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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도 ‘유령회사’인가

‘뉴스타파’ 1차 공개한 3개 재벌 총수 일가 ‘역외 탈세’ 의혹들… ‘리스트’ 파악도 못한 국세청, 재계만큼 당혹 휩싸여
등록 2013-06-02 21:57 수정 2020-05-03 04:27

지난 5월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 위치한 전국언론노동조합의 귀퉁이 회의실에 비상한 관심이 집중됐다. 수십 명의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더러는 대기업 인사도 보였다. 비영리 독립언론 (한국탐사 저널리즘센터)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으로 취재한 결과를 통해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세운 한국인 명단을 처음 발표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 4월 조세회피처에서 세금을 탈루해온 세계 유명 인사를 발표한 ICIJ가 한국인 명단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후 ‘역외 탈세 리스트’에 대한 세간의 궁금증이 들끓어온 터였다. 드디어 드러난 조세회피처의 한국인 비밀고객은 어떤 이들일까.

김용진  대표(왼쪽)와 최승호 PD가 지난 5월22일 서울 중구 태평로 전국언론노동조합 회의실에서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조세회피처에 대해 공동으로 취재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김용진 대표(왼쪽)와 최승호 PD가 지난 5월22일 서울 중구 태평로 전국언론노동조합 회의실에서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조세회피처에 대해 공동으로 취재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페이퍼컴퍼니 설립 전후로 수상한 거래

가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쿡아일랜드 등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파악한 한국인은 모두 245명이다. 의뢰자의 요청으로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도와주는 대행업체인 ‘포트컬리스 트러스트 넷’(PTN)과 ‘코먼웰스 트러스트’(CTL)의 내부 자료에 담긴 13만여 명의 고객명단, 12만여 개의 페이퍼컴퍼니 분석을 통해 추려낸 결과다. 그간 ICIJ가 명단 발표를 예고해온 ‘버진아일랜드 금융계좌 보유 한국인 70명’보다 훨씬 많은 수다. 245명 중 159명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며 한국 주소를, 나머지가 홍콩 등 해외 주소를 기재했다. 이 가운데 페이퍼컴퍼니의 주소와 실제 거주지 주소 간의 대조 작업 등을 통해 본인임이 확인된 한국인은 20여 명이라고 는 밝혔다. 물론 법인이든 개인이든 간에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웠거나, 이 회사명의로 계좌를 튼 뒤 금융거래를 했다고 해서 모두 불법은 아니다. 자금 규모가 10억원 이상일 경우 국세청에 신고하고, 자금 조성과정과 그 뒤 각종 거래에서 발생한 세금만 제대로 내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지난 2년간 버진아일랜드에 해외 금융계좌가 있다고 국세청에 신고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명단에 오른 상당수가 탈세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가 1차로 공개한 5명의 페이퍼컴퍼니 설립자 명단은 3개 재벌의 총수 일가와 연루돼 있다. 이들이 탈세 같은 불법행위를 저질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전후로 수상한 해외부동산 거래나 자녀로의 재산 증여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먼저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지낸 이수영 OCI 회장이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과정을 들여다보자. 그가 2008년 4월 설립한 페이퍼컴퍼니의 이름은 ‘리치몬드 포레스트 매니지먼트’다. 부인 김경자 OCI미술관장이 공동이사와 공동주주로 함께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법인 설립 시점이 묘하다. 이 회장 부부가 페이퍼컴퍼니를 만들 당시는 OCI의 주가가 거침없이 뛰던 때였다. 태양광전지의 사업성이 부각된 덕에 2007년 5월 10만원대 초반이던 OCI 주가는 1년 만에 44만원으로 4배 가까이 급등했다.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전후로 OCI 주가가 치솟아 지분 25%를 보유한 회장 일가가 엄청난 시세차익과 배당이익을 얻게 된 것이다. 게다가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기 6개월 전에는 이 회장의 장남 이우현 OCI 부사장과 차남 이우정 넥솔론 대표가 내부 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미리 사고 되파는 방식으로 10억원가량의 부당이득을 챙기기도 했다. 이회장의 페이퍼컴퍼니가 당시 OCI 주가 급등으로 인해 불어난 개인 자금을 관리하는 데 쓰였다거나, 자녀의 부당 주식거래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OCI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수영 회장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자회사인 OCI엔터프라이즈이사회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받은 100만달러 정도를 자산운용사를 통해 개인 계좌를 개설했으나 2010년 계좌를 폐쇄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이 개인 소득을 잠시 조세회피처의 계좌에 묻어뒀다는 해명이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는 모양새다.

