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조원에 가까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고 재원은 국채 발행으로 조달하겠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인 규모와 사업별 재원배분은 국무회의나 당정 협의를 거쳐 결정하되, 시급한 상황임을 고려해 국회에 ‘4월 내 의결’을 주문하고 있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그런데 정부가 ‘슈퍼추경’을 하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추가경정예산의 편성 조건은 국가재정법 제89조에 명시돼 있다. 정부가 제시한 이유는 1항 2호의 ‘경기침체·대량실업 등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다. 현재 경기 상황이 어렵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여건 변화가 올해 예산을 편성하고 의결했던 지난해 12월 이후 석 달여 만에 발생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추경이 필요하다고 할까.
지난해 예산 편성·의결 과정에서 일종의 국민 기만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차근차근 짚어보자. 이명박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4대강 토목사업에 몰입하면서도 엄청난 감세를 강행했다. 당연히 국가 채무는 재정위기가 염려되는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감세를 밀어붙이면서 외쳤던 낙수효과는 강물 따라 흘러갔다. 경제가 더 어려워졌지만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에 약속했던 ‘정권 말 균형예산 달성’을 엇비슷하게라도 보여주고 싶어 한 듯하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2013년 예산안’을 마련하며 세출을 늘리는 예산안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대신 세입을 과도하게 늘려잡는 방법을 선택했다. 공기업 매각 등 불확실한 재원을 세입에 포함시켰고, 경제성장률 전망치(2012년 3.3%, 2013년 4%)를 무리하게 적용해 조세수입도 과장했다.
게다가 국민에 의한 재정의 민주적 통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올해 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됐을 때 국회예산정책처는 성장률을 3%로 예측하며 세수가 부족할 것이란 우려를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여당은 정부의 예산안을 그대로 밀어붙였고, 일부 야당 의원도 이에 편승해 지역구 사업의 예산 챙기기에 골몰했다. 결국 2012년 성장률은 정부 전망치에 크게 못 미치는 2%로 드러났고, 2013년 성장률 전망치(정부)도 2.3%로 크게 낮아졌다. 예측일 뿐이니 이를 두고 시시비비하기는 쉽지 않지만, 지난 3개월 사이에 정부 예측이 왜 크게 달라졌는지는 누구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부가 제시하는 추경 편성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불과 몇 달 전이지만 부실한 경제 예측과 이에 근거한 부실한 예산 편성을 스스로 알고 있는 예산 당국이 정권 초기에 모든 책임을 지난 이명박 정부에 떠넘기고 세입도 보전하려고 추경 편성을 추진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허니문 기간을 인사 실패로 소진한 박근혜 정부가 안보위기와 함께 경제위기를 과장해 여론을 전환시키면서, 공약 실현과 가시적 경기회복을 보여줘야 하는 정권 초기의 정치적 압력을 돌파하기 위한 방안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정부는 세수 결손이 12조원 정도라고 말한다. 전년도 세계잉여금 중 가용재원이 3천억원 남짓이니 추경은 불가피해 보인다. 여기에 경기 진작을 위한 지출 확대를 꾀하려면 수조원은 더 필요할 것이다.
선거 기간 공약에 재정관료·학자들 매달려결국 재원 조달 방안이 문제인데 정부는 무턱대고 국채 발행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발언은 국가재정법 제1조 목적과 제16조 예산원칙에 명시된 것처럼, 예산 당국자들이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강변하고 있는 셈이다. 일단 경제정책을 책임지는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세수 추계의 오류에서 비롯된 추경 편성을 설파하기 전에 자기 잘못에 대한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예산 편성의 기초 자료를 제공해온 두 국책 연구기관의 직전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채 발행을 전제하고 추경을 편성하려는 무책임한 행태를 벗어나, 진지하게 다양한 재원 조달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세출 수요를 결정하고 세입 추계를 한 다음 세입·세출의 과부족을 근거로 세법을 개정해 균형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재정 운용의 기본이다. 만약 경기침체 등 단기적인 불가피한 요인으로 세수 증대가 어려울 경우 국채를 발행하거나 차입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처럼 국채 발행부터 결정하고 추경을 편성하는 것은, 국가 재정의 기본 재원인 조세에 대한 검토를 생략하는 중대한 직무유기 행태다.
정부가 국채 발행을 고집하는 이유를 모를 국민이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기간 중 많은 부분에서 야당과 유사한 공약을 제시했다. 그리고 방대한 재정 수요에 대한 재원 조달 방안으로, 지하경제 양성화로 탈루 세원을 발굴하고 방만한 재정지출 구조를 조정해 절약하는 매우 소극적인 방식을 제시했다. 여기에 ‘공약은 반드시 지킨다’는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가 재정관료들의 운신 폭을 없애버렸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러니 증세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조세연구원을 비롯해 관련 학회들마저 부가가치세 징수 방법의 변경이나 비과세 감면제도 정비를 통한 ‘증세 없는 세수 확보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국민은 낱말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증세 없는 세수 확보’ 방안은 없다. 다만 누구에게서 얼마만큼을 어떻게 징수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지금 추경 편성 논의가 시작된 국면에서 증세 논의를 하지 않고 국채 발행으로 안일하게 넘어간다면 그것은 재정위기의 책임을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위인 동시에, 사회 양극화 완화를 통해 중산층 70%를 재건한다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도 성공하기 어렵게 만든다.
위기관리는 국민이, 과실은 고소득층이?
재원 확보를 위해 증세를 주장하는 이유는 이렇다. 1997년 외환위기에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위기 국면에서 위기관리 재정의 부담은 언제나 서민 대중이 떠안았다. 종신고용·연공서열형이라는 한국형 고용 방식이 해체되고 구조조정의 빌미로 대부분의 노동자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다. 또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으로 조성된 부동산 거품은 서민 가계의 부채 누적으로 귀결되었다. 기업은 살찌고 노동자와 소비자는 가난해지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가계소득 분배는 줄어들고 기업 이윤과 내부유보만 늘어난 것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위기관리 비용은 늘 국민이 부담하고 그 과실은 소수 재벌 대기업과 부유한 계층의 몫이었다. 그래도 법인세율과 소득세율은 계속 낮아져왔다. 그런데 아직도 ‘증세를 하면 경기가 악화될지 모른다’는 잘못된 논리로 증세를 회피한다면 그것이 어찌 국민을 위한 정부겠는가. 외국 투기자본과 소수 재벌 기득권 부유계층의 도우미일 뿐이다. 법인세와 고소득층의 증세는 사회 통합을 위한 수단이자 곧 그들의 부 증식의 출발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명박 정부처럼 꽉 막힌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박근혜 정부의 유연성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 시작이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감세를 원위치시키는 증세 논의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이재은 경기대 경제학과 교수·전 한국재정학회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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