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카드사만 좋은 ‘신용사회’

카드 거부 못하는 가맹점 두고 수수료 할인 필요 못 느낀 카드사들… 카드사 우위의 구조가 낳은 수수료 인하 요구
등록 2011-10-28 13:26 수정 2020-05-03 04:26
식당 사장님들이 신용카드의 수수료율 인하를 요구하며 나섰다. 지난 10월18일 오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범외식인 10만인 결의대회’에서 참가자 한 명이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식당 사장님들이 신용카드의 수수료율 인하를 요구하며 나섰다. 지난 10월18일 오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범외식인 10만인 결의대회’에서 참가자 한 명이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이 지난 10월19일 카드 수수료 인하 압박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며 든 비유가 재미있었다. “젖소 목장이 있는데, 우유 판매는 적자라서 소 사고파는 일이 주업이 되었다. 그런데 소 장사로 돈을 버니 우윳값을 더 낮추란다.”

법 때문에 억지로 받는 카드

‘우유 판매’는 카드사의 본업에 해당하는 ‘신용 판매에 따른 가맹점 수수료 취득’, ‘소 장사’는 카드론 등 부업인 ‘대출 사업’을 뜻한다. 정 사장의 비유는 더 이어졌다. “신용카드사 처지를 목장에 비유해봤는데, 우유 배달에서 매일 1드럼을 사는 곳보다 1병을 사는 곳의 우윳값이 비싸긴 하다. 하지만 1병 배달은 지금도 대부분 손해인데 우윳값을 1드럼 사는 곳과 같이 하란다.”

현대카드 또한 다른 카드사들과 마찬가지로 중소 상인들의 아우성과 금융감독 당국의 압박에 따라 이틀 전인 17일 중소 가맹점 수수료율을 2%대 초반에서 1.8%로 낮추고, 중소 가맹점 범위를 연매출 1억2천만원 미만에서 2억원 미만으로 넓히겠다고 밝힌 뒤끝이었다.

정 사장의 비유는 업종별로 카드 수수료율을 달리 적용하는 이유를 쉽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카드로 식당에서 1만원짜리 밥을 스무 번 사먹거나 백화점에서 20만원짜리 옷 한 벌을 구입하거나 똑같은 액수의 돈이지만, 카드사 처지에선 결제 건당 비용이 들기 때문에 백화점 같은 업종에 상대적으로 낮은 수수료율을 적용한다는 건 일리가 있다. 음식점에 대한 카드 수수료율은 최고 2.7~2.8%, 백화점 업종에 대한 수수료는 통상 1.5% 수준이다. 이른바 ‘규모의 경제’다. 골목 시장에서 채소를 묶음으로 사면 낱개로 살 때보다 싸게 쳐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카드 수수료를 더 낮추라는 요구는 이런 상식적인 논리를 넘어선 무리수일까?

목장의 비유를 더 확장시켜보자. 각 가정이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데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우유를 배달시켜 먹고 있다면 어떨까? 우유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데다, 우윳값 결정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처지라면 비싸다고 느끼지 않을까?

국내 카드시장이 꼭 이런 모습이다. 음식점 같은 가맹점들은 여신전문금융업법(19조 1항)에 따라 신용카드 결제를 거부할 수 없게 돼 있다. 고객의 요구를 거부하면 처벌을 받는다. 우유(카드) 말고, 주스(현금)를 마실 수 있는 선택권이 사실상 없다. 이를 일부 완화하려고 1만원 미만 매출에 대해선 카드 결제를 거부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금융위원회에서 추진하다가 소비자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여론에 밀려 무산됐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우윳값(가맹점 수수료)이 비싸다는 아우성을 상식적인 시장논리의 무시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각 가정의 식구들 취향이 다양해 어떤 사람은 ‘서울목장’ 우유를, 또 어떤 이는 ‘매일목장’이나 ’남양목장’ 우유를 더 좋아하는 경우다. 살림살이를 맡는 주부는 모든 목장에 연락해 따로 배달을 시켜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유명무실한 가맹점 결제 공동망

카드시장에 비유하면 식구들은 소비자(카드 회원)다. 음식점 같은 신용카드 가맹점들은 통상적으로 신한·현대·삼성 등 모든 신용카드사들과 계약을 맺는다. 각각 다른 카드를 들고 있는 고객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카드사 처지에선 가맹점을 대상으로 수수료를 낮게 제시하는 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한 카드사와만 계약을 맺어도 결제되도록 공동망이 구축돼 있지만, 카드사로부터 대금을 받는 데 시일이 오래 걸리고 매출 전표를 전자 방식이 아닌 ‘실물’로 제출해야 하는 가맹점 쪽의 불편 탓에 유명무실한 상태다. 가맹점 공동 이용망 활성화는 카드업계의 기득권 유지에 불리하다. 우유 선택권과 식구들의 취향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목장을 둘러싸고 주기적으로 터져나오는 우윳값 소동을 피할 수 없다.

김영배 기자 한겨레 경제부 kimyb@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