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은 버나드 쇼의 희곡 중에서 이 가장 웃긴다고 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웃긴 사람은 블룬칠리라는 스위스 병사다. 무기 대신 초콜릿을 들고 다니는 이른바 ‘초콜릿 병사’이며, 사랑을 얻고자 허세 부리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덕분에 주위에서는 혹 그가 스위스의 왕이 아닐까 하며 궁금증이 폭발할 지경에 이른다. 덩달아 그의 허세도 폭발 지경에 이르러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그렇소. 나는 스위스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사람이오. 내가 바로 자유로운 시민이란 말이오!” 전쟁과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19세기 후반에 쓰인 희곡이다. 콩알만 한 나라가 조그만 작업장에 앉아 초콜릿과 시계를 만드는 ‘한심한’ 일이나 하면서, 틈틈이 광장에 모여 직접민주주의 운운하는 게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한때 허세로 치부하고 더러 놀림의 대상이던 스위스의 민주주의가 요즘 핫이슈가 되었다. 소득 불평등 증가로 인해 사회적·경제적 안정성이 전세계적으로 위협받고 있으나, 모두들 앓는 소리만 낼 뿐 별다른 뾰족한 정책 방도를 찾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스위스는 대안을 내놓고 토론하고 민주주의적으로 결정하고 있다. 정치가 시민의 입이 되기보다는, 그 입을 틀어막는 일이 빈번한 오늘날, 스위스는 시민의 소리가 봇물 터지듯이 나오고 있다. 그 소리를 정치적으로 묶어내고, 시민들에게 다시 들려주며, 종국에는 민주적 결정을 내린다. 돌이켜보면, 블룬칠리가 허세를 부릴 만했겠다.
CEO 연봉 규제 ‘국민 제안’ 뒤 제2라운드이런 걸 가능하게 하려면 좋은 제도들이 필요하다. 그중에서 손꼽히는 제도가 ‘국민제안제도’(L’initiative populaire)다. 연방헌법이 보장하는 제도로서, 1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해당 안건을 국민투표에 부치게 돼 있다. 현재 스위스의 총유권자 수가 500만 명 정도니, 100명 중에서 2명만 참여하면 해당 주제를 놓고 전 국민이 머리를 맞댈 수 있다. 스위스 직접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다. 투표 안건은 헌법의 일부 조항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민제안제도를 통해 해당 안건이 투표 대상으로 인정되면 통상 2∼3년 뒤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헌법이 개정되려면 절반 이상의 지지가 필요한데, 여기서 과반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전체 투표자의 과반수, 그리고 일종의 주에 해당하는 캉통(Canton)들의 과반수가 필요하다. 현재 스위스에는 26개 캉통이 있다.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터졌을 때, 스위스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영향을 받았다. 위기 국가에서 빠져나와 스위스로 밀려드는 외화 때문에 정책 당국이 골머리를 앓긴 했다. 하지만 경제위기를 통해 UBS 같은 스위스의 대표적인 은행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났다. 다국적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천문학적 연봉도 도마 위에 올랐다. 동시에 ‘자유로운 시민들’의 나라인 스위스에서 시민들 간의 소득 격차가 늘어났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소득 불평등은 곧 시민의 자유를 간접적으로 제약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소득 불평등 문제를 곧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식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시민들의 행동이 잇따랐다.
그 첫걸음은 CEO의 연봉 결정 방식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미 CEO의 연봉 문제를 주주총회에서 다룰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논의하고 소란만 일으킬 수 있을 뿐 제재할 힘은 없다. 스위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상장기업의 경우 주주들이 연봉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안건이 국민제안제도를 통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지난 3월의 일이다. 결과는 대다수의 예상을 깬 압도적 지지였다. 무려 68%가 찬성했다. 찬성 캠페인을 주도한 쪽이 쓴 돈이 2억원 남짓이고, 반대쪽은 90억원이 넘는 자금을 동원했다. 개미들의 승리였다.