상속·증여세 없이 부동산 넘겨주려

한진그룹 창업주 고 조중훈 회장의 동생인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현 고문)에 대해선 해외 부동산 거래에 페이퍼컴퍼니를 활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조 전 부회장과 부인 이영학씨는 2007년 4월 공동명의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카피올라니 공원에 있는 콘도를 195만달러에 사들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이씨는 자신이 구입한 콘도가 있는 거리 이름과 같은 ‘카피올라니 홀딩스’를 세웠다. 발행주식 1주, 자본금 1달러짜리의 전형적인 유령회사였다. 이후 2011년 콘도는 조 전 회장의 단독 명의로 바뀐 뒤 곧바로 조 전 회장 소유로 추정되는 신탁회사에 팔린다. 상속·증여세를 피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대형 은행에 소속된 한 세무사의 설명이다. “해외에선 대개 부부간 증여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신탁회사에 부동산 명의를 옮길 경우, 세법은 거래로 보지 않기 때문에 소유주 명의만 바뀌고 세금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신탁회사로 부동산 명의를 넘겨놓으면 부부가 사망해도 자녀는 신탁회사의 명의를 받는 것으로 상속세 없이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조 회장 부부가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해외부동산 거래를 하는 과정에 이영학씨가 세운 페이퍼컴퍼니도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했으리라는 게 의 추정이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막내동생 조욱래 DSDL(옛 동성개발) 회장이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시점은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한 시점과 공교롭게도 맞아떨어진다. 그는 2007년 3월 자본금 5만달러로 ‘퀵프로그레스 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를 세운다. 조 회장이 단독이사지만, 장남 조현강씨가 공동주주에 이름을 올렸다. 그로부터 9개월 뒤 조 회장은 자신이 보유하던 DSDL의 지분 93%를 현강·현우·윤경 삼남매가 소유한 부동산임대업체 DSIV에 넘겼다.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한 것이다. 이 과정에 때마침 설립된 페이퍼컴퍼니가 어떠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을 것으로 는 보고 있다. 대한항공과 DSDL은 전·현직 총수일가에 제기된 의혹에 대해 “모르는 내용”이라며 공식적인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IMAGE2%%]“국세청은 역외 탈세에 눈뜬 장님”

재계는 페이퍼컴퍼니 설립 명단 공개에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가 앞으로 매주 한두 차례 ‘조세회피처의 한국인들’이라는 특집 시리즈로 추가 명단을 발표하기로 했는데, 이 중 상당수가 재벌 총수나 대기업 임원인 것으로 알려진 탓이다. 김용진 대표는 “다음부터는 기업 임원이 많이 포함될 듯하다. 이들 기업엔 이름을 알 만한 재벌그룹들도 포함돼 있다. (우리가 파악한 한국인 명단에는) 개인 외에도 법인이 약간 나온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설립된 회사도 있을 수 있어 현재 옥석을 구분 중”이라고 설명했다.

재계만큼 당혹해하는 건 국세청이다. 과세 당국도 파악하지 못한 조세회피처 명단을 언론이 먼저 공개해 체면을 구기게 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국세청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 들어 역세 탈세를 뿌리 뽑아 숨은 재원을 확보하는 일등공신이 되겠노라고 공헌해온 터였다. 그러나 국세청이 현재 파악하고 있는 조세회피처의 페이퍼컴퍼니 설립 현황은 이번에 가 취재한 내용과는 크게 어긋난다. 국세청이 지난해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2012년 6월 기준 한국인이 버진아일랜드에 설립한 현지 기업은 82개에 불과하고, 쿡아일랜드에 투자한 현지 기업은 아예 없는 것으로 나온다.

