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국가 소송제’(ISD)라는 무기를 들고 론스타가 돌아왔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는 지난 5월30일 보도자료를 내어 “한국 정부의 불법적 조처로 손실을 입었다”며 ISD를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ISD란 상대국 정부가 투자협정상 의무를 위반해 외국 투자자가 손실을 입었을 경우, 그 투자자가 정부를 상대로 국제중재를 청구하는 제도를 말한다. 지난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 비준 동의를 앞두고 ‘독소조항’이라는 비판이 일어 이명박 대통령이 재협상을 약속한 바로 그 제도다.
“벨기에 법인이므로 한국에 세금 낼 필요 없다”
론스타가 주장하는 손실은 두 가지다. 첫째, 국세청이 부과한 양도소득세가 ‘자의적이고 부당하다’는 것. 지난 2월 론스타는 하나금융지주에 외환은행의 주식을 팔아넘기고 3조9156억원을 받기로 했다. 이는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할 때 투자한 원금 2조1549억원을 웃돌 뿐 아니라, 지난 9년간 배당 등을 통해 회수한 2조9027억원까지 합치면 투자수익률이 239%에 이르렀다. 이에 국세청은 양도소득세로 주식양도가액의 10%인 3915억원을 원천징수하기로 했다. 하나금융은 이를 납부한 뒤 나머지 주식대금만 론스타에 건넸다.
하지만 론스타는 한국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 외환은행의 매각 주체는 벨기에 법인인 ‘LSF-KEB 홀딩스’인데, 벨기에와 한국은 조세조약(이중과세 방지협정)을 맺고 있어 벨기에 법인이 한국에 투자해 수익을 얻으면 벨기에가 과세권을 갖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해외 주식투자 소득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아 론스타는 어디에서도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다. 미국 텍사스주에 기반을 둔 론스타가 벨기에에 법인을 세워 한국에 우회 투자한 이유다. 론스타는 지난 5월9일 양도소득세 3915억원을 돌려달라는 경정청구서를 국세청에 냈다.
둘째 주장은 2006년 KB금융지주, 2007∼2008년 HSBC에 각각 외환은행 주식을 매각하려 했지만 한국 정부가 매각 승인을 늦춰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2007년 9월 론스타는 HSBC에 외환은행 지분 51%를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가격은 주당 1만8045원으로 총 5조9376억원이었다. 하지만 한국 금융 당국이 인수 승인을 1년 가까이 미뤘고 마침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져 HSBC가 2008년 9월 계약을 철회했다. 지난 2월 하나금융에서 외환은행의 주식 매각대금으로 3조9156억원을 받았으니까 배당소득 등을 제외하고 계산하면, 한국 정부의 늦장 승인 탓에 HSBC에 매각할 기회를 놓쳐 론스타가 2조22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내용을 담은 중재의향서를 론스타는 5월22일 주벨기에 한국대사관에 보냈다. 한국 정부가 위반했다는 협정은 1976년에 체결하고 2011년 3월에 개정한 한-벨기에 투자협정(BIT)이다. 이 협정은 국회 비준 동의 절차도 밟지 않고 발효됐다. 제8조를 보면, ‘투자자-국가 분쟁은 당사자가 서면으로 통보하며 그날로부터 6개월 이내에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절차에 회부된다’고 돼 있다. 론스타의 중재의향서 통보로 한국의 ‘ISD 1호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론스타도 5월30일 보도자료에서 투자협정이 규정한 6개월의 냉각 기간이 끝나는 오는 11월에 중재신청서를 ICSID에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만만 론스타, 중재 재판부 구성에 50% 영향력지난해 그토록 논란이 많았던 ISD 사건이 처음 접수됐는데도 한국 정부는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금융위원회가 석가탄신일인 지난 5월28일 오후 6시쯤에 ‘론스타가 우리 정부에 협의를 요청하는 문서를 전달했다’고만 밝힌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이 보도자료에는 ISD라는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ISD를 제기한 이유도 론스타가 이틀 뒤 발표한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 언론에 알려졌다. ISD 중재의향서를 접수하면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 곧바로 전문을 공개하는 미국이나 캐나다의 정부와 전혀 다른 대응이다.
론스타는 승소를 자신하고 있다. 존 크레이켄 론스타 회장은 “한국 및 해외 법률가들과 상의했고, ISD 청구가 설득력 있다는 조언을 받았다”며 “공정한 중재 패널로 구성된 ICSID에서 한국 정부가 (론스타) 투자자들의 피해를 배상하도록 하는 판정을 내릴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자신만만한 이유는 국제중재에서 외국 투자자들이 더 우호적인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우선 중재인은 법관 같은 ‘공적 신분’이 아니다. 그래서 분쟁 당사자가 각 1명씩 선정하고 의장을 맡을 제3의 중재인만 양쪽이 합의해 뽑는다. 론스타가 중재 사건을 맡을 재판부를 구성하는 데 50%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셈이다. 한국 법원에서는 절대로 행사할 수 없는 권리다.
뒤집어 말하면, 한국 정부의 조세·금융 정책을 무력화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재판부의 최소한 절반이 다국적기업의 변호사로 주로 일하며, 미국법의 영향을 많이 받는 해외 법률가로 채워진다는 얘기다. 실제로 ICSID에서 중재인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미국인은 지난해 12월까지 144명에 달하지만 한국인은 1명도 없었다.
또한 중재인들은 행정소송을 다루는 한국 법관들처럼 국가정책의 정당성이나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다. 상대국 정부의 어떤 조처로 인해 투자자의 자산 가치가 감소했고, 그것이 투자협정 위반이라면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한국 법원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희박한 론스타의 처지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카드다.
앞서 2004년 12월 서울 강남 스타타워빌딩(강남파이낸스센터) 주식을 매각한 뒤에도 론스타는 양도소득세와 법인세를 내지 않으려고 한국 법원에 행정소송을 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1월 벨기에 법인은 론스타가 조세회피 목적으로 세운 페이퍼컴퍼니에 불과해 한-벨기에 조세조약을 적용할 수 없다고 최종 판결했다. 국세청이 론스타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대법원 판결을 ISD를 통해 뒤집겠다는 게 론스타의 목표다.
승소해도 치를 비용 최소 200만달러
하지만 한국 정부의 처지에서는 패소하면 조세·금융 정책과 대법원 판결이 무력화되고, 승소하더라도 고액의 중재·법률 비용을 국민 세금으로 부담해야 할 상황이다. ICSID가 중재인 수당만 하루에 3천달러(약 350만원)로 책정하고 사건이 최소한 2∼3년 진행되는 탓에 중재 비용만 50만~100만달러 필요하다. 여기에다 변호사 선임 비용을 더하면 ISD 관련 법률 비용은 200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실제로 미국 기업 포프앤탤벗이 1999년 12월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낸 중재 청구에서는 손해배상금이 46만달러에 그쳤지만 사건이 4년이나 진행된 탓에 법률 비용은 760만달러나 들었다.
론스타는 잃을 것 없는, 한국 정부는 잃을 것밖에 없는 ISD 전투가 시작됐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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