상위 10% ‘나 홀로 성장’이 가져온 불평등두 번째 라운드는 수위를 한껏 더 올렸다. 주주총회에서 CEO의 연봉을 규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해, 이번에는 정공법을 택했다. 이른바 ‘1:12’로 알려진 임금 격차 축소 정책이다. 기업 내 최저임금과 최고임금 간의 격차가 12배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정책이다. ‘청년사회주의자’(JUSO)가 주도한 것으로 2011년 1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 그룹이 주도하긴 했지만, 녹색당을 포함한 여러 좌파 계열 정당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정공법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 통상적인 불평등 지수만 본다면 스위스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소득 불평등을 측정하는 데 널리 사용되는 지니계수로 따져보면, 스위스의 소득불평등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낮은 편이다. 문제는 최근에 불평등도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라는 점이다. 최하위 10% 임금과 최상위 10% 임금 간의 격차는 1996년 약 2.4배였는데, 약 15년 만에 2.7배로 늘었다. 흥미롭게도 이 증가 추세는 오로지 상위 10% 소득의 나 홀로 성장 때문이었다. 최하위 10% 임금과 중간임금 간의 격차는 지난 20여 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다. 오히려 미미하게나마 줄었다.
하지만 최상위 10%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사정이 같지는 않다. 최상위 10% 내에도 상당한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난 30년 동안 상위 10%의 실질소득은 약 13% 늘었지만, 상위 1%로 국한해보면 소득증가율이 2배 이상 높다. 더 좁혀서 상위 0.1%만 보면, 소득증가율이 65%다. 0.01%층에 이르면, 소득 증가는 가히 천문학적 수준이 된다. 약 117%다. 이는 부자일수록 돈을 더 빨리 많이 벌었다는 얘기다. 또한 이런 거시적 통계에 다양한 기업별 사례가 보태졌다. 스위스의 대표 제약회사인 노바티스의 경우, 회장이 받는 연봉은 최하 임금의 약 266배가 된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여론의 공분을 샀다. ‘국민기업’ 네슬레의 경우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결국 스위스에서 소득 불평등 문제의 핵심은 1% 이내의 최상위 소득 문제고, 이들의 소득을 규제하지 못하면 소득 불평등 추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1:12 안건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게 되었다.
1:12 캠페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3월 투표 승리의 여운이 남아 있을 때였다. 여론은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반대쪽에서는 그만큼 와신상담했다.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서 반대 캠페인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업들은 자금 갹출을 시작했다. 경제단체는 연일 성명서와 보고서를 냈다. 다국적기업들은 연일 ‘방을 빼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정부나 의회 쪽에서도 반대 의견이 우세했고, 급기야 반대 의견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와 함께 찬성 여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0월께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여론이 정확히 반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11월 초의 여론조사에서는 54%가 반대, 찬성은 36%에 불과했다. 찬성에서 반대로 생각이 바뀐 사람이 10%는 족히 넘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결국 이런 움직임은 투표일까지 계속됐다. 투표함을 열어보니, 65%에 이르는 압도적 반대였다.
논란이 많았던 12라는 수치11월 투표 결과는 3월 투표와 비교해보면 대반전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그 원인을 두고 해석도 여러 갈래다. 우선, 지역과 소득 요인이 컸다. 조그마한 나라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네 가지고 그만큼 문화·정치적 차이가 크다보니, 투표 결과는 언어권에 따라 달라지기 일쑤다. 취리히를 포함한 독일어권은 전통적으로 보수적이고, 제네바를 포함한 프랑스어권은 진보적인 편이다. 캉통의 과반수를 요구하는 제도도 기실 이런 언어정치적 편차를 고려한 것이다. 이번에도 독어권에서는 70%를 넘어서는 반대표가 나왔고, 프랑스어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또한 소득수준이 높은 지역에서 반대 비율이 높았다. 백만장자들이 몰려사는 추크라는 동네에서는 80% 반대라는 최고 기록이 나왔다.
