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 지하 1층에는 ‘아티제’라는 커피전문점이 있다. 삼성그룹 계열사인 호텔신라가 100% 출자한 ‘보나비’가 직영 체제로 운영한다. 지금까지 서울 지역에만 15호점이 문을 열었다. 삼성의 커피점 브랜드는 이것만이 아니다. 계열사인 삼성에버랜드가 운영하는 ‘카페리아체’가 있다. 삼성에버랜드는 계열사 임직원은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단체급식 사업을 한다. 카페리아체는 계열사의 직원식당 바로 옆에서 50여 곳이 운영 중이다. 호텔신라는 삼성테스코와 손잡고 ‘아티제블랑제리’라는 베이커리 사업도 하고 있다.
커피와 빵까지 파는 삼성그룹
지난해 매출액이 200조원을 넘는 글로벌 기업인 삼성그룹이 커피와 빵까지 파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삼성 계열 커피전문점과 제과점의 연간 매출은 그룹 전체 실적의 0.1%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삼성 같은 대기업 계열의 점포가 들어서면 주변의 중소 브랜드나 영세 자영업자 점포는 하나둘 밀려날 수밖에 없다. 삼성의 커피전문점과 제과점이 자리잡은 곳은 삼성의료원, 서울 대치동 타워팰리스, 삼성 계열사 사옥 등 누구나 탐내는 목 좋은 장소다. 병원을 찾은 수많은 환자나 가족, 생활수준이 높은 대형 평형의 아파트단지 주민, 계열사 임직원을 상대로 사실상 독점적 상권을 형성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좋을 수밖에 없다. 아티제는 지난해 회사 설립 첫해부터 매출 226억5천만원, 영업이익 27억원의 좋은 실적을 거두었다.
문제는 커피전문점을 하는 재벌이 삼성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세계의 스타벅스, 롯데의 엔제리너스, CJ의 투썸플레이스, 이랜드의 더카페 등 4개 브랜드가 더 있다. 여기에 중견그룹인 SPC의 파스쿠찌와 카페 벨에삐, 귀뚜라미보일러의 닥터로빈 등 3개를 더하면 대기업 브랜드만 8개에 달한다. 영세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동네 주변에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이제 더 이상 해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최근 수년 사이 재벌이 기존 주력 사업인 정보기술(IT)·자동차·석유화학 등과 무관한 사업 분야까지 앞다퉈 진출하고 있다. 돈이 되는 곳이라면 체면 불문하고 구멍가게 사업까지 뛰어든다는 지적을 받는다. CJ·롯데·GS·두산·삼양사·오리온·매일유업·농심·남양유업·빙그레·LG패션 등이 참여한 외식업은 일부 재벌이 먼저 진출한 분야에 다른 재벌이 추가로 뛰어든 경우다. 하지만 와인 판매(LG·SK·롯데·신세계·보광·두산·동원), 온라인 교육(SK·삼성·KT·이랜드), 차량 정비(SK), 사진관(SK), 소금 생산(CJ), 농산물 생산·유통·가공(현대차), 막걸리(CJ·롯데·진로·오리온), 골판지(롯데·농심·한화·삼양식품·오리온·애경), 웨딩사업(SK), 먹는샘물(LG·하이트), 수처리(SK·코오롱), 장례업(삼성), 콜택시사업(동부), 학원사업(대상) 등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한 사례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대형 할인점, 기업형 슈퍼마켓(SSM)으로 불거진 골목 상권 침해 논란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재벌의 진출로 관련 분야가 발전하고 소비자 선택이 넓어진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서민들의 ‘밥그릇’까지 빼앗는다는 부정적 시각이 적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매년 지정하는 대기업집단 순위를 기준으로 상위 20대 재벌(총수가 없는 대기업집단과 공기업은 제외)의 계열사 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859개에 이른다. 참여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2002년 말의 514개에 비해 67%(345개)나 급증했다. 지난 8년간 대략 10일에 하나씩 20대 재벌의 계열사가 새로 생긴 셈이다.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재벌 중에서는 현대차 계열사가 25개에서 63개로 늘어나, 최고의 증가율(152%)을 기록했다(그림 참조).
