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석규가 부드럽고 깊은 목소리로 말한다.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을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흑백 배경에 등장한 공부하는 아이, 전화하는 노인, 버스에 탄 직장인, 커피숍에 앉아 있는 주부 얼굴엔 하나같이 불안과 초조가 어린다. 한석규의 목소리가 단호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걱정을 이기는 힘은 이미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 이제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으십시오.” 지난해 화제가 됐던 한 보험회사의 TV 광고 장면이다.
그런데 카피 문구가 묘하다. 교육·노후·건강·생활에 대한 걱정을 개인 스스로 이겨내란다. 보험사의 속내가 이렇게 읽힌다. “뭐든지 정부나 사회에 의존하지 말고 보험으로 알아서 해결하세요.”
<font size="4"><font color="#C21A8D">민간보험시장에 내맡긴 간병비</font></font>보험사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월20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2014년 금융위원회 업무계획’을 보고했다. ‘노후보장연금·보험활성화’가 올해 핵심 실천과제로 올라가 있다. 건강보험과 관련해선, 보험회사들이 노후실손의료보험과 고령층 특화보험을 올해 하반기에 출시하도록 유도하겠다고 돼 있다. 여기서 고령층 특화보험이란 노인에게 식사·세면·외출동행·청소와 같은 일상생활 지원, 간병, 치매 돌봄, 호스피스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험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일반 보장보험에 특약 형태로 들어가 있던 노인 서비스를 별도의 보험으로 만들고, 보장 형태도 보험금에서 서비스로 다양화하겠다는 뜻이다. 금융위는 “100세 시대에 대비한 금융상품·인프라를 개발해 국민들의 안락한 노후를 보장하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부가 감당해야 할 몫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공공보험이나 예산을 들여 감당해야 할 노인복지 사업을 민간보험 상품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과거 전력이 있다. 간병보험이 대표적인 사례다. 환자 간병에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 환자와 가족을 괴롭힌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간병비를 건강보험 급여 항목으로 추가하는 대신 보험사들이 간병보험 상품을 내놓도록 도왔다. 치매보험의 특약 형태이던 간병보험은 2012년 독립적인 보험이 된 뒤 214만 명(2012년 기준)의 가입자를 끌어모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간병비·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 등 3대 비급여를 포함한 ‘4대 중증질환 100% 보장’을 내걸어 기대를 모았으나, 결국 2015년부터 단계적으로 간병비의 절반 정도만 건강보험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결정됐다(2월11일, 보건복지부 ‘3대 비급여 개선 방안’). 한 보험사 관계자는 “지금까지 간병비에는 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서 간병보험은 보험사에 틈새시장이 됐다. (이번에 부분 적용되긴 해도) 간병비 부담이 커서 아직 수요가 있으리라 본다”고 설명했다.
정부 역할의 구멍이 보험사의 틈새시장이 되는 사례는 흔하다. 2012년에는 높은 치과 진료비를 겨냥한 치아보험이 열풍을 일으켰고, 지난해부터는 50대 중반 은퇴자가 국민연금을 수령하는 시기인 65살까지 소득 보장을 해주는 가교연금보험이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들어선 우울증 등 정신·행동 장애까지 보장해주는 보험도 처음 등장했다. 민간보험이 원래 공공보험의 보완재이긴 하지만, 고령화 시대에 대한 불안을 먹고 민간보험이 계속 확대되면서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할 국민이 오히려 보험료 지출을 늘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계 살림은 더 팍팍해지고, 소비가 줄어든 영향으로 경제도 더 어려워진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정부 권유로 나온 ‘4대악 보험’ </font></font>이젠 정부가 대놓고 민간보험을 골치 아픈 정책의 ‘만능 해결사’로 활용하기도 한다. 현대해상은 정부의 권유로 3월에 ‘4대 악 피해 보상보험’을 내놓기로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4대 악으로 지목한 성폭력·학교폭력·가정폭력·불량식품으로 피해를 본 국민이 보상받을 수 있게 하는 보험이다. 사망보험금 최대 8천만원, 상해·정신 장애 치료에 대한 최대 진단금은 100만원이다. 4대 악에 취약하지만 실손의료보험이나 상해보험에 가입하기 어려운 기초생활보호대상, 차상위계층 등 가정의 19살 미만 자녀가 우선 가입 대상이다. 월 보험료 1만~2만원은 지방자치단체나 학교가 대신 내준다. 현대해상 관계자는 “정부가 다른 보험사에도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만 개발에 참여하게 됐다. 일단 취약계층이 단체 가입하게 하고, 일반 개인에 대한 판매 여부는 향후 결정할 계획이다”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취약계층 보호를 민간보험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남윤인순 의원(민주당)은 논평을 통해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이고 이에 대한 보상은 가해자나 국가가 책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폭력 피해자가 가입한 보험으로 피해를 보상한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보험업계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유도하는 보험상품은 위험이 높아 수익이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노인은 나이가 많고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 보험사의 손해율(보험료-보험금)이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보험사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리 없다. 정부가 안전장치를 마련해주는 덕분이다. 안전할증비율(위험률 산출을 위한 통계자료가 부족해 손해율 변동성을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 위험률에 일정힌 비율을 부가하는 것)을 30%에서 50%로 높일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그만큼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윤용찬 ‘보험금숨은그림찾기 교육센터’ 센터장의 비판이다. “보험사는 고위험 보험은 ‘손해율이 올라간다’고 하는데, 지금도 대부분의 보험사는 손해율이 올라가는 요인을 수시로 보험료에 반영하고 있다. 노후보장보험을 보면 정부가 노인복지를 확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국민에게 비싼 보험료를 지워놓고 생색을 내는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보험사에 새로운 시장 열어주려는 의도</font></font>실제 정부는 고령층 특화보험을 노후 보장 수단 확대로 포장하고 있지만 보험사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기 위한 의도가 더 크다. 올해 금융위 업무계획에서 고령층 특화보험 출시 계획은 여러 정책 목표 중 ‘미래 유망금융서비스 육성’에, 앞서 지난해 11월 금융위가 내놓은 ‘금융업 경쟁력 강화 방안’에선 ‘100세 시대 신금융수요 창출’에 들어가 있다. 민간보험 확대가 정부엔 복지 비용은 줄이고 보험사 먹거리는 늘려줄 수 있는 묘안인 것이다.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부도 보험사도 걱정을 덜어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가계는 혼자 걱정을 감당하는 값으로 한 달 평균 40만원을 민간보험에 쏟아붓고 있다(정의당 추계). 얼마를 더 써야 우리는 걱정을 이겨낼 수 있을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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