그렇다고 언어지역적 문제로만 치부하기는 힘들다. 프랑스어권 지역에서도 찬성표가 절반을 넘지는 못했다. 1:12 안건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점에서 1:12 비율이 적정했느냐는 논쟁을 피하기는 힘들다. 사실 12라는 수치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이론적·실증적 근거가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역사적 근거를 들기도 했다. 1980년대에 최저임금과 최고임금 간의 격차가 12배를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민들을 설득하기에는 다소 조악한 주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각에서는 최저임금이 아니라 평균임금을 기준으로 삼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다른 쪽에서는 12배라는 수치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보면, 찬성 쪽이든 반대 쪽이든 딱 부러지는 수치를 ‘과학적으로’ 주장하기는 힘든 노릇이다. 임금 격차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규제한다는 것이 기본 취지라고 한다면, 수치의 ‘과학화’는 이차적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찬성 캠페인의 논리적 설득력은 확실히 부족했고, 반대 캠페인에 손쉬운 비판의 빌미를 내주었다.
캠페인 전술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찬성 쪽 캠프는 ‘크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햄버거 12개를 쌓아두고 그 옆에는 1개만 딸랑 배치하는 식으로 해서, 임금 격차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반대 캠프는 역시 영리했다. ‘사실 그거 별로 큰 차이가 아니거든요’라는 방식으로 정면 대응했더라면 대실패일 뻔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경제에서 임금 결정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내세운 슬로건은 ‘국가에 의한 임금 독재 반대’다. ‘1:12’를 추진하는 ‘빨간’ 무리들이 스위스 경제를 망친다고 묘사했다. 반대 캠페인의 포스트에는 1:12라는 깃발을 단, ‘빨간’ 불도저가 등장했다. 그 위에는 옛 소련의 깃발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이 오고 있다!’는 위협적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찬성 쪽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 이런 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임금 불평등이 지나치다. 동의하고,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국가가 나서서 12배로 못박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반대 전략이 꽤 효과적이었던 셈이다.
1:12 안건이 부결되면서, 소득 불평등을 둘러싼 ‘스위스 대격돌’은 현재 스코어 1대1, 무승부 상태다. 그리고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경제위기 직후부터 소득분배와 관련된 수많은 국민 제안이 이루어졌고, 지금 국민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월 4천프랑(약 480만원)을 보장하는 법정 최저임금 관련 안건은 내년 초 투표에 부쳐진다. 곧이어 모든 국민에게 2500프랑(약 300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에 관한 안건이 뒤따를 예정이다. 2013년은 최상위 소득을 사회적 규제를 통해 끌어내림으로써 불평등을 줄여보자는 것이었다면, 내년부터는 최하위 소득을 위로 끌어올릴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현재 법정 최저임금에 대한 여론은 반반이다. 반대 쪽 캠프에서는 이번에 약발이 먹힌 ‘국가의 의한 임금 독재 반대’ 카드를 다시 끄집어낼 공산이 크다. 찬성 쪽이 이런 전략에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진보세력의 캠페인 전략은 아직 좀 진부하다. 그러다보니 좋은 정책 메시지가 캠페인 과정에서 희석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할 이유가 없네물론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결과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스위스에선 불평등 문제를 놓고 시민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정책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 이것 자체가 드물고 진귀한 사례다. 호수 위로 대규모 다리 공사를 할 때도 토론하고 투표해야 하는, 때로는 답답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직접민주주의지만, 이게 스위스의 힘이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또 이런 힘이 오늘날 스위스의 부와 영광을 만든 원천일 것이다. 그래서 도처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오늘날 ‘초콜릿 병사’ 블룬칠리의 허풍이 때로는 부러워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위스의 ‘자유로운 시민’ 블룬칠리는 결국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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