GDP 1.6배 늘 때 재벌 순이익 3.6배 증가
재벌의 무한 확장은 한국 사회의 경제력과 부(자산)의 집중 현상을 더욱 심화하고 있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8년간 상위 20대 재벌의 자산은 2.6배, 매출액은 2배, 순이익은 3.6배씩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명목 국민총생산(GDP)이 720조원에서 1172조원으로 1.6배 늘어난 것을 훨씬 상회한다. 국가경제에 비해 재벌이 월등히 빠르게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4대 재벌 중에서는 현대차의 성장이 가장 눈에 띈다. 자산은 2.9배, 매출은 2.3배, 순이익은 4.3배로 늘어났다. 그다음으로 삼성과 SK의 성장세가 비슷하다. 삼성은 자산이 2.8배, 매출 1.9배, 순이익 2.4배로 증가했다. SK도 자산 2배, 매출 2.2배, 순이익 2.7배씩 늘어났다.
재벌을 우리나라 전체 경제규모(GDP)와 비교하면 경제력 집중 현상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지난해 20대 재벌의 자산은 975조8천억원으로 우리나라 명목 GDP의 83.2%에 해당한다. 8년 전인 2002년에는 GDP의 51.8%였다. 20대 재벌의 매출액은 877조6500억원으로 명목 GDP의 74.8%에 해당한다. 2002년에는 58.2%였다. 덩치만 커진 것은 아니다. 성장의 과실(이익)도 재벌에 집중됐다. 20대 재벌의 순이익은 63조5천억원으로, 명목 GDP의 5.41%에 해당했다. 8년 전의 2.45%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아졌다(그림 참조).
최대 재벌인 삼성 한 곳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삼성의 지난해 자산과 매출액은 각각 230조원과 209조원으로 명목 GDP의 19.7%와 17.9%에 해당한다. 8년 전에는 각각 11.6%와 15%였다. 삼성의 순이익도 2002년 9조원에서 2010년 21조6천억원으로 늘어나며, 명목 GDP 대비 비중이 1.25%에서 1.84%로 껑충 뛰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재벌의 자산, 매출액, 자기자본, 부가가치, 설비투자 같은 규모 변수들의 GDP 대비 비중은 외환위기를 전후로 급격히 하락했지만, 구조조정이 일단락된 2002년 이후 다시 크게 상승하기 시작해 경제력 집중이 가속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진단했다.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 현상은 중소기업과 비교하면 더 분명해진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대기업의 2007~2009년 평균 총자산증가율과 매출액증가율은 전 산업 기준으로 각각 12.6%와 10.9%로 중소기업의 11.4%와 9.5%에 비해 높다. 기업의 수익성을 보여주는 매출액순이익률의 격차는 더욱 크다. 대기업이 4.2%인 반면에 중소기업은 2.3%로 절반 수준에 그친다. 재벌은 수요 독점적이고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중소기업을 상대로 일방적인 납품단가 인하 요구 등 불공정 하도급거래를 관행화함으로써 중소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IT 관련 중소기업을 영위하는 홍아무개(50) 사장은 “지금과 같은 낮은 이익률로는 중소기업들이 연구·개발 투자나 설비 투자를 제대로 해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강력한 재벌 개혁을 천명하며 집권했다. 정반대로 MB 정부는 2008년 친기업- 사실상 친재벌- 을 내걸고 집권했다. MB 정부는 지난 3년간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완화, 각종 기업 관련 조사 완화 같은 규제 완화와 함께 고환율·저금리·감세 등 재벌에 유리한 정책을 고수했다.
참여정부에 비해 급속한 성장세
명목 GDP 대비 재벌의 자산, 매출액, 순이익 비중을 정권별로 비교해보면, 재벌의 성장세가 참여정부에 비해 MB 정부 기간 중에 훨씬 빨랐음을 알 수 있다. 20대 재벌의 자산은 참여정부 기간(2003~2007년)에 67.8% 늘어나, 5년간 평균 증가율(단순평균)이 13.6%였다. MB 정부 기간(2008~2010년) 중에는 55.8% 늘어나, 3년간 평균 증가율이 18.6%로 참여정부 때보다 높다. 매출액 평균 증가율도 참여정부 기간에는 7.2%에 그쳤으나, MB 정부 기간에는 18%로 껑충 뛰었다. 순이익의 평균 증가율은 22.8%에서 22.9%로 소폭 높아졌다. 계열사 수 평균 증가율은 4.8%에서 11.5%로 크게 높아졌다. 참여정부 때에 비해 MB 정부 때 재벌의 경제력 집중 심화가 더욱 가속화됐음을 알 수 있다.
