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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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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이 선택한 ‘각자도생’의 길

세계경제 둔화 우려 속 기준금리 인하 통해 소비를 부양하려는 한은의 판단…

경제의 구조적 불안 요소 악화시킬 수 있지만 경기침체에까지 이를 가능성을 보고만 있어야 할까?
등록 2014-10-22 14:40 수정 2020-05-03 04:27
지난 10월15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 본점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날 이 총재는 “최근 금융·경제 상황과 지표 수준을 검토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10월15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 본점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날 이 총재는 “최근 금융·경제 상황과 지표 수준을 검토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은행은 지난 10월15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2.25%에서 2%로 인하했다. 지난 8월에 이어 두 달 만에 다시 금리를 내린 것이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까지 끌어내린 것을 두고, 취약한 경제성장의 모멘텀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카드였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가계부채 폭탄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애초 금리 인하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했던 한은이 전격적인 금리 인하에 나서자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당한 채 정부 정책에 휘둘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국내 대표적인 이코노미스트로 꼽히는 오석태 SG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가 에 다소 논쟁적인 성격의 글을 보내왔다. 필자가 원고에 붙인 제목은 ‘한국은행을 위한 변명’이었다. 반론과 논쟁의 문호는 언제나 열려 있다. _편집자


한국은행은 잘못한 것이 없다. 지난 7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취임하고,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정책금리가 인하되면서 한국은행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정부가 한국은행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쳐서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되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며, 가계부채를 늘리고 부동산 거품을 키워서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불안 요소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한국은행은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독립성은 더 이상 중앙은행 최고의 덕목이 아니다. 이제 각국 중앙은행의 성과는 정부와의 공조와 시장과의 소통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변화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두드러졌다. ‘대불황’(Great Recession)으로 일컫는 세계경제의 급격한 위축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중앙은행은 서로 협력하면서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시행했고, 이러한 부양 기조는 선진국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있을 통화 긴축, 즉 ‘출구전략’에서도 중앙은행이 정부와의 협조 없이 단독으로 시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소비가 문제다

중앙은행의 경기부양책은 금융시장의 강세장 유도를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금융시장의 강세가 경제주체의 심리 개선을 통해 경제성장률을 높일 수 있어서다. 이 과정에서 ‘소통’이라는 이름 아래 금융시장의 요구를 적극 반영해 향후 정책 방향을 미리 제시하는 일이 많아졌다. 정책금리 변화 시점을 예고했던 ‘선제적 안내’(Forward Guidance)가 좋은 예다. 유럽중앙은행(ECB)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최근 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것도 시장이 바라는 발언을 때맞춰 해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의 이번 금리 인하는 정부와의 공조, 시장과의 소통이라는 중앙은행의 새로운 덕목으로 볼 때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정부와 시장으로부터 독립적인 결정이 아니었다는 의심만 가지고 비판할 수는 없다. 현재의 국내외 경제 상황을 감안할 때 최선의 결정이었느냐를 평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올해의 세계경제 상황이 각국 정책 당국자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각자도생’이다. 세계경제는 지금 미국 혼자 이끌어가는 모습이다. 통화 긴축을 염두에 둔 나라도 미국밖에 없다. 유럽과 일본은 큰 틀에서 볼 때 아직 지난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로 상징되는 신흥시장국의 경제 역시 금융위기 직후 한때 반짝했지만 슬슬 빛을 잃는 중이다. 특히 중국의 고성장 기조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이 한국 경제엔 가장 큰 악재다. 지난봄부터 국제 금융시장은 유럽 경제의 악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미국의 경기회복을 의심하는 시각마저 나타나는 상황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어느 나라도 수출에만 의존해 경기 회복세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요할 경우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통해 내수를 활성화해야 한다.

유럽 경제 전망의 악화는 한국에 큰 타격이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국으로의 수출이 부진한 가운데 한국의 수출을 떠받치는 양대 시장이 바로 미국과 유럽이기 때문이다. 유럽 경제와 직접 관련이 적은 선박 수출을 제외할 때, 올해 상반기 한국의 대유럽 수출 증가율은 전년 대비 14%에 이르렀다. 만일 유럽 경제가 다시 불황 국면에 접어든다면 내년 한국의 총수출 증가율은 마이너스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한국 경제의 내수 상황은 분명히 부양책을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소비가 문제다. 세월호 비극 이전에도 소비 회복세는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내년이라고 해서 크게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의 내수 회복은 놀랍게도 건설 투자가 주도했으나, 이는 그동안의 부진에 이은 ‘기술적 반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의 완만한 경기회복세를 이어나가려면 소비를 늘리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정책에는 부작용이 따르는 법

