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따르릉.”
이 이윤재 피죤 회장의 비리를 처음 보도(870호 줌인 ‘피죤, CEO와 노동자의 무덤?’ 참조)한 직후인 지난 7월 중순. 피죤의 관할 세무서인 북인천세무서에서 피죤 쪽으로 전화가 걸려왔다(인천시에는 피죤의 부평공장이 있다). “(우리는) 별 탈 없겠죠?” 피죤 회장 일가의 비리 보도에 세무서 직원들은 안위를 걱정한 것일까?
“명절·연말이면 으레 인사를 해야지”
이 단독 입수한 올해 1월20일자 피죤의 내부 지출결의서와 메모지를 보면 그 비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세무서장 100만원, 법인세 과장 50만원, 법인세 계장 30만원, 조사관 30만원, 기타 10만원.’ 서류에는 모두 220만원을 세무서 간부들에게 지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고, 결재란에는 이 회장의 딸인 이주연 부회장이 서명했다. 피죤의 한 전직 간부는 “회사 간부들이 지난 2월16일 저녁 인천시 계양구 북인천세무서 인근 고깃집에서 세무서 간부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며 (결제 내용대로) ‘인사’(금품 제공을 의미)를 했다”고 말했다. 이윤재 회장에 의해 지난 6월 취임 4개월 만에 해임된 뒤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가 조폭들에게 청부폭행을 당한 이은욱 전 피죤 사장도 “(이 부회장의) 결재 사실을 (직원으로부터) 전해들었다”고 확인했다.
피죤이 관할 세무서 간부들에게 금품 제공과 접대를 한 것은 지난 2월 한 번만이 아니라 오래된 관행이라는 의혹이 함께 제기된다. 피죤의 한 간부는 “이윤재 회장이 올 초에 ‘명절이나 연말이 되면 (세무서를) 찾아가서 으레 인사를 해야지, 여지껏 뭐하고 있느냐’며 관련 부서 임직원을 질책했다”고 전했다. 피죤이 연말·연초나 명절 때 세무서 간부들을 상대로 금품 제공과 접대를 상습적으로 해왔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피죤의 또 다른 간부는 “세무서 간부들과의 만남은 원래 설날 이전인 1월에 갖고자 했는데, 그쪽 요청에 따라 2월로 미뤄진 것”이라며 “설날을 앞두고 만나면 정부의 암행 감찰에 적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세청이 제정한 ‘국세공무원행동강령’을 보면, 직무 관련자로부터 금전·선물·향응 등은 일절 받을 수 없고 이를 위반하면 징계를 받는다. 북인천세무서 관계자는 피죤의 뇌물 로비 의혹에 대해 “기업인들과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피죤과의 식사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죤이 이윤재 회장 부녀의 지시로 금품 로비를 한 의혹이 제기되는 정부기관은 국세청뿐이 아니다. 경찰·고용노동부 등 회사 비리와 관련된 다수의 정부기관을 상대로 피죤이 전방위 뇌물 로비를 벌였다는 제보가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쏟아졌다.
“설마 경찰서 안에서 돈봉투를 놓고 갈 줄은 몰랐죠.” 경남 양산경찰서의 ㅈ 형사는 지난해 12월 말 자신이 겪은 ‘황당한 경험’에 관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피죤은 지난해 10월 말 부산경남지점에서 제품을 몰래 빼돌려 횡령한 혐의가 드러나자, 관련 직원 4명을 양산경찰서와 금정경찰서에 각각 고소했다. “피죤의 ㄱ 상무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자꾸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는 거예요. 낌새가 좀 이상했죠. 그래서 거절하고 사무실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경찰서로 찾아온 ㄱ 상무는 사건 처리에 대한 부탁과 함께 업무에 활용하라며 회사 수첩을 놓고 갔다. 하지만 그 속에는 두툼한 봉투가 들어 있었다. “돈봉투라고 직감하고 바로 경찰서 내 청문감사실에 신고했습니다.” 그의 예감처럼 봉투 속에는 5만원권 지폐 60장(300만원)이 들어 있었다. 피죤의 한 간부는 “이윤재 회장의 지시를 받고 ㄱ 상무가 담당 형사에게 금품 로비를 한 것”이라며 “ㄱ 상무는 금정경찰서의 ㅅ 형사에게도 금품 로비를 시도했으나, 당사자의 거부로 실패했다”고 말했다.
