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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승리? 더 큰 파도 닥칠지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안 겨우 통과, 영광보다는 생채기가 더 컸던 갈등 엘리엇 쪽 불공정한 합병 비율 등 따지기 위해 ISD 등 다른 방법 모색할지도
등록 2015-07-24 17:33 수정 2020-05-03 04:28
지난 7월17일 아침 삼성물산 주주들이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이 상정된 주주총회에 입장하기 위해 서울 양재동 aT센터 5층 주주총회장 앞에 줄을 서 있다.한겨레 김성광 기자

지난 7월17일 아침 삼성물산 주주들이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이 상정된 주주총회에 입장하기 위해 서울 양재동 aT센터 5층 주주총회장 앞에 줄을 서 있다.한겨레 김성광 기자

삼성이 결국 승리했다.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도 ‘삼성공화국’에서는 힘 빠진 독수리(vulture)에 지나지 않았다. 삼성물산이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가 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그룹 지배구조 정점으로 세우기 위한 승계 작업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삼성물산은 지난 7월17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임시 주주총회에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들고 있는 엘리엇과 일부 소액주주들이 “합병 비율이 불공정하다”고 반기를 들었지만, 삼성을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날 의결권을 행사한 주식은 1억3235만5800주로, 전체 주식 총수의 84.73%에 달했다. 평소 65% 안팎이던 참석률을 훌쩍 웃돌았다. 표 대결은 치열했다. 찬성률은 표를 던진 주식의 69.53%. 합병안이 통과되려면 만족시켜야 하는 찬성률 66.67%(주총 참석 주식의 3분의 2)를 겨우 2.86%포인트 넘겼다. 삼성이 주총을 앞두고 언론과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찬성’ 호소 광고로 도배하고, 임직원을 총동원해 주주들에게 일대일 읍소 작전을 펴지 않았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셈이다. 전체 주식을 기준으로 한 합병 찬성률은 58.91%다.

삼성물산 지분 분포.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6월11일 기준)

삼성물산 지분 분포.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6월11일 기준)

읍소 작전이 없었더라면 이겼을까?

표심은 외국인 투자자와 소액주주에서 갈렸다. 삼성이 확보한 고정적인 우호 지분은 이건희 회장 등 특수관계인이 갖고 있는 13.82%, ‘백기사’인 KCC에 넘긴 5.96% 등이다. 여기에 국민연금(11.21%), 국내 기관투자가(11.05%) 등도 ‘찬성’표를 던져줬다. 삼성은 외국인과 소액주주한테서도 17% 안팎의 표를 확보했다. 싱가포르투자청, 사우디아라비아통화청 등 아시아 국부펀드들은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엘리엇(7.12%)을 중심으로 한 ‘합병 반대’는 출석 주식의 30.47%였다. 총 주식 수 대비 25.82%다. 처음부터 ‘반대’ 의견을 표명한 메이슨캐피털(2.18%) 이외에 다른 외국인 투자자와 소액주주들의 표를 16%가량 끌어모은 셈이다.

이들이 반발한 가장 큰 이유는 합병 비율 때문이다. 삼성물산은 지난 5월26일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발표하면서, 삼성물산 주식 1주를 제일모직 주식 0.35주로 바꿔주겠다고 발표했다. 삼성물산 주주 입장에선 손해 보는 장사다. 반면 제일모직 지분 23.2%를 갖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서는 남는 장사다. 이 부회장은 그룹의 중추인 삼성전자 지분을 0.6%밖에 갖고 있지 않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1%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하면 골치 아픈 문제가 여러모로 해결된다. 우선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SDI→삼성물산→삼성전자’로 이어지던 복잡한 순환출자의 고리가 끊긴다.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그룹 지배구조가 단순해진다. 또 이 부회장이 금융계열사인 삼성생명을 거치지 않고서도 직접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삼성 쪽은 한사코 합병 이유를 달리 설명했다. “삼성물산의 건설과 상사 부문 모두 성장성과 수익성이 정체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일모직의 패션·식음료·바이오산업과 결합해 2020년까지 매출 60조원의 삼성그룹 중추회사가 되겠다. 두 회사의 합병으로 5년 내 약 6조원의 시너지가 예상된다.”(주주총회 의장인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 부문 대표이사) 경영진 스스로 우리 회사에는 미래가 없으니 다른 회사에 손 벌리도록 도와달라고 비는 꼴이다.

