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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닥치고 분사해라?

삼성전자 LCD사업부, ‘3시간 분사 설명회’ 뒤 전직 동의서 받아… 분사 거부한 직원은 징계위 회부
등록 2012-03-22 14:09 수정 2020-05-03 04:26

“동의서를 안 써도 파견 형식으로 여기서 일할 수밖에 없도록 할 것이다.”
삼성전자 홍아무개(34) 선임이 회사 간부와 면담하면서 들은 얘기다. ‘여기서’는 삼성전자가 자회사로 새로 만들 ‘삼성디스플레이’다. 삼성전자 이사회는 지난 2월20일 액정표시장치(LCD) 사업부를 분할해 자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홍 선임은 삼성전자를 퇴사하고 자회사에 재입사하라는 회사의 지시를 거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월부터 수차례 회사 간부들과 면담을 했다.

삼성전자의 홍아무개 선임(왼쪽)이 회사 쪽 LCD 사업부문의 분할 결정에 대한 부당함을 <한겨레21>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삼성전자의 홍아무개 선임(왼쪽)이 회사 쪽 LCD 사업부문의 분할 결정에 대한 부당함을 <한겨레21>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분사 뒤 합병 수순, 퇴출 가능성 높아

삼성전자의 자회사 설립 계획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이사회 결정이 난 다음날부터 1만7천여 명에 이르는 LCD 사업부문 노동자에게 전직 동의서를 받았다. 설명회는 세 차례 열렸다. 삼성전자 박동건 부사장이 충남 탕정공장의 대강당에서 300여 명을 상대로 설명회를 열었다. 나머지 노동자들은 사내 TV로 지켜봤다. LCD 사업부문의 팀장과 그룹장이 다시 소속 직원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한 번씩 열었다. 3월16일 주주총회에서 자회사 설립 안건은 통과됐다.

하지만 회사 쪽 설명이 부족했고 형평성에도 맞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 선임은 설명회에 대해 “삼성전자를 보고 입사한 사람들에게 총 3시간의 설명이 전부였다”며 “적자가 너무 심해 분사를 하는 건데도 ‘더 좋은 회사를 만들려고 그러는 거’라고 설명했다”라고 말했다.

적자 사업부문을 떼내면 삼성전자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위험에 내몰릴 수 있다. 삼성은 새로 만들 삼성디스플레이와 기존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의 합병을 검토 중이다. 업계에서는 올해 안에 한 몸이 되리라 내다본다. 그럴 경우 두 회사 간에 중첩된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TV와 휴대전화 등의 화면이 LCD에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 옮아가는 추세여서 퇴출되는 쪽은 삼성전자 LCD 부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사정이 이런데도 대부분의 직원이 동의서를 제출했다. 삼성전자 쪽은 “직원들이 새 회사의 비전에 공감했기 때문에 높은 동의율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회사의 강요와 노조가 없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나온다. 홍 선임은 “생산라인에서 3교대로 일하는 직원 1만여 명은 동의서를 제출하고 퇴근하라는 말에 동의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며 “노동자들의 의견을 대변할 노조가 없어 반발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자메시지로 분사에 항의하는 ‘엄지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홍 선임이 지난 3월14일 동료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가 다시 다른 직원들에게 전파되고 있다. 문자메시지에는 ‘지난달 전직 동의서 서명 과정에서 개인의 의견과 선택할 권리는 무시당했다. 경영진은 사과하고 △전직자에게 위로금 지급 △희망퇴직 접수 △잔류 희망자에 대한 전사 공모 등을 요청하자’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우리가 슬펐다’

문자메시지는 3월16일 현재 수천 명에게 전달됐다. 상당수 직원들은 ‘동료들을 대신해 입이 돼준 것에 박수쳐주고 싶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우리의 모습이 너무 슬펐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회사는 홍 선임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3월15일 통보했다. 이에 대해 홍 선임은 “2004년 탕정공장에 입사해 한 달에 28~29일을 아침 8시에 출근해 밤 11~12시까지 일하다 폐결핵에 걸렸다”며 “다른 직원들도 비슷한 처지다. 헌신하며 일한 회사에서 이런 식으로 쫓겨나는 것에 이런 방식으로라도 저항하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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