해지고 보수적이 되지요. 나도 그렇게 하다가보니까 빚을 많이 쓰지 않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신격호 회장은 보수적인 경영을 추구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새 입은 1조원의 손해에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신격호 회장과 신동주 전 회장은 7월27일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동빈 회장 등 임원 6명을 일본롯데홀딩스 이사에서 해임했다. 신격호 회장의 동생 등 일부 친족들도 신동주 전 부회장 편을 들었다. 하지만 7월28일 신동빈 회장 쪽은 정식 이사회를 열어 아버지가 내린 해임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신격호 회장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해 경영권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신격호에게는 또 다른 이점도 있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했지만 한국전쟁을 통해 생산 기반을 재건해 선진공업국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다. 반면 한국은 독립에 성공하고도 한국전쟁을 겪으며 경제 수준이 뒤떨어졌다. 앞서간 일본의 경제력과 산업을 지켜본 경험은 재일동포인 신격호의 자산이었다.
한국롯데의 지주회사 격인 호텔롯데는 이번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100% 일본에서 유입된 자본으로 지분이 구성돼 있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끌어오기가 수월했다. 당시 일본 은행의 대출금리는 4~8% 수준이었다. 반면 한국의 시장금리는 18~19% 수준으로 고금리였다.
2004년 롯데 창업을 파헤친 일본의 시사주간지 는 “롯데호텔은 서울과 부산, 롯데월드 건설로 5억달러의 차입이 있지만, 그 반 이상은 UFJ은행(구 산와은행)과 미즈호은행(구 다이이치간교은행)에서 조달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에서 재인용). 값싸게 일본에서 조달한 롯데의 자금력을 다른 한국 기업은 따라갈 수 없었다.
일본과 한국의 경제 발전 ‘시차’도 롯데의 성공에 한몫했다. 롯데제과는 일본롯데에서 이미 소비자에게 검증된 과자와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을 한국에 들여와 팔았다. 1983년 기사는 “롯데의 사업 전개 방식과 경영 전략에는 여러모로 일본 냄새가 풍긴다”고 했다. 제과뿐만 아니라 복사기·팩시밀리·호남석유화학 등은 일본 제품을 들여와 팔거나 일본 기술을 수입했다.
마케팅 등 경영 노하우도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였다. 롯데는 일본에서 미인대회인 ‘미스롯데’ 선발대회를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이들의 인기를 상품의 지명도를 높이는 데 쓰는 방식이었다. 한국에서도 똑같이 ‘미스롯데’를 뽑았다. 야구단도 한-일 양국에 만들었다. 한 기업이 두 나라에서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은 진기한 일이다. 일본롯데는 ‘롯데 마린스’를, 한국롯데는 ‘롯데 자이언츠’를 운영하고 있다. ‘롯데 마린스’는 백인천 등 재일동포 야구선수가 활약하는 기반이 됐고, 이승엽 등 한국 선수들이 일본 리그에 진출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 한-일 양국에서 시차를 활용한 롯데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재벌의 길로 간 롯데그룹이 남긴 그림자그러나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 한국에 남긴 건 깊은 그림자이기도 하다. 앞선 경영과 투자는 공정한 경쟁을 위한 규제보다 빠르기도 했다. 롯데는 주력 사업군인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다점포 전략을 썼다. 중소 도시와 골목으로 들어간 점포들은 골목상권을 지키던 영세사업자들을 몰락시켰다. 또 일본에선 태평양전쟁 뒤 미군정이 ‘재벌’을 없앴지만, 롯데는 재벌의 길로 갔다. 신격호·신동주·신동빈 일가가 지배하는 롯데 계열사는 한-일 양국에 117개에 이른다. 신격호 회장은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정경유착’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 결과 한국롯데는 일본롯데를 넘어섰다. 한국롯데의 매출액은 83조원(2013년 기준)으로 일본롯데의 매출액(5조9천억원)의 14배에 이른다. 비약적인 성장으로 얻은 두 롯데 간 불균형은 한-일 양국으로 경영권을 나눴던 형제의 ‘롯데제국’에 불화를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참고 문헌: 1983년 9월호 ‘껌으로 쌓아올린 황금탑’, 2001년 1월호 ‘신격호 특별 인터뷰’, 2004년 9월19일치 ‘한일 롯데 창업의 비밀’, 2015년 8월6일치 ‘일본에서 출발한 롯데, 어떻게 한국에서 재벌됐나’, 롯데쇼핑 30년사. 정순태.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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