사건 무마 위해 경찰 출신 고용
양산경찰서는 피죤이 고소인 자격이고 단순한 감사 표시라는 이유로, 입건도 하지 않고 돈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사건 조사 초기 단계에서 돈을 준 것은 감사의 뜻보다는 사건 처리를 유리하게 해달라는 뇌물의 성격이 짙다고 볼 수 있다. 경찰은 음주단속이나 교통사고 같은 단순사건의 피의자가 소액의 금품을 건넨 경우에도 뇌물공여 의사표시로 입건해 벌금형에 처하곤 한다. 피죤의 한 간부는 “당시 이윤재 회장은 (돈봉투) 사건 무마를 위해 경찰 출신들을 임시 고용했다”고 전한다. 이 회장은 평소에도 경찰 출신에게 직원들의 뒷조사를 맡기는 등 이들을 자주 활용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지난 9월5일 이은욱 전 사장에 대한 청부폭력 사건이 발생한 뒤 자신에게 경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담당 변호인을 갑자기 기존 법무법인 세종에서 김앤장으로 바꾸었다. 김앤장의 피죤 담당 변호인 중에는 경찰 간부 출신인 강승수 변호사가 포함돼 있다. 강 변호사는 지난해 주 상하이 총영사관 영사들과 중국 여성의 추문 사건이 터졌을 때 치안영사로 근무할 당시 문제의 중국 여성과 찍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돼 논란이 일었던 인물이다.
피죤이 고용노동부에 금품 로비를 한 의혹도 제기됐다. 지난 4월 피죤의 마케팅 담당 임원으로 일하다 해임된 ㄱ 상무로부터 이윤재 회장 앞으로 우편물이 배달됐다. 피죤의 한 간부는 “우편물에 회사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발칵 뒤집혔다”며 “그중에는 지난해 말 ㅅ 부사장과 ㄱ 상무가 고용노동부 서울강남지청의 ㄱ 근로감독권에게 식사 대접을 하며 200만원의 금품을 제공한 것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죤 임원도 “이주연 부회장이 올해 초 ‘해도 바뀌었으니 (서울강남지청에) 찾아가서 인사를 하라’고 임직원에게 지시했다”며 “이윤재 회장의 직원에 대한 폭행과 폭언, 부당 해고와 전보, 노조 탄압 등과 같은 부당노동행위의 빈발로 노동부에 고소·진정 사건이 끊이지 않자 회사 임직원들이 근로감독관을 자주 접촉해 선처를 부탁하며 금품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에는 피죤의 ㄱ 구매팀장, ㅇ 자금팀장, ㄴ 인사팀장 등이 이 회장으로부터 강제 해고와 폭행을 당한 뒤 서울강남지청과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잇달아 고소·진정·구제 신청을 접수시킨 상황이었다. 당시 피죤 사건을 담당한 ㄱ 근로감독관은 금품 제공 의혹에 대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는 피죤 임원들과 따로 만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화하고 특혜 준 국세청·노동부
피죤이 언론·검찰 등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피죤의 한 임원은 “이 회장이 언론에 자신을 미화하는 기사가 실리도록 하려고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고, 검찰을 상대로도 로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회사 안에서 끊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피죤 간부는 “이 회장이 매달 임원실 여직원을 시켜 5만원권으로 현금 300만원씩 회삿돈을 정기적으로 빼간 것은 로비용이었을 것”이라며 “이 회장이 이와 별도로 회사에서 수시로 빼낸 현금과 상품권 중에서도 일부가 로비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 예로 이 회장은 지난 1월 한 달 동안만 2억6780만원의 회삿돈을 빼냈는데, 이 중 현금은 12차례에 걸쳐 2억6260만원이었고, 상품권은 8차례에 걸쳐 520만원이었다. 은 이런 뇌물 로비 의혹에 대한 의견을 들으려고 피죤에 수차례 연락을 취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
피죤이 금품 로비를 벌인 국세청·경찰·노동부·언론·검찰 등의 공통점은 이윤재 회장 일가나 회사의 비리를 감시·처벌해야 하는 직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국세청은 회삿돈 횡령과 분식회계, 탈세를 적발하는 기관이다. 경찰은 이 회장의 임직원 폭행 사건을 다루는 곳이다. 노동부는 부당 해고와 전보, 폭행, 폭언, 노조 탄압 등의 부당노동행위를 처리하는 기관이다. 언론은 피죤 같은 기업 비리를 감시·견제하는 구실을 한다. 피죤의 수많은 비리가 지난 30여 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관들과의 깊은 유착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함께 제기되는 까닭이다. 피죤의 한 전직 임원은 “피죤 임직원들의 지난해 이직률이 80%에 이를 정도로 극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관련 업계에 비리 소문이 무성했는데도, 국세청·경찰·검찰·노동부 등과 같은 국가기관들이 수십 년간 몰랐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피죤으로부터 금품 로비를 받은 의혹이 제기되는 국가기관들의 행태도 의혹을 살 만하다. 국세청이 관할 북인천세무서의 추천을 받아 2009년 이윤재 회장을 모범납세자로 선정해, 3년간 세무조사 면제 혜택을 준 게 대표적 사례다. 북인천세무서의 임영호 법인세과장은 모범납세자 선정 이유를 묻자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임직원들에게 폭행과 폭언, 부당 해고를 일삼고 노조 탄압을 노골적으로 벌인 피죤을 2005년 ‘노사문화우수기업’으로 선정한 노동부도 사정이 크게 다를 바 없다. 피죤의 부당 해고, 전보 등과 관련해 2008년 이후 3년간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접수된 피죤 직원들의 구제 신청 건수는 모두 7건에 달한다. 고용노동부 강남지청에도 지난해 하반기에만 이윤재 회장의 불법행위와 관련해 3건의 진정 또는 고소가 접수됐다. 그런데 노사관계가 최악인 골칫거리 사업장 피죤을 노동부가 특별감독하기는커녕 큰 상을 준 것이다.
