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신흥국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뉴스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좀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라는 이름으로 선진국, 특히 미국에서 늘어난 대규모 유동성이 신흥국으로 유입됐는데, 이제 미국이 연내 양적완화 규모를 축소한다고 하니, 그리고 미국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고 금리가 상승하고 있으니 그 자금이 미국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나올 파열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지난 5월 하순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을 처음 시사한 이후, 이미 투자자금이 어느 정도는 빠져나가면서 신흥국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린 바 있다. 그런데 최근 양적완화 축소가 코앞으로 다가온 9월부터 시작될 거라는 예상에 점차 힘이 실리면서 신흥국 자산 가격의 하락폭이 더욱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인도·터키·브라질·남아공 위기 후보
물론 이같은 금융시장의 움직임에는 신흥국의 취약한 경제 상황도 한몫한 게 사실이다. 금융위기 이전 세계경제는 고성장을 구가하는 신흥국들이 활력이 떨어진 선진국 경제를 끌고 가는 모습이었는데, 위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양상은 바뀌었다. 오히려 금융위기의 진앙지였던 미국은 과도한 부채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경기회복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신흥국들은 경기가 둔화되면서, 수년 전과는 상반된 의미에서의 차별화(Decoupling)가 현재 세계경제 상황을 설명하는 단어가 됐다. 사실 금융위기 이전 신흥국의 고성장에는 미국 등 선진국의 수입품 소비가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신흥국들은 열심히 생산한 상품을 미국에 직접 수출하거나 천연자원을 이들 신흥공업국에 수출해 고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 등 선진국의 경기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위기 이전만큼의 성장세를 되찾지는 못했고, 더욱이 수입 대체를 통한 국내 제조업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어 신흥국 수출이 둔화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흥국에서는 예전에는 고속성장의 빛에 가려져 있던 인프라 부족이라든가 부패나 관료주의 등의 문제들까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제 투자자본은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다. 2006년 아이슬란드는 이들의 공격을 받아 펀더멘털(기초여건)이 양호함에도 외환위기를 겪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지금 취약국으로 꼽히는 국가나 과거 외환위기를 겪었던 국가가 경상수지 적자와 같은 취약점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경제의 펀더멘털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전세계 어디서든 자기 나라 돈을 받아주는, 즉 돈이 부족하면 찍어내면 되는 기축통화국이 아닌 신흥국들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능력(경상수지)이 떨어지고, 기존에 비축된 외화(외환보유액)도 충분하지 않은데 단기간 내 갚아야 할 외화(단기외채)는 많다면 외환위기의 후보국이 되기 쉽다. 그리고 물가가 빠르게 상승해서 화폐가치가 계속 떨어지거나, 경제성장세가 둔화돼 투자 매력이 떨어진다면 위기 가능성은 더 커진다. 최근에는 금융시장이 예전보다 크게 성장한 탓에, 시장에서 일시에 대거 유출될 수 있는 외국인의 주식 및 채권 투자자금 규모까지 고려해봐야 위기 가능성을 제대로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러한 기준을 종합적으로 볼 때, 현재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인도·인도네시아·터키·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정도를 가장 우려스러운 후보 국가로 꼽고 있다. 경상수지와 단기외채, 외환보유액 등만을 놓고 보면 터키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더욱 취약해 보이지만, 최근 금융시장 불안이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최근 몇 년간 이 지역으로 유입된 자금 규모가 컸던 것과 연관이 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2011년과 2012년 신흥 아시아 지역으로 유입된 해외자금은 1조1천억달러가 넘었던 데 비해, 신흥 유럽으로 유입된 자금은 약 4천억달러, 남미 지역은 6천억달러,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은 1440억달러였다.
한국은 반사이익 챙길 수도
투자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돈을 투자한 나라에서 위기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면 빨리 돈을 회수하고 싶을 것이다. 투자자들이 하나둘 자금을 회수할 경우 그 나라에선 환율이 급등하고 금리가 상승하게 된다. 무엇보다 취약국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우려가 우려를 낳아 위기가 결국 실현되는 상황에까지 다다를 수도 있다. 이에 투자자금 유출 조짐을 보이는 나라들은 금리 인상 등의 선제 조치를 통해 외자 유출을 막고자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러나 이는 경기를 더욱 위축시켜 내국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 나라의 투자 매력 자체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최근 인도에서 금리 인상과 함께 시중 유동성 흡수 조치를 취한 지 얼마 안 돼 다시 유동성을 공급하고 경기부양을 꾀하는 갈지자 정책 대응을 보인 것은 취약국들이 처한 이같은 난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제 우리나라를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무엇보다 경상수지 흑자국이다. 위기 후보국으로 거론되는 국가들이 경상수지가 계속 적자를 기록했거나 최근 들어 흑자폭이 크게 축소된 것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오히려 갈수록 늘어나 올해 상반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외환보유액은 6월 말 현재 약 3300억달러로 세계 7위 수준이다. 단기외채와 경상수지 흑자 규모 등과 비교해보면, 현재 다른 취약국들보다는 훨씬 안전한 상황이다. 설령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이 상당 규모 나타나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체력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신흥국에서 정말 연쇄적인 위기가 발생하는 등 국제 금융시장 전체가 심각한 위기 국면으로 진입한다면, 리먼 사태 직후, 또는 유럽 위기가 심각했을 때처럼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세계 금융시장을 지배하면서 우리나라 금융자산 가격도 동반 하락하는 상황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같은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더욱이 이번 신흥시장 위기가 일정 수준에서 제한된다면,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펀더멘털에 힘입어 오히려 다른 신흥국들과는 차별화된 움직임을 보이고, 나아가 반사이익을 챙길 수도 있을 것이다. 국제 투자자금의 행보가 변덕스러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부 신흥국의 위기 여파가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우리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으나, 과도한 걱정은 오히려 투자자들의 우려만 불러올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송경희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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