소비를 늘리려면 소득을 늘리거나 저축을 줄이면 된다. 현재 한국 경제의 상황에서는 저축을 줄이는 것보다는 소득을 늘리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한국의 국민소득 대비 가계소득 비중이 다른 나라들보다 작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며, 정부는 최근 세제 개편을 통한 가계소득 증대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책을 통해 소득을 늘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정부가 민간 기업의 임금 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는 없으며, 감세나 복지 지출 확대를 통한 가처분소득 증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다. 정부가 발표한 ‘가계소득증대세제’는 상징적 의미의 정책일 뿐 실제 가계소득에 주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 투자를 늘리면 고용 증대로 연결돼 가계소득이 증가한다’는 주장 역시 정치적인 어려움이 있을뿐더러 그 효과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소비를 늘리는 또 다른 방법은 저축을 줄이는 것인데, 이를 위해선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이 필요하다. 금리를 내려 가계부채를 늘리는 것 자체가 자동차 할부 구입 등의 형태로 소비를 부양시킬 수 있다. 또 주택담보대출 금리의 인하가 부동산 시장 활성화와 주택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져 소비 심리를 개선하고 ‘자산 효과’를 통해 소비를 확대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 방법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불안 요소를 악화시키는 것이 맞다.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선진국에 비해 낮으며, 가계부채 역시 선진국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낮은 가계저축률과 높은 가계부채가 미국 서브프라임 금융위기의 한 원인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정책에는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또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정책을 실행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세계경제 전망이 그리 밝지 못해서 각 나라가 스스로 내수를 부양해야 하는 현재 상황에서, 구조적 불안 요소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경기가 둔화되고 침체에까지 이를 가능성을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 할까? 가계저축률이 약간 낮아진다고 해서 갑자기 경제위기가 오는 것은 아니며,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한국보다 높은 선진국도 꽤 있다.

국내 소비·부동산 시장 회복 여부가 변수

게다가 금융기관, 특히 은행의 건전성은 양호한 상태이고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여러 규제들도 완화되었을 뿐 아예 폐지되지는 않았다.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지만, 지난 6~7년간 주택 가격의 하락, 가계소득의 증가와 금리 하락 기조가 이어지면서 가계의 주택 구입 부담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결국 금리 인하를 통해 소비를 부양하려는 한국은행의 판단은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 경제가 가진 여러 가지 구조적 문제점을 개선하고 개혁하는 일도 내수 부양과 경기회복세 유지를 위해 중요한 과제다. 다만 경제구조 개혁이 한국은행에 주어진 과제가 아닐 뿐이다. 한국은행의 과제는 금리 또는 통화 정책을 통해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경기 변동성을 줄여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물가안정목표제 역시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은행의 설립 목적은 물가 안정이며, 이를 위해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 목표를 정한다. 2013년에서 2015년까지 3년간 물가 안정 목표는 2.5~3.5%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지난해 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국은행의 목표 범위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 ‘지금은 비록 물가상승률이 목표 범위 아래 있지만 6개월이나 1년 뒤에는 목표 범위로 올라갈 것이다’라는 얘기를 거의 2년 가까이 되풀이했지만, 그 예측이 계속 틀리는 것이다. 지난 9월 물가상승률은 1.1%였다. 물가안정목표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물가상승률이 적어도 뚜렷한 오름세를 보일 때까지 계속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

물론 물가안정목표제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몇 년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낮았던 것은 채소와 유가의 하락 때문이었으며, 수요 측면의 물가 압력을 반영하는 근원 인플레이션이 안정돼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디플레이션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한국은행의 견해에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국제 유가와 그 밖의 원자재 가격 하락 현상은 세계 경기 전망의 악화를 시사할 수 있기 때문에 통화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지난 8월과 10월 두 번에 걸친 금리 인하는 한국은행이 채택한 물가안정목표제를 확인시키는 적절한 정책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목표 범위에 들어올 때까지 계속 금리를 인하하는 것은 무리이겠으나, 금리를 2.5%에서 2%로 인하한 것은 적당한 강도의 정책 수행으로 보인다. 통화정책방향 발표문에서 물가안정목표에 대한 언급을 중단해 향후 정책 결정에 대한 유연성을 확보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은행 정책금리의 향방을 좌우할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여전히 국내외 경제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 경제의 회복세 지속 및 금리 인상 추진 여부, 그리고 국내의 소비 및 부동산 시장 회복 여부를 꼽을 수 있다. 일단 내년 말까지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려야 할 정도로 세계경제나 국내 경기가 활황세를 보일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정책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우리나라 경기가 금리 인상을 감당할 만큼 뚜렷한 회복을 보이지 않는 한 한국은행은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이다. 2004년 미국이 정책금리를 올리기 시작했지만 한국은행은 오히려 금리를 인하했던 사례도 있다.

우리 경제의 ‘일본화’를 막기 위해

한국은행이 내년에 또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국 경제의 회복세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이며, 우리나라의 내수 경기도 가계부채의 증가와 부동산 시장의 회복을 바탕으로 한 강세가 전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미국 경제의 전망이 악화돼 내년 초까지도 미국 연준이 금리 인상을 시사하지 않거나, 우리나라에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소비 및 부동산 회복 기미가 내년 초까지 이어지지 않을 경우 한국은행은 추가로 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예상한다.

내년 한국은행 금리의 운명은 미국 금리와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 달려 있다. 미국 금리가 오르지 않고 우리나라 부동산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금리는 2%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행은 우리 경제의 ‘일본화’를 막기 위해, 경기를 부양하고 인플레이션을 높여 중·장기적으로 금리를 올리기 위해, 공격적인 금리 인하를 단행해야 할지 모른다. 그때도 한국은행을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석태 SG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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