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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문재인·안철수 생각의 공통점은?

등록 2012-08-15 16:25 수정 2020-05-03 04:26

공통점을 찾았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경선 후보,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공약과 책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나 집단소송제도 등과 같이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제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 정책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적용 범위를 기술 탈취뿐 아니라 부당한 납품단가 인상, 납품대금 미지급, 물품 수령 거부 등 불공정거래 행위 전반으로 확대하고 손해배상액을 최고 10배로 상향 조정하겠다.”(문재인 후보의 ‘경제민주화 구상’에서)
“(재벌 개혁의 해법은) 재벌의 부당 내부거래와 같은 불공정거래, 편법 상속과 증여, 중소기업의 기술 인력 빼가기 등 모든 위법행위를 철저히 막는 거다. 공정거래법을 강화하고 징벌적 배상제, 내부고발자 보호 및 포상 등으로 고려할 수 있다.”(에서)

지난해 2월17일 국회에서 열린 하도급 거래 공정화를 위한 법률 개정안을 논의하는 당정회의에서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왼쪽)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그해 3월 국회는 여야 합의로 하도급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중소기업의 기술을 훔치는 대기업에 실제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 책임을 물리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처음으로 법제화했다.

지난해 2월17일 국회에서 열린 하도급 거래 공정화를 위한 법률 개정안을 논의하는 당정회의에서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왼쪽)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그해 3월 국회는 여야 합의로 하도급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중소기업의 기술을 훔치는 대기업에 실제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 책임을 물리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처음으로 법제화했다.

하도급법에 도입, 소송남발은 없어

세 사람 모두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얘기한다. 대기업-중소기업 간 공정거래를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2006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추진하다가 대기업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던 사실을 기억하면, 격세지감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란 말 그대로, 악의적 불법행위에 대해선 실제 손해액을 훨씬 웃도는 배상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말한다. 미국·영국·캐나다 등 주로 영미법 계열의 국가에서 시행되는데, 특히 미국에서는 민사책임 전반에 걸쳐 적용된다. 배상금은 실손해액의 2배부터 몇백 배까지 천차만별이다. 김행선 미국 변호사는 “대기업 등 경제적 강자의 횡포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1981년 핀토차 사건을 보자. 포드는 자동차 개발 과정에서 가솔린 탱크의 위치를 잘못 선정해 뒤쪽에서 충돌하면 화재 발생 위험이 크다는 걸 알았다. 생산 현장에서는 설계를 변경하자고 제안했지만 경영진은 많은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할 경우 손해배상액을 분석해보니, 설계 변경보다 저렴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재 사고가 발생해 13살 소년이 전신 화상을 입었다. 법원은 포드사에 350만달러의 실제 손해액과 1억2500만달러의 징벌적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한국에서는 2004년 8월 열린우리당이 언론 피해를 구제하려고 신문법에 도입하려 했고, 2006년에는 정부가 정보통신망법을 개정해 개인정보를 악용하는 경우에 적용하려 했다. 반대가 거세 사개추위 때처럼 없던 일이 됐다. 대표적인 반대자는 대기업이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행정적(과징금), 형사적(벌금) 조치가 중복될 경우 과잉금지 원칙에 어긋날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소송 남발의 우려 등 부작용이 예상된다”고, 법원은 “우리 법체계는 미국과 다르다”며 반대 의견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지난해 3월 국회는 ‘하도급법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하 하도급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중소기업의 기술을 훔치는 대기업에 실제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 책임을 물리도록 징벌적 손배배상제를 처음 법제화한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제도라는 사회적 욕구가 생겼다.

하도급법 시행 1년이 지난 현재, 반대자들이 우려하던 소송 남발은 없었다. 관련 제소가 없어 제도가 유명무실한 지경이다. 중소기업청이 2010년 설문조사한 내용을 보면, 대기업 협력사의 22.1%(204개 응답 업체 중 45개)가 거래 과정에서 겪는 주요 애로사항으로 보유 기술 정보를 제공하라는 대기업의 요구를 지적했고, 80% 정도는 보유 기술에 관한 정보 제공을 요구받을 경우 거래 대기업에 기술 자료를 제공하는데도 말이다.

같지만 다른 그들의 주장

기술을 빼앗기면서도 중소기업은 왜 침묵하는 것일까? 자신의 목줄을 죄고 있는 대기업과 거래 관계가 중단될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워서다. 특히 소송은 온전히 중소기업의 몫이다. ‘골리앗’ 대기업과 맞섰다가는 상처만 남기 맞춤하다. 전자부품 생산업체인 서오텔레콤 김성수 사장은 이동통신망을 이용한 비상호출 기술을 둘러싸고 LG텔레콤과 8년간 법정 소송을 했지만 패소했다.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수십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소송비용 청구서밖에 없었다.

기술 탈취에만 제한적으로 제도를 도입해서는 대기업의 횡포를 막을 수 없다. 무리한 납품단가 인하, 가격 담합,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소송비용 지원 등 중소기업 지원책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것이 박근혜 후보가 말하는 경제민주화 정책이다. 여당 내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의 간사인 김세연 의원은 “대기업의 부도덕한 행위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적용할 것”이라며 이달 안에 관련 법안을 발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배상금은 지금처럼 실제 손해액의 최대 3배로 제한하려고 한다.

문재인 후보가 내세우는 차별점은 배상금을 최대 10배로 상향 조정한다는 점이다. 에서 밝힌 문 후보의 말이다. “만약에 대기업의 횡포 때문에 중소기업이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면 그 기업은 이미 문을 닫았거나 사업 기회를 거의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적어도 실제 손해의 5∼10배는 되어야 실효성이 있을 것이다.”

안철수 원장은 한발 더 나아간다. 하도급법이나 공정거래법뿐 아니라 경제범죄로 제도를 확대하자는 주장이다. “머니게임과 화이트칼라 범죄 등에 대해 처벌 수준을 아주 많이 높이고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 머니게임하는 사람들은 경제학적으로 판단한다. 배상이 적어 ‘3, 4년만 징역을 살면 평생 먹을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범죄를 저지른다. 범죄행위를 통해서 벌 수 있는 돈보다 배상액이 훨씬 크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그래야 범죄자들에게 견제 효과가 생긴다.”(에서)

징벌적 손해배상법 제정이 바람직

노무현 정부 때 사개추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을 논의했던 김행선 변호사는 안철수 원장의 생각에 한 표를 던졌다. “배상금을 실제 손해액의 3배, 10배로 제한하면 대기업의 악의적 불법행위로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했는데 각 피해자의 피해 규모가 작을 경우, 사회적 철퇴를 내릴 수 없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93년 TXO 사건에서 526배 징벌 배상도 합헌으로 판단한 바 있다. 김 변호사는 “사개추위에서 논의했듯이 공정거래, 식품, 제조물책임, 환경, 보건, 정보통신망범죄, 언론, 노동, 증권거래 등 다른 영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사개추위 기획추진단장으로 활동했던 김선수 변호사는 징벌적 손배배상법을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민법상 손해배상제는 가해자의 고의와 과실을 구분하지 않고 피해자의 손해만 일률적으로 평가해 배상한다. 하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가해자의 위법행위를 처벌하고 억제하는 기능에 피해자가 참여하는 방식이다. 사회적 법치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정의가 구현된다.”

대선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또 차별적으로 공약한 징벌적 손배배상제, 그 제도의 현실화를 기다린다.

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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