삼성물산 주주, 제일모집 합병 찬반 비율

삼성물산 주주, 제일모집 합병 찬반 비율

정도껏 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 갈등

주주들은 불공정한 합병 비율과 삼성물산 경영진의 무책임함을 질타했다. “합병 비율이 0.5나 0.75 정도만 됐더라도 이렇게 말썽이 되었겠느냐? 삼성물산이 스스로 합병을 철회하고 다시 비율을 조정해서 합병을 추진할 의사는 없나?”(주주 박아무개씨), “결국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그룹 황태자로 경영권을 인수하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는 합병이다. 합병해서 회사가 잘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경영권 승계를 위해) 소액주주 재산권을 왜 침해하냐? 간단하다. 이재용 후계 체제를 연기하면 된다. 그리고 합병 비율을 다시 정해서 합병하면 된다.”(주주 양아무개씨)

삼성 쪽은 자본시장법 시행령에서 정한 평균종가 등에 따라 공정하게 정한 합병 비율이라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합병을 발표할 당시 두 회사의 주가 비율이 1:0.35(제일모직:삼성물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합병을 앞두고 삼성물산의 주가 움직임이나 실적은 마치 짜맞춘 듯이 움직였다. 삼성물산 주가는 합병 비율을 산정하는 5월25일 이전 한 달 동안 바닥권이었다. 1분기 실적도 증권가 평균 예상치를 크게 밑돌 정도로 좋지 않았다. 삼성물산의 자산가치는 제일모직의 3배에 이른다.

되레 이것이 헤지펀드인 엘리엇이 파고드는 약한 고리가 됐다. 주가가 떨어졌을 때 엘리엇은 대규모로 주식을 매집했다. 삼성물산은 2004년에도 헤지펀드인 헤르메스인베스트먼트가 주식 5%를 매집한 뒤 경영에 간섭하는 일을 겪은 바 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 등 총수 일가는 삼성물산 지분을 1.69%에서 11년 새 1.41%로 낮췄다. 삼성 계열사를 포함한 특수관계인 지분도 1%포인트만 늘어났을 뿐이다.

“한국이 외국 투기자본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경영권 방어 장치가 취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기업들의 부실한 지배구조가 근본 이유다. 외국인 기관투자자들이 아시아 국가에 투자할 때 중요한 지침서에 나타난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순위는 아시아 11개 나라 가운데 8위에 그친다.”(윤승영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위원, 7월17일치 기고글)

엘리엇이 6월 초에 지분 매입을 공시한 다음 합병에 반대하기 시작하자, 삼성도 전방위적인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엘리엇은 법원에 삼성물산을 상대로 주총 결의 금지 가처분 신청을, 삼성물산 ‘백기사’로 주식 5.96%를 매입한 KCC를 상대로도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삼성 쪽은 엘리엇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외국 투기자본의 국내 기업 공격’이라거나 ‘엘리엇은 탐욕스러운 유대인 펀드’라는 식의 언론 기사와 광고가 쏟아져나왔다.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건드리는 작전이었다. 주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다가는 ‘매국노’ 취급당할 분위기가 연출됐다. 삼성물산 직원들은 개인투자자들의 집과 회사를 찾아다녔다.

삼성물산 소액주주연대의 강동오씨는 “직원들이 수차례 소액주주의 직장에 찾아가고, 수박과 화장품을 선물하면서 찬성을 호소했다. 소액주주들이 재산상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불안해서 (반대표) 위임을 철회한 일도 있다. 세계 초일류 기업이 이렇게 부정선거 해서 이기면 뭐하나? 자유당 시절 선거판보다 더하다.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를 적으로 돌리는 경영진이 말하는 미래 가치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삼성-엘리엇 대결 일지

삼성-엘리엇 대결 일지

“자유당 시절 선거판보다 더하다”

