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하루 앞둔 4월10일 고용노동부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김아무개(36)씨에 대해 처음으로 산업재해로 인정했다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김씨는 충남 아산시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재생불량성빈혈(무형성빈혈)에 걸려 지난해 4월 산재 신청을 했다. 비록 당사자가 근로복지공단에서 정식 통지서를 받기도 전에 정부가 서둘러 발표해 총선 뉴스에 묻혔지만 반가운 소식이다.
악성빈혈 진단받고 회사 그만둬
김씨는 고교 3학년이던 1993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999년까지 5년5개월 동안 일했다. 처음에는 반도체칩을 납으로 도금하는 일을 하다 납중독 진단을 받았다. 회사는 별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불안해 다른 공정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해 바로 옆 공정으로 갔다. 반도체칩에 전기를 연결하는 지네발 모양의 ‘리드’를 붙이고, 플라스틱 껍질 위에 제품 정보를 인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바뀐 공정에서도 여전히 새 화학물질을 사용했다. 회사는 화학물질 성분이나 유해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반도체칩에 플라스틱 수지를 씌우는 몰드 공정을 거쳐 넘어온 반도체는 뜨거운 열기와 역겨운 냄새를 내뿜었다. 김씨는 일하는 내내 유해물질을 막기에는 모자란 면장갑과 모자를 착용했다. 화학물질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하는 마스크는 없었다. 그렇게 일한 지 1년 만에 악성빈혈 진단을 받았다. 사내 의사의 진찰을 받고 철분약과 비타민을 먹기 시작했다. 일 때문에 생긴 질병일 수 있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힘겹게 일하다 1999년 체력이 떨어져 퇴사했다. 일을 그만둔 뒤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빈혈은 계속됐다. 결국 2005년에 재생불량성빈혈 진단을 받았다. 골수 기능이 망가져 몸이 혈액 성분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암과 다름없는 중증 질환이다. 새 골수를 이식하지 않는 한 낫지 않는다. 그런 김씨가 지난해 4월 산재 신청을 한 지 1년 만에 산재 인정을 받았다. 다행히 향후 치료와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보상은 받을 수 있게 됐다.
여전히 산재 인정을 기다리는 삼성 출신 노동자가 많다. 김씨가 인정받은 첫 산재가 온전히 의미를 지니려면 그동안 정부가 산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온 유사 피해자들에 대한 대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김씨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공정 혹은 옆 공정에서 일했으나 산재 인정을 거부당한 이들이 있다. 김옥이씨는 백혈병에, 송창호씨는 악성림프종에 걸렸다. 모두 김씨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일을 하다 재생불량성빈혈과 같은 계통의 암에 걸렸다. 유명화씨와 이윤정씨도 김씨가 일한 공정 바로 다음 공정에서 일하다 각각 재생불량성빈혈과 뇌암에 시달리고 있다. 모두 산재 보상을 청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들은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삼성, 가족 회유에 작업정보 제공 거부
2007년부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삼성전자 반도체 및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에서 병에 걸린 노동자 21명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보상을 청구했다. 이 가운데 이번에 산재를 인정받은 김씨를 제외한 19명은 모두 거부당했고, 1명은 아직 심사 중이다. 거부당한 19명 가운데 이미 숨진 황유미·이숙영씨는 정부가 산재를 인정하지 않아 행정소송을 제기해 법원에서 지난해 산재를 인정받았다. 정부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다.
산재보험제도는 일하다가 병에 걸린 노동자의 생계와 치료를 최소한이라도 보장하려고 마련한 제도다. 하지만 정부 기관은 그 최소한의 보장조차 못하겠다며 항소했다. 산재보험제도의 법적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처사다. 소송을 통해 질병을 인정받는 긴 과정 동안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힘들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피해자들이 법적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정부의 태도가 바뀌어야만 한다.
삼성도 변해야 한다. 그동안 삼성은 작업환경으로 인해 건강과 생명을 잃고 고통받아온 노동자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에게 돈을 제안하는 등 산재 신청을 포기하라고 회유했다. 산재를 신청하려는 노동자에게 기업의 영업비밀을 이유로 필요한 작업환경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2010년 미국 산업보건 컨설팅회사 인바이런을 통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조사하도록 해 백혈병 발병이 업무와 관련 없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공개하지 않았다. 인바이런은 과거 미국에서 담배회사를 위해 “간접흡연이 폐암과 연관돼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화학산업의 의뢰를 받아 “낮은 농도의 발암물질이 암을 일으킨다고 확정할 수 없다”는 연구를 수행하는 등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한 전례가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6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 뒷면에는 직업병으로 쓰러지고 죽어가는 젊은 노동자들의 한숨과 눈물이 감추어져 있다. 지난 1월 환경단체인 그린피스와 스위스 시민단체 ‘베른선언’이 세계 최악의 기업을 선정하는 ‘공공의 눈’(Public Eye) 온라인 투표에서 삼성전자가 3위를 차지했다. 이 부끄러운 사실이 한국을 넘어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지고 있는 셈이다. 삼성은 이제라도 직업병 불인정에 대한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비판에 귀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삼성이 내세우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태도다.
사후약방문이 되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야
끝으로 노동자의 인권과 생명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강력히 규제할 필요가 있다. 작업환경에 대한 노동자의 알 권리나 참여할 권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보장돼야 하고, 이를 보장하지 않거나 억압하는 기업에는 매서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또 예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산재가 반복되는 기업에는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노동자가 줄줄이 죽어나가도 책임지는 이가 없고, 죽어가는 이유도 모른 채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는 현실은 바뀌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미 병에 걸리고 죽어간 이들에게 산재보험으로 보상해주는 것은 영원히 사후약방문일 수밖에 없다.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직업환경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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