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반인 강윤정(24·가명)씨는 요즘 막막하기만 하다. 9월 들어 기업들이 하반기 공채를 시작했는데, 그간 취업을 준비해온 금융회사나 외국계 기업들이 채용 인원을 지난해의 절반으로 줄여버린 까닭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업종에 상관없이 채용 공고가 뜨는 모든 대기업에 원서를 내고 있다. 그러나 지금껏 쌓아온 경험과 이력이 대기업이 원하는 스펙(Spec·정량적 조건)과 맞지 않는 것 같아 합격에는 자신이 별로 없다. “지금 대기업의 인재상에 맞춰 스펙을 쌓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소개서를 잘 쓰는 데 집중하고 있다. 9월에 5장 정도 원서를 냈는데, 아마 앞으로 수십 장은 더 써야 하나라도 붙지 않을까 싶다.” 그는 막 시작된 하반기 공채 시즌에 취업할 수 있을까.
대기업의 말만 들어보면 지난해보다는 취업 가능성이 높은 듯 보인다.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박근혜 정부 들어 대기업들은 여러 차례 ‘통 큰 고용’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실제 30대 그룹은 지난 8월28일 올해 14만700명을 고용하겠노라고 발표했다. 지난해에 채용한 인원(12만5800명)보다 1만4900명 늘어난 규모다. 게다가 연초에 제시한 고용 목표치(12만7700명)보다 1만3천 명이 더 많다. 대기업의 발표대로라면 상반기에 이미 채용된 7만8700명 외에도 하반기에 6만2천 명이 더 취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늘어난 신규 일자리 미비그러나 대기업이 고용 목표를 높였다고 해서 곧바로 취업 준비생들의 취업 기회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정부는 기업으로부터 채용 계획을 받으면서, 사내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경우에도 기업이 직원을 신규 채용한 것으로 계산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방식에 따라 하반기 ‘고용 증가’로 집계되는 인원만 1만2천 명이다. 지난해 대비 올해 증가할 것으로 기대되는 일자리(1만4900명)와 맞먹는 규모다. 현 정부 들어 대기업이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던 효과를 빼면, 대기업이 실제로 늘어난 신규 일자리는 미미한 것이다.
대기업이 공헌한 대로 신규 인력을 채용하지 않더라도, 정부에는 이를 제재할 방법이 없다. 대신 언론이나 시민사회가 나서 “약속을 지키라”고 비판하기도 어렵다. 지금은 개별 대기업이 정부에 제시한 고용 목표와 그에 따른 실적을 알아낼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선심 쓰듯 고용 목표치를 높게 써낸 뒤 결국엔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구조인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의 설명은 이렇다. “우리가 기업으로부터 고용이나 투자 계획을 받을 때 개별 기업의 규모에 대해선 공개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있다. 기업의 내부 정보라 기업 쪽에서 민감해하기 때문이다. 연말에 (고용과 투자 계획 대비) 실적을 조사해 발표하고는 있지만, 개별 기업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점검하기는 불가능하다.”
