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가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화두였던 경제민주화의 뼈대는 그동안 소상공인과 하도급업자 등 이른바 ‘갑’의 횡포에 무력한 ‘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을을 보호하기 위해 ‘프랜차이즈 점포 간 독점적 거리 유지’ ‘중소기업 보호 업종에 대기업 진출 금지’ ‘시장 상인 보호를 위한 대형마트 주말 휴점’ 등의 정책이 추진됐다. 실제 이 정책들은 이익만을 좇는 대기업의 무분별한 탐욕을 막는 데 일조했다. ‘갑’의 횡포에 저항해 펼친 소비자 불매운동의 파괴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는 소비자의 이익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에도 시달렸다. ‘함께 나누자’는 의미는 좋아도, 소비자들은 ‘불편함이 없게 한다’는 대기업의 서비스에 이미 길들여진 게 엄연한 현실이다. 경제민주화 이슈가 ‘갑’이 국내시장에 구축한 독점적 시장을 깨지 못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한계도 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 1월26일 ‘경쟁촉진 3법’을 꺼내들었다. 경쟁촉진 3법은 휴대전화, 자동차 수리, 맥주에 관한 법률이다. 전병헌 의원은 통신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 전기통신사업자법 개정안을, 민병두 의원은 자동차 수리비를 절감하기 위해 디자인보호법 개정안을, 홍종학 의원은 소규모 맥주시장을 활성화하는 주세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경쟁촉진 3법은 ‘소비자 이익증진 3법’의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공급자’(노동자)를 중시하는 진보에서, 소비자를 중시하는 진보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민병두 의원실의 최병천 보좌관은 설명했다. “공급자도 중요하지만 소비자도 중요하다. 이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양자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그동안 ‘을’에게 안정적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보호막을 줬다면,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갑’이 구축한 한국의 시장 질서를 깨고 ‘을’이 늘어나는 방법을 지원해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 법들은 대기업이 독점적으로 차지한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국내 휴대전화 서비스 매출은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3곳이 나눠먹는 시장이다. 10여 년간 통신시장 과점 체제가 유지되는 사이, 가구당 평균 통신비 지출액은 2003년 12만5530원에서 2013년 15만2792원으로 계속 상승했다. 통신비 인하를 위해 만든 ‘단말기 유통법’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녹색소비자연대의 ‘단말기 유통법 시행 후 이동통신 소비자 인식조사’에서 조사 대상자(1천 명) 가운데 81.9%는 ‘현재 이동통신 시장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전병헌 의원은 ‘요금인가제’ 폐지와 함께 이동통신 사업자가 휴대전화를 판매할 수 없도록 하는 ‘단말기 자급제’ 도입을 통해 3사의 과점체제를 깨자고 주장한다. 선두주자인 SK텔레콤의 통신요금을 정부가 인가하는 ‘요금인가제’가 LG유플러스 등 후발 사업자의 경쟁력은 키웠지만 정작 소비자의 비용 감소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호갱’ 유발 순정부품·맥주는 그만자동차 수리 부품시장은 민병두 의원이 디자인보호법 개정안을 가지고 독점 구조에 다가갔다. 값싸게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게 하는 대체부품제 활용 법안이 지난해 통과됐지만, 디자인법이 따라주지 못해 파급효과가 적다는 판단에서다. 대체부품이 활성화되지 못한 국내 자동차 보수용 부품시장은 경쟁이 적어 순정부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 또 순정부품 시장은 국내 자동차 시장점유율의 70%를 장악한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 현대모비스가 차지하는 몫이 크다. 완성차업체가 제조부터 수리까지 독점하는 시장이다.
민병두 의원은 “디자인권을 가지고 있는 자동차업체가 권리를 주장하면 다른 부품업체가 대체부품을 생산할 수 없다. 디자인권을 제한해 부품업체의 경쟁을 활성화하자는 것”이라고 법안의 취지를 설명했다. 대체부품 사용이 활성화된 유럽의 경우, 영국과 이탈리아 등 11개 나라가 수리를 목적으로 하는 자동차 외장부품에 대한 디자인권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맥주도 새정치연합이 주목한 소비재다. 국내 맥주시장은 오비와 하이트진로 두 곳의 시장점유율이 95.5%(2013년 기준)에 달하는 과점 시장이다. 국산 맥주는 맛이 없다는 불평의 상당 부분도 경쟁이 약한 과점체제에서 나왔다는 게 소비자들의 생각이다.
홍종학 의원은 주세법을 바꿔 맛있는 맥주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맥주의 문제는 종가세 체계에 있다. 정부 관료들은 같은 세율이니 대기업을 지원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규모 설비에서 단일한 맥주를 만들어) 생산단가가 낮은 대기업은 낮은 세금을 내고, (소규모 생산으로) 단가가 높은 중소기업은 높은 세금을 낸다.” 종가세를 종량세로 바꿔 소규모 맥주 생산자가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다양한 맥주를 시장에 내놓게 지원하자는 취지다.
이들 법안은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봉의 서울대 경쟁법센터장은 “경제민주화가 규제만 강화하고 공정성을 강조해서 경쟁을 왜곡한다는 오해가 있는데,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는 게 경제민주화의 첫 단추다”라며 법안을 평가했다. 이 교수는 “한국 경제가 소수 재벌·대기업 중심의 성장전략을 고수해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행이 여전하고, 자영업자나 청년층·노년층의 생존이 벼랑 끝에 몰리는 한계상황이다. 경쟁 촉진은 대기업에 종속된 중소기업·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해 경쟁 기반을 확충하는 등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임영재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경쟁촉진 3법이 국내 대기업이 편하게 ‘지대’(공급이 상대적으로 고정된 생산요소에 대해 지불하는 비용)를 받아먹는 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고 평했다. “기존 사업자의 지대를 보호해주는 법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제와 정치가 떨어져 있지 않다. 소수 사업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쉽게 단결하고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반면 이에 저항하는 대다수 국민은 개개인이 치러야 할 시간과 노력이 커 포기한다.”
즉 독과점 시장은 기업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정치인과 거래를 통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데, 경쟁촉진 3법은 정치권 스스로가 이런 구조를 깨는 각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임영재 연구위원은 “맥주 등으로 시작해 큰 흐름으로 확대되면 실질적인 경제민주화에 굉장한 기여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날 열린 ‘경쟁촉진 3법’ 토론회장에는 문희상 새정치연합 비대위원장뿐만 아니라 새정치연합 대표 선거에 출마한 문재인 의원과 이인영 의원 등도 찾았다. 이인영 의원은 “시장과 경쟁의 영역을 보수의 영역으로 남겨놓지 말자. 지대 추구형의 경쟁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의원은 “우리 당의 위기는 국민의 삶과 동떨어진 것, 국민의 삶을 해결해주지 못한 것, 나아가서 국민의 삶을 해결할 수 있는 정당이라는 믿음을 주지 못한 게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시즌2로 가는 문제의식이 장착됐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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