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초대형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과 크림반도 합병으로 국제 지정학적 구도를 뒤흔들려던 러시아는 서방의 강력한 경제제재에 직면해, 이제는 도리어 국가 부도를 걱정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미 일각에서는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외채 지급유예) 사태가 재연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나아가 그 영향은 국제적 차원에서 위험회피 심리를 자극해, 광범위한 신흥시장 불안 국면으로 번지고 있다.
최근의 러시아 사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우선 러시아의 영토적 야욕에 맞서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이 강력한 경제·금융 제재에 나서면서 러시아 경제가 타격을 입은 것이다. 사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는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주로 정치적 차원의 인적 제재에 그쳤다. 하지만 지난 7월 말레이시아 항공기 격추 사건을 계기로 광범위한 경제·금융 제재로 확대되고 있다. 그 결과 러시아의 대서방 수출은 물론 외자 조달이 차질을 빚는 가운데 외채 상환 압력이 본격화되면서 러시아로부터 자본 이탈이 확산된 것이다.
유가 급락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동안 러시아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가 원유나 가스 등 에너지 부문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이었다. 그런데 최근 국제유가가 50% 가까이 폭락하면서 러시아 경제가 큰 충격을 받고 있다. 러시아에서 석유 관련 제품의 순수출은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한다. 정부 세수에서 원유 관련 세수가 차지하는 비중도 50%에 이른다. 이미 최근의 유가 급락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상수지는 10%, 세수는 20%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경제는 지금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져들고 있다.
서방 제재와 유가 급락의 이중고문제는 그 해결 방안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공화당 의회가 주도하는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시사하고 있고, 푸틴 대통령 역시 서방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의향이다. 미국의 전통적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도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이 지체되는 가운데, 국제유가도 아직 저점을 확인했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유가야말로 지금 서방과 중동의 각종 정치·경제적 이해가 충돌하면서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아직도 러시아 위기는 갈 길이 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러시아의 내부 체력이 많이 개선됐다는 점이다. 1998년만 해도 러시아는 서방 채권단(파리클럽)의 부채 조정 합의에도 불구하고 옛 소련에서 물려받은 막대한 부채로 인해 공공부문의 외채 상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국가 부도에 직면했다. 하지만 지금은 총외채 규모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공공외채는 줄어들었다. 또 전반적인 외환건전성도 좋아졌다. 최근 루블화 안정을 위한 정부 개입으로 급감하긴 했지만, 아직도 4천억달러가 넘는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총외채 대비 외환보유액 비중은 1998년 말 6.5%에 그쳤으나, 지금은 61.7%에 이른다.
게다가 러시아 정부도 과거와 달리 비교적 세련된 정책 대응을 보이고 있다. 물론 위기 초에는 루블화 폭락 등 금융불안을 주로 서방의 음모에 기반한 투기 공격으로 치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당초 2015년으로 예정되었던 자유변동환율제 이행을 조기(11월10일)에 시행해 루블화 절하 압력을 흡수하는 한편, 공세적인 금리 인상과 유동성 지원으로 시장 신뢰 확보와 금융 안정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 위기가 이내 수습되기는 힘들더라도 마냥 확대 일로에 처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러시아 위기가 대내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대외적인 변수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그 반향 역시 직접적이기보다는 다양한 간접 경로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크게 두 가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지금은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출구전략과 주요국의 통화정책 차별화로 인해 국제 자금 흐름의 변동성 압력이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자칫 러시아 위기가 국제적 차원에서 새로운 위기의 기폭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부각된다.
러시아발 위기, 확대 일로로 보기 어려워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의 통화부양책과 맞물려 국제 자금 흐름도 기존 선진국 위주에서 점차 신흥국 중심으로 재편돼왔다. 선진국에서 풀린 자금이 자체적으로 소화할 기회를 찾지 못한 채 신흥시장으로 흘러든 것이다. 그 결과 국제적으로 부채가 오히려 늘고 있다. 금융위기 직후만 해도 이른바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이 주요 쟁점이었다. 실제로 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금융권 부채나 가계 부채는 상당히 축소되었다. 하지만 정작 공공부문 부채는 크게 늘었고, 나아가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기업 부채도 급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신흥시장 기업 부채가 글로벌 부채위기의 새로운 원천으로 부각되고 있다. 국제적 불확실성의 최대 온상으로 거론되는 중국의 그림자금융이 단적인 예다. 러시아 역시 공공외채보다 기업·금융 부문의 외채 증가가 문제다. 브라질과 인도 등도 마찬가지다. 결국 러시아 위기는 새로운 부채위기의 전초전일지 모른다. 1998년 러시아 위기가 국제 금융불안으로 확대된 것은 러시아 관련 투자에 올인했던 대형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의 파산 때문이었다. 향후에도 유사한 금융사고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또 하나의 경로는 국제적 경제역학의 문제다. 사실 동유럽을 중심으로 인근의 지정학적 구도를 혁파하려는 러시아의 구상은 나름대로 세계경제의 질서 재편과 궤를 같이해왔다.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이 주요 7개국(G7) 등 전통적 서방 위주에서 점차 신흥경제 위주로 옮겨간 것이다. 러시아를 비롯해 중국, 브라질, 인도 등 이른바 ‘브릭스’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파워로 각광받아왔다. 이들은 단순히 경제역학의 변화에만 그치지 않고 지역 내 세력 균형의 재조정을 기반으로 국제 지정학적 구도마저 새롭게 짜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투기가 키우는 질 나쁜 부채하지만 기대와 달리, 사태의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진이 선진국에 국한되지 않고 신흥국에까지 번지고 있는 탓이다. 그동안 중국과 러시아 등 신흥국들은 정부의 능동적인 경제 개입, 즉 ‘국가자본주의’적 실험을 기반으로 금융위기 충격에 비교적 의연한 태도를 보여왔다. 하지만 그 약발도 점차 소진되고 있다. 이른바 ‘성장의 한계’니, ‘중진국 함정’이니 하는 진단도 그 때문이다. 특히 신흥국 부채 증가가, 금융위기 직전의 선진국처럼, 생산성 증대로 이어지기보다 비생산적 자원에 대한 투기로 낭비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 위기를 계기로 재조명되는 신흥시장의 불안은 세계경제 역학의 또 다른 선회를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적처럼 전통적 선진국들이 여전히 “불균등하고 미온적인 회복”에 허덕이면서 ‘새로운 정상’(New Normal)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듯이, 신흥국들도 아직은 세계경제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러시아로 집중된 태풍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좌우의 날갯짓이 내포하는 함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경제연구실장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전광훈 “탄핵 반대 집회에 사람 데려오면 1인당 5만원 주겠다”
공수처 차량 파손하고 ‘난동’…윤석열 지지자들 ‘무법천지’ [영상]
윤석열,구치소 복귀…변호인단 “좋은 결과 기대”
윤석열 구속되면 수용복 입고 ‘머그샷’
공수처 직원 위협하고, 차량 타이어에 구멍…“강력 처벌 요청”
윤석열 지지자 17명 현장 체포…서부지법 담 넘어 난입
윤석열, 구속영장 심사서 40분 발언…3시간 공방, 휴정 뒤 재개
경호처 ‘윤석열, 하늘이 보낸 대통령’ 원곡자 “정말 당혹”
“우리 엄마 해줘서 고마워, 매일 올게”…눈물의 제주항공 추모식
“사필귀정, 윤석열 구속 의심치 않아”…광화문에 응원봉 15만개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