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백혈병 문제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까? 법원이 지난 6월23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이숙영씨 등에 대해 산업재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삼성의 태도 변화 여부가 주목된다.
삼성 관계자, “이미지에 큰 훼손”특히 판결 다음날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참석해 백혈병 관련 회의를 연 것으로 알려져 더욱 관심이 쏠린다. 이 회장은 법원 판결 다음날이자 금요일인 지난 6월24일 예고 없이 서울 서초동 삼성 집무실에 출근했다. 이 회장은 그동안 일주일 중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출근해왔다. 이날 회의에는 미래전략실의 김순택 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사장, 삼성전자 경영진 등이 참석했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이 백혈병과 관련한 법원 판결의 파장과 대책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삼성은 백혈병과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은 무관하고, 발병 환자 역시 산업재해가 아니라는 태도를 취해왔다. 이 때문에 국내는 물론 국제 시민단체로부터 산업재해를 인정하라는 압박을 받아왔다. 지난해 초에는 세계 3대 기금운영사로 꼽히는 네덜란드 ‘APG자산운용’을 포함한 8곳의 기관투자가가 박지성 대표이사에게 ‘투자자 공동 질의’를 보내 삼성전자의 노동환경을 문제 삼기도 했다. 이번 판결도 <ap> 등 해외 언론에 소개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판결을 계기로 ‘조속히 해결하자’는 내부 목소리가 전보다 힘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도 삼성그룹과 계열사 일부에서 “하루빨리 업무 연관성을 인정해 ‘후진적인 노동 작업장을 가진 기업’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자”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힘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산업재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삼성전자의 태도가 (그룹 안에서) 우위를 보여왔다”며 “삼성전자는 ‘지금 인정하면 그동안의 모든 것을 잘못이라고 자인하는 것’이라며 반대 태도를 고수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1심이지만 법원 판결이 났기 때문에 털고 갈 수 있는 계기가 생겼고, 이로 인해 분위기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며 “삼성전자 안에서도 ‘반도체 사업만 있는 것이 아닌데도 이로 인해 이미지에 큰 훼손을 입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과 함께 이건희 회장이 직접 백혈병 관련 회의를 열면서 ‘해결하자’는 의견이 힘을 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삼성전자가 법원 판결 직후 발표한 보도자료를 두고도 내부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삼성전자는 6월23일 법원 판결에 대해 보도자료를 내어 “반도체 사업장의 근무환경과 관련해 공인된 국가기관의 2차례 역학조사 결과와 다른 판결”이라며 “아직 판결이 확정된 것이 아닌 만큼 앞으로 계속될 재판을 통해 반도체 근무환경에 대한 객관적 진실이 규명돼 의구심이 해소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삼성전자는 권위 있는 해외 제3의 연구기관에 의해 실시된 반도체 근무환경 재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공개할 예정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회장에게 ‘분위기 예사롭지 않다’ 보고
이를 두고 삼성 관계자는 “사회적으로도 ‘삼성이 잘못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법원 판결까지 나왔는데 이를 억지 부인하는 꼴이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동안 산업재해 관련 소송에서 근로복지공단이 당사자라고 밝혀왔는데, 삼성전자가 적극적으로 판결을 부인해 오히려 ‘가해자’라는 이미지만 커졌다”고 말했다. 또 “제3의 연구기관을 통한 조사 결과도 공개하겠다고 했지만, 판결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그 발표 자료를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뢰할지 의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삼성 내부에서는 삼성전자 사장급을 포함한 경영진 인사 조처를 통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에게 ‘삼성을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취지의 목소리가 보고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대책에는 삼성테크윈의 경우처럼 사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방안도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테크윈은 최근 실시된 긴급 경영진단 결과 비리가 적발돼 오창덕 최고경영자(CEO)가 물러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이를 두고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문화가 훼손되고 있다”며 “감사를 아무리 잘해도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의 이런 경영 기조가 삼성전자 경영진한테 적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분위기라는 얘기도 나온다.
물론 삼성이 잘못을 인정하려 해도 걸림돌은 있다. 잘못을 인정하는 방법과 산업재해 대상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산업재해를 인정할 경우 태도를 함께해온 노동부는 물론 다른 기업에 끼칠 파장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잘못을 인정해버리면 그동안 삼성전자와 의견을 같이한 노동부, 근로복지공단 등이 잘못한 것이 되는데다 다른 기업의 산업재해 문제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그럼에도 언제까지 문제를 안고 갈 수 없어 판결을 계기로 ‘이참에 해결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쪽의 이런 내부 기류 변화에 대해 삼성전자 반도체 문제를 줄곧 제기해온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은 산업재해를 폭넓게 인정해야 전향적인 조처로 간주할 수 있다는 반응이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이 잘못을 인정한다면 돌아가신 분들과 피해자, 그 가족에게 진심 어린 사과가 있어야 한다”며 “현재 증거가 부족해 법적으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산업재해를 인정하고, 향후 적절한 손해 보상과 작업환경 개선 등을 약속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는 겉으로 드러난 삼성의 태도 변화는 없다. 황유미씨의 산업재해 판정을 받은 아버지 황상기씨는 “판결 이후 삼성 쪽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말했다.
대신 산업재해 신청은 늘어가고 있다. 지난 6월29일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다발성경화증에 걸린 김미선(32)씨와 ㄱ씨(27)씨가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다발성경화증은 발병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화학물질 노출이나 스트레스 등으로 신체가 마비되거나 시신경 손상, 척수염, 말초신경 장애 등이 발생하는 희귀병이다.
판결 뒤 산재 신청 삼성 노동자 2명 늘어
김미선씨는 고등학교 3학년인 1997년 삼성전자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에 입사해, LCD 모듈과 패널 제조부서에서 납땜을 했다. 2000년 몸 왼쪽 전부가 마비되기도 하는 등 질병이 발생해 그해 3월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퇴사한 뒤에도 재활을 했지만 재발해 시력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 ㄱ씨도 2003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 입사해 반도체 제조·세척 관련 일을 했다. 2005년 퇴사한 뒤 2007년 시력 감소, 근력 저하를 겪다가 다발성경화증 확진 판정을 받았다.
김씨 등의 신청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한 삼성전자 노동자는 20명으로 늘었다. 또 근로복지공단이 산업재해를 받아들이지 않아 행정소송을 진행 중인 사람이 3명이다. 반올림에 직업병 의심질환 제보를 한 사람은 2011년 3월 기준으로 120명이 넘는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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