이번에 공개된 한국인 245명이 1개씩 총245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웠다고 최소한으로 가정하더라도, 국세청이 주장해온 규모의 3배가 넘는다. 박원석 진보정의당 의원은 “쿡아일랜드의 경우 지난해 3월에 우리나라와 조세정보교환협정이 발효된 상태인데도 페이퍼컴퍼니의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며 “현재 국세청은 역외 탈세에 눈뜬 장님”이라고 꼬집었다.

세무조사로 세금 추징한다는 방침

국세청도 할 말은 있다. ICIJ와 접촉해 한국인 명단을 입수하려고 했지만 “정부와는 자료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것이다. 대신 국세청은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의 세무 당국이 공동 조사한 방대한 분량의 조세회피처 탈세 혐의 자료를 공유하기 위한 협의 절차를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를 손에 넣기까지는 적어도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국세청은 일단 가 제기한 의혹을 따라가면서 탈세 혐의가 있으면 세무조사를 통해 세금을 추징한다는 방침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그것도 일종의 정보인 만큼 적극 활용해 세금 탈루가 있는지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국세청의 의지에 달렸다
‘역외 탈세’ 혐의 입증 험난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것으로 지목된 245명에게 ‘역외 탈세’ 혐의를 따져묻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예상된다.
일단 가 확보한 페이퍼컴퍼니 서류에 나온 설립자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인지를 확인하는 것부터 난관이다. 개인이 페이퍼컴퍼니를 세우면서 차명을 쓰거나 거주지를 속이는 경우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대형 로펌·은행 등 전문가를 동원해 페이퍼컴퍼니 설립이나 금융계좌 개설 흔적을 깨끗이 지울 만한 능력이 있는 유력 인사라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번 조세회피처 고객 명단에 포함된 이수영 OCI 회장,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씨, 조욱래 DSDL 회장처럼 재벌 총수 일가가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며 실명과 실거주지 주소를 그대로 남긴 건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245명의 리스트 중에 메가톤급 유력 인사가 포함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한 대형 회계법인 소속 회계사는 “(이번 명단에 포함된 재벌 일가는) 조세회피처의 페이퍼컴퍼니가 고객정보를 철저히 보장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든가, 아니면 정말 탈세를 할 의도가 없었던 것 같다. 실명과 주소를 남긴 게 너무 허술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차명을 이용해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당사자가 확인되더라도 실제 탈세를 했는지 추적하기는 까다롭다. 가 공개한 자료에는 페이퍼컴퍼니의 설립자 이름, 설립 시기, 자본금 등 기본 정보만 담겨 있다.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부당하게 자금을 조성했거나 세금을 포탈했는지 확인하는 데 필요한 계좌 내역이나 자금 운용 규모 등은 정작 모두 빠져 있다. 국세청이 페이퍼컴퍼니와 연관된 계좌 내역이 있는지부터 파악해나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조세회피처에서 금융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그곳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웠거나 그와 연계된 계좌를 텄다고 해서 불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외투자를 자주 하는 개인이라면 외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신고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조세회피처를 활용할 수도 있다. 게다가 기업이라면 법령이 까다로운 해외에 진출할 때 그곳 법령을 충족하기 위해 조세회피처에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하기도 한다. 또 외국 기업을 인수·합병(M&A)할 때 페이퍼컴퍼니가 자동으로 딸려오는 경우도 많다. 해운회사가 선박을 만들 때 자금을 조달해주는 금융기관이 채권 회수를 잘할 수 있도록 담보권 행사가 유리한 파나마 등 조세회피처에 선박별로 SPC를 설립하는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한 세무사는 “국세청이 조세회피처의 자금이 애초에 합법적으로 조성됐는지, (10억원 이상이면) 과세 당국에 제대로 신고했는지, 해외에서 거래하며 발생한 세금을 제대로 납부했는지 등을 일일이 따져봐야 탈세 혐의를 특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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