이런 가운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삼성 대 엘리엇’ ‘국내 기업 대 해외 투기자본’이라는 앙상한 대결 구도만 남았을 뿐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삼성이 ‘먹튀자본론’을 앞세운 애국심 마케팅으로 주총에서 승리했지만 이것은 게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엘리엇이 이대로 끝내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엘리엇은 이날 주주총회가 끝난 뒤 “수많은 독립주주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합병안이 승인된 것으로 보여져 실망스럽다”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했다. 엘리엇 쪽 법률대리인인 최영익 변호사는 주총에서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으로 이뤄지는 지배구조 개편은 지지한다”면서도 “일반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지배주주에게 우선적인 혜택을 주는 합병안은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엘리엇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밝혔다. 엘리엇이 활용할 카드는 몇 가지로 예상된다. 먼저 합병안이 통과되는 주주총회 자체를 법적으로 문제 삼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날 주총장에서 엘리엇 대리인은 이건희 회장의 의결권 위임을 문제 삼았다. 의식이 없는 이 회장이 언제 위임장을 제출했는지,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따져물은 것이다. 삼성물산 쪽은 “이건희 회장은 과거부터 의결권 행사를 포괄적으로 위임해놨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엘리엇 쪽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다음 단계로) 합병 무효 청구 소송을 내는 걸 검토해볼 수 있다. 위임장 기재 사항에서 문제가 발견될 수도 있고, 삼성물산이 직원을 보내서 주주를 설득하고 허위 사실을 설명한 것에 대해 문제제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법원이 가처분 1·2심 결정에서 “합병 자체가 주주 일반의 이익에 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합병이 오로지 제일모직 또는 삼성그룹 총수 일가만의 이익만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합병 방식, 가격 선정에서도 합리성을 결여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바 있어, 엘리엇이 굳이 국내에서 다시 소송을 진행할지는 미지수다.

통합 삼성물산에서 지분이 2%대로 줄어들긴 하지만, 엘리엇이 여전히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도 있다.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하거나, 이번에 현물 배당 등을 제안했던 것처럼 새로운 주주 제안을 내놓는 게 가능하다.

엘리엇이 한국 정부나 국민연금을 상대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할 여지도 있다. 엘리엇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 투자책임자인 제임스 스미스 대표는 “ISD 제기론은 음모론보다 더 심한 내용”(7월11일 인터뷰)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어디까지나 합병안이 통과되기 이전의 입장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서스틴베스트 등 의결권자문기관들의 ‘합병 반대’ 권고에도 불구하고 ‘찬성’을 결정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날 논평을 내어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고 투자위원회 단독으로 합병안 찬성을 결정했다. 의결 결정 과정과 내용의 문제점으로 인해 엘리엇에 ISD 소송 빌미를 제공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투자자-국가 간 소송 제기의 여지도 있어

삼성이 극적인 화해안을 내놓을 가능성은 없을까? 삼성은 엘리엇과 소액주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6월30일 주주 친화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합병 이후 제일모직의 배당성향을 30% 수준으로 높이고, 거버넌스위원회 신설 등 주주 친화 정책을 도입하겠다는 내용이다. 회사 주요 사항을 사전 심의하는 거버넌스위원회는 회사 외부 전문가 3명, 사외이사 3명 등 총 6명으로 구성된다.

김상조 소장은 “핵심은 거버넌스위원회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인데, 아마도 국민연금 추천 외부위원 1명을 두는 식으로 구색 맞추기에 그칠 것이다. 주주들을 대변하는 독립적인 목소리가 담긴다는 보장이 없다. 주총 이후 삼성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네덜란드연기금자산운용사(APG) 등이 요구한 지배구조 개선안에 대한 답을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치훈 삼성물산 대표이사는 주총 직후 “앞으로 합병 법인 출범까지 많은 어려움이 남아 있다. 합병에 반대한 주주들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넓혀가겠다”고 밝혔다.

삼성은 엘리엇을 이겼다. 하지만 승리를 얻기 위해 잃은 게 너무 많다. 엘리엇뿐만 아니라 국내외 투자자들 가운데 일부가 삼성에 등을 돌렸고, 초일류 삼성의 이미지에는 생채기가 났다. 상처뿐인 영광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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