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아무개(69)씨는 아파트 관리소장이었다. 가족은 성실한 장씨를 존경했다. 잘산다고 떠벌릴 정도는 아니지만 돈이 없어 눈치를 볼 정도도 아니었다.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다만 개인적인 노후대책은 예금이자가 전부였다. 평생 모은 돈에 퇴직금을 더해 부산저축은행을 찾았다. 자신과 부인 명의로 5천만원, 7천만원을 나눠 예금했다. 저축은행과 일반은행을 구분하지 못했다. 십수 년 동안 거래해온 은행이니 믿었다.
장애인 아들한테 줄 돈인데…장씨는 지난 2월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 소식을 당일에 들었다. 한 달을 몸져누웠다. 농성장이 꾸려지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5천만원까지 보상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자를 포함해 2천여만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게 억울했다. 장씨는 부산저축은행 초량본점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점거농성을 나갔다. 이웃들은 장씨를 말렸다. 한뎃잠을 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다 몇 년 전 받은 대장암 수술의 경과도 더 지켜봐야 했다. 장씨는 “그래도 그 정도면 많은 손해는 아니니 건강부터 챙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만류에 주춤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로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결국 농성장으로 향하곤 했다.
장씨가 그 돈에 매달린 이유는 노후대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 아들한테 줄 돈이니까. 아들 목숨이 달린 돈이니까.” 장씨가 늘 해오던 말이었다. 장씨의 첫째아들은 정신지체 1급 장애인이다. 지난 4월 부인 강아무개(66)씨마저 허리를 다쳐 수술대에 올랐다. 부인에게 장씨는 “있는 사람들한테는 2천만원이 우습겠지만 아들의 평생을 책임질 돈을 날리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장씨는 부인의 간호를 동생에게 맡겼다.
장씨가 결정적으로 건강을 해친 것은 지난 7월27일부터 2박3일 동안 국회 노숙농성을 한 뒤다. 감기몸살로 병원을 찾았다가 증세가 급격히 나빠져서 결국 병원 문을 나서지 못했다. 병원에 들어온 지 19일, 지난 8월16일 그는 숨을 거뒀다. 점거농성 100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신경성 급성폐렴.’ 부인은 장씨가 병상에서 한 말을 되뇌었다. “퇴원하면 조그만 자동차 사서 좋은 데 놀러가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자고 했는데….”
김옥주 부산저축은행 피해자 비상대책위원장은 “장씨처럼 농성에 지쳐 입원해 있는 노령의 피해자가 3명이다. 모두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이들이 예금이자로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원금마저 잠식당하고 있다.
하지만 대책은 오리무중이다. 지난 부산저축은행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해 5천만원 이상 개인 예금주와 후순위채 투자자까지 피해를 보전해주기로 합의했다. 개인 예금은 6천만원까지, 후순위채는 1천만원까지 원금 전액을 보전해주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차등 비율로 적용해 보상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즉각적인 반대 여론에 의해 좌초됐다. 형평성 문제와 정부 재정 악화가 주된 이유였다. 당시 대통령 거부권 행사 가능성까지 논의됐을 만큼 진통은 컸다.
눈치보는 국회, 무책임한 정부최근 허태열 국회 정무위원장의 방안이 논의 중이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보상 비율을 정해 먼저 보상하자는 원래의 안을 수정해, 보상 비율을 확정하지 않고 ‘선 심의, 후 보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보상을 위해 예금보험공사에 부실저축은행 피해자 보상기금을 설치하도록 하고, 기금은 부실 관련자의 과징금과 과태료, 벌금 납입액과 정부의 출연금 등으로 조성하도록 했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해 예금보험공사에 보상심의위를 두도록 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다만 보상 대상은 2008년 9월12일부터 법 시행일 전까지 부실금융기관이 된 상호저축은행 피해자로 한정했다. 부실에 책임이 있는 관련자는 제외했다. 후순위채권 보상은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 결정이나 법원의 조정·판결 등에 의해 불완전판매로 확정된 경우로 한정했다. 보상 비율에 대해서는 상·하한선을 정하지 않았고, 부실저축은행별 배당률이 평균에 미달하는 피해자에게는 보상금을 추가 지급하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이 법의 시행 뒤 6개월 이내에 보상심의위에 신청하면 심의를 거쳐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다.
반대 여론은 여전하다. 시스템 안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형평성의 문제는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은행의 영업정지가 있은 뒤 예금자 등 채권자 보전의 범위를 정했다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논리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5천만원 이상의 피해자가 많다는 이유로 보상의 불가피성을 들며 법을 바꾸는 것은 시스템을 흔드는 일”이라며 “국민의 세금을 쪼개 개인의 금융 피해를 보전하려고 정부가 나서는 것 또한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피해 보상은 정부 당국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 등 시스템 안에서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회 내에서의 반발도 그대로다. 원칙 없이 지역 민심에 기대 내년 총선 눈치를 보는 것이라는 게 국회 내의 솔직한 분위기다.
피해자 쪽도 달갑지 않다. 김옥주 비대위원장은 “보상 상한선을 정하지 않아 정치권과 정부 방침을 더 들어봐야 한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영업정지 기간이 장기화되자 5천만원 이하의 예금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온다. 대개 영업정지 뒤 3개월이면 5천만원 이내의 원금과 이자가 예금자에게 우선 지급돼왔다. 6개월이 넘은 부산저축은행의 영업정지 장기화는 상식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미 인수자가 정해진 부산2저축은행조차 정상화되지 않고 있다. 이제는 5천만원 이하 예금자들조차 원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총리실에 구성된 금융혁신 태스크포스(TF)는 금융 개혁을 차기 정부로 미뤘고, 그나마 8월 중순에 하기로 한 최종 발표마저 미뤄지고 있다.
“지키지 못할 약속만 합니까”추석이 온다. 4월 부산저축은행 본점 지하주차장 한켠의 비상대책위 사무실에서 만난 김아무개씨의 분노는 그대로다. 지난 8월17일로 부산저축은행 본점 점거 100일이 지났다. 낮에는 가사도우미 일을 나가고, 밤에는 저축은행 농성장에 합류한다. 월급은 한달 100만원이 조금 넘는 정도다. 김씨처럼 피해자의 70% 이상이 월수입이 150만원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대다수 피해자들의 생활고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비대위 쪽은 주장한다. 김씨의 하소연은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와서 위로는 못해줄망정 (기획재정부) 장관이 공공근로 알선하겠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어디 취직시켜줄 건데요? 그건 장관이 안 나서도 우리가 몸만 성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축은행 부실을 방치한 게 누구입니까. 정치인들은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만 한답니까.”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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