전혀 반성없는 이윤재 회장
이런 사정 탓에 청와대·검찰·국세청이 피죤 비리가 세상에 드러난 지 석 달이 넘도록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도 피죤과의 유착 때문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이 끊이지 않는다. 더욱이 청와대와 국세청은 피죤 직원으로부터 구체적인 증거자료가 첨부된 진정서까지 접수하고도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피죤 비리 진정과 관련해 청와대로부터 이첩된 것이 없다”며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검찰이 이 시점에서 별도로 나서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 수사는 이윤재 회장의 청부폭력 혐의에 국한된 것인 만큼 피죤 사태의 몸통인 기업주와 회사의 비리 혐의에 대해서는 검찰이 직접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수사 계획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는 원론적 답변만 반복했다. 한상대 신임 검찰총장이 지난 9월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부정부패와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며 공정사회 구현 의지를 강조한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다.
피죤 비리에 관한 진정서를 접수한 국세청도 서류 분석을 진작에 마치고도, 현장조사를 수반하는 정식 조사에 착수할 기미가 없다. 관할 중부지방국세청 관계자는 “(진정인이 있는) 민원 사건이라 꼭 처리한다”면서도 “현재 처리 중인 다른 조사 때문에 피죤에 대한 세무조사는 아무리 빨라도 6개월 이상 걸린다”고 말했다. 조세전문가들은 “탈세 규모, 조세 제척 기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조사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절차를 무조건 탓할 수는 없지만, 조사 시점이 늦어질수록 탈세 확인을 위한 증거 확보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이윤재 회장은 돈으로 조직폭력배를 사서 이은욱 전 사장을 청부폭행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황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죤의 한 임원은 “이 회장은 본인이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이 회장이 오랜 거래관계가 있는 ㅈ건설로부터 임원을 영입한 것은 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ㅈ건설은 이 회장과 짜고 2009년 진천공장 등의 노후시설 리모델링 공사 계약을 허위로 체결했던 기업이다. 이 회장은 빼돌린 공사비 중 일부로 톈진에 있는 중국 공장의 리모델링 공사를 하려고 ㅈ건설과 이중계약까지 맺었다. 이윤재 회장의 고문 변호사는 “이 회장이 10월17일 오후 영장심사를 받을 때 피죤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경영 일선 퇴진과 전문경영인 영입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피죤의 이윤재 회장과 이은욱 전 사장 등이 지난 10월12일 쌍방이 제기한 민사소송을 즉각 취하하기로 전격 합의함에 따라 향후 청부폭력 수사 및 피죤의 경영 정상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이 전 사장의 담당 변호인인 법무법인 화우는 “피죤이 영업비밀 침해 혐의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과, 이 전 사장 등이 제기한 부당 해고 무효 및 손해배상 소송을 모두 취하하고, 2년의 임원 계약 기간을 어기고 해고한 것에 대해 배상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 전 사장과 함께 피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김용호 전 상무는 합의 배경에 대해 “피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십억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청부폭력 사건 이후 가족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했다”며 “큰 권력, 거대한 자금을 가진 조직에 개인이 대항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청부폭력 교사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윤재 회장은 10월17일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피해자들과의 합의가 구속 수사를 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피죤 쪽에서는 “이 회장이 단순폭행이 아닌 청부폭행으로 죄질이 안 좋은 만큼 아예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만, 피해자와 보상에 합의한 만큼 구속영장 발부 여부와 재판 결과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가 나오고 있다.
서울인베스트, 피죤 개혁 나설 뜻 비춰
피죤 정상화는 이윤재 회장과 이은욱 전 사장 간의 합의와는 별개 문제다. 그동안 부당 해고, 구타, 욕설 같은 대주주 일가의 인간경시경영에 시달려온 300여 종업원들의 고용안정이 이뤄지고, 회삿돈과 개인돈을 구분하지 못한 채 횡령, 비자금 조성, 분식회계, 탈세를 자행해온 전근대적 경영이 근절될 때 피죤의 진정한 정상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피죤 비리의 척결을 공권력이 계속 외면할 경우 민간 시장이 피죤의 지배구조 개선과 기업 가치 제고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서울인베스트의 박인배 대표는 “피죤 사태는 법과 주주, 임직원 등 그 누구로부터도 견제받지 않는 최대 주주 겸 경영자의 일탈과 불법 경영이 초래할 수 있는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며 “피죤 사태를 계속 예의주시하며 피죤 개혁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인베스트는 기업 구조조정과 지배구조 개선의 전문투자회사로, 지난해 태광그룹의 불법 상속·증여, 비자금 조성, 횡령 의혹을 제기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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