실제 지난 9월 초 시작된 하반기 공채 시즌을 맞아 대기업이 발표한 대졸 신입 공채 전형을 들여다보면 대기업의 통 큰 약속이 무색해 보인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30대 그룹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8곳만 대졸 신규 채용 계획을 확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는 계획이 없거나 아직 고민 중이다. 이들 18개 그룹의 하반기 채용 인원은 1만8619명으로 지난해 하반기(1만7460명)보다 1159명(6.6%) 증가했다. 잡코리아 자매기관인 좋은일연구소의 변지성 수석연구원은 “기업들이 정부의 일자리 확대 정책에 맞춰 전반적으로 채용 규모를 늘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청년층 구직자의 욕구를 모두 수용하기는 어려운 규모여서 구직자 간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삼성·포스코만 채용 대폭 늘려그나마 하반기 채용 인력이 지난해보다 다소 늘어난 것은 삼성과 포스코 등 소수 대기업이 채용을 대폭 늘린 덕분이다. 삼성은 하반기에 대졸 신입사원만 5500명을 뽑기로 했다. 지난해 하반기보다 1천 명 늘린 것이다. 포스코도 지난해 1132명에서 2배 가까이 증가한 2160명을 채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KT(1300명)·CJ(1천 명)·SK(600명)·한화(550명) 등 상당수 대기업은 채용 규모를 지난해에 맞추기로 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오히려 대졸 신입 직원 채용 규모를 1570명에서 1200명으로, LG는 3천 명에서 2500명으로 줄였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국내외 경기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 회사는) 최대치를 뽑기로 했다. 대졸 신입 직원이 지난해보다 줄었지만 고졸 채용을 대폭 늘렸기 때문에 총고용은 올해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취업 준비생들이 선호하는 공기업의 채용 관문은 더 좁아졌다. 주요 30개 공기업은 하반기에 1200명 정도를 신규 채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하반기보다 400명 넘게 줄어든 수준이다. 30곳 중 16곳이 하반기에 아예 채용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한국조폐공사 등은 공채 계획이 없고, 한국가스공사·한국수력원자력 등은 공채 규모를 대폭 줄이기로 했다. 공기업 정원을 통제하고 있는 기획재정부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정부가 정원을 많이 늘려줘서 공기업이 신규 채용을 확대할 수 있게 되면, 취업에 성공한 신입 직원에게는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인건비 부담은 직간접적으로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 일자리 문제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공기업 증원을 엄격하게 볼 수밖에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양질의 일자리로 꼽히는 금융회사 취업도 바늘구멍이 됐다. 국민·신한·우리 등 7개 은행의 하반기 채용 규모는 1천 명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연간 규모로 따지면 지난해보다 30% 가까이 줄어들었다. 은행들이 저금리와 각종 수수료 인하 등으로 수익성이 악화되자 신규 채용을 줄여 인건비를 아끼려 하는 것이다.
공기업과 금융회사 공채만 기다려온 취업 준비생들은 갑자기 치솟은 경쟁률에 크게 당황하는 분위기다. 지난 2월 서울 소재 법학과를 졸업한 황경수(31·가명)씨는 하반기에 세 번째로 공기업 법무직렬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독 힘이 빠진다. 원서를 낼 수 있는 공기업 수가 줄어든데다, 그나마 원서를 받아주는 공기업에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을 선호하는 탓이다. “시험에 응시할 기회 자체가 많이 줄었다. 한 자릿수 자리를 놓고 수십~수백 명이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다. 답답한 마음에 민간 기업에도 원서를 넣고는 있지만 나이가 많아 별 기대는 없다. 정부가 청년 취업을 강조해서 공기업이라도 일자리를 늘려줄까 기대했는데 오히려 줄어 실망스럽다.”
‘청년고용할당제’를 확대하라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하는 일이라곤 기업에 채용을 늘려달라고 ‘읍소’하는 정도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28일 10대 그룹 총수를 청와대로 초청해 “우리 국민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일자리 창출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의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며 고용 확대를 간곡히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대신 “과도한 경제민주화 입법으로 대기업을 옥죄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등 여러 ‘당근책’을 제시했다. 박근혜 정부가 핵심 국정과제인 ‘고용률 70%’를 임기 중 달성하려면 기업들이 청년 구직자를 적극적으로 고용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7월 말 기준 20대 고용률은 57.8%로 전 연령층 평균(60.4%)에 못 미치는데다, 30대 고용률(73.2%)도 40대(78.8%), 50대(73.8%)보다 낮다.
박 대통령의 읍소는 통했다. 대기업은 이날 고용과 투자를 애초 계획보다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청년세대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 양호경 정책팀장의 비판이다. “정부의 청년 일자리 대책인 해외 취업 알선, 멘토링 사업 등은 일자리 창출 효과가 거의 없다. 정부는 오히려 양질의 공공부문 일자리인 공기업 채용을 줄였다. 그러면서 오로지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정부에 청년 취업난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확고히 있다면 내년부터 공공부문에 적용하기로 한 ‘청년고용할당제’를 민간 부문으로 확대하는 등 기업이 청년 정규직을 최대한 많이 뽑도록 강제하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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