재벌 중에서도 참여정부와 MB 정부 기간 간에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삼성이다. 삼성은 참여정부 기간에 매출액과 순이익이 연평균 2.9%, 3.7%씩 늘었으나, MB 정부 기간에는 증가율이 23.1%와 34.1%로 수직 상승했다. 삼성의 명목 GDP 대비 매출액 비중도 참여정부 출범 직전(2002년)에 15%에서 참여정부 마지막(2007년)에 12.7%로 낮아졌다가, MB 정부 3년차(2010년)에는 17.9%로 다시 높아졌다. 순이익 비중도 1.3%에서 1.1%로 낮아졌다가 1.8%로 상승해 같은 추세를 보인다.
재벌의 금융지배는 고객이 금융 계열사에 맡긴 돈을 이용해 다른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유지함으로써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심화한다. 또 재벌이 금융자본을 지배해 사금고화할 경우 고객과 지배주주 간 이해 상충, 산업 부실이 국민경제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로 확산될 가능성, 금융자원 배분 왜곡 등 여러 문제점을 발생시킨다. 공정위가 지정하는 대기업집단에 속한 계열사들이 자산 기준으로 국내 생명보험 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42%(1997년)→53%(2001년)→58%(2010년)로 계속 높아지고 있다. 재벌의 생보업계 지배가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심화됐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증권업계는 대기업집단의 비중이 44%(1997년)→51%(2001년)→42%(2010년)로 외환위기 때에 비해 소폭 낮아졌다.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ㅈ(53) 대표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3년 카드 사태를 계기로 상당수 재벌의 금융 계열사가 구조조정을 겪고, 금융산업의 개방에 따라 외국계와 독립적인 금융회사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재벌의 금융에 대한 영향력 변화는 업종별로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벌이 보유한 금융보험사를 활용해 다른 계열사의 지배권을 유지·확장하는 행태는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정위가 매년 지정하는 총수 있는 재벌 중에서 금융보험사를 보유한 재벌의 비중은 2004년 62%에서 2010년 64%로 더욱 높아졌다. 재벌이 보유한 평균 금융보험사 수도 3.2개(2003년)→3.3개(2007년)→4.3개(2009년)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재벌이 보유한 금융보험사가 출자를 하고 있는 다른 계열사 수도 지난해에 2.3개로 2008년의 2.8개보다는 줄었지만, 2004년의 1.6개를 여전히 상회하고 있다. 금융보험사가 계열사에 출자한 평균 지분율도 9.9%(2004년)→10.0%(2008년)→22%(2010년)로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재벌에 속한 금융보험사가 다른 계열사에 투자한 주식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공정위의 규제가 현실적으로 재벌의 금융지배를 억제하는 데 큰 구실을 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나아진 것 없는 중산층·서민의 삶
재벌이 먼저 성장하면 그 혜택이 나머지 중소기업과 국민에게 흘러들어가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가 갈수록 미약해지는 상황에서, MB 정부의 재벌 위주 성장 정책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사회의 양극화 심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재벌의 적하효과 약화는 856호 표지이야기 ‘대기업의 넘쳐나는 부가 서민에게 흐르지 않는다’ 참조).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참여정부에 비해 MB 정부 기간에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가 심해진 원인에 대해서는 친재벌 정책과 함께 글로벌 경제환경과 산업구조 변화 등 다양한 요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지만, (재벌의 적하효과가 약해지는 현실에서) MB 정부의 재벌 위주 성장 정책은 전면 재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가장 빨리 극복한 나라로 꼽힌다. 재벌은 글로벌 경쟁기업들의 회복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수출 호조세에 힘입어, 2009년 하반기 이후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을 벌이며 한국 경제 회복의 견인차 구실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전체 기업체 수의 99%를 넘는 중소기업들의 회복세는 여전히 미미하고, 일반 국민도 경제회복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나라당이 4·27 재·보궐 선거에서 충격의 패배를 한 배경으로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 심화와 그 원인이 된 재벌 위주 경제정책이 주요하게 꼽힌다. 전문가들은 소수 독점자본이 과도한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재벌 위주의 경제구조는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의 훼손, 고용 없는 성장 전략으로 인한 비정규직 양산과 고용 불안 심화, 중소기업과 소비자의 피해로 이어져 중산층 이하 민심 이반의 주요 원인이 됐다고 진단한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수출과 경제성장은 잘된다고 하지만 중산층과 서민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이 여당의 패배로 나타난 것”이라며 “말로만 물가안정과 동반성장을 외칠 것이 아니라 대기업과 부자, 성장 위주의 기존 경제정책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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