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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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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면 바보, 알았다면 범죄

연체이자를 추가대출로, 부실채권을 정상채권으로 조작한 저축은행…부실 감독한 금감원은 최소한 직무유기, 아니면 범죄행위
등록 2011-05-03 10:10 수정 2020-05-03 04:26

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불량식품을 탐하고, 부모는 그런 아이에 무심하다. 아이의 배는 산만큼 부풀고, 배탈이 난다. 뒤늦게 아이를 응급실로 데려간 부모는 도리어 아이를 나무란다. 최근 저축은행 부실 사태를 보면, 탈난 아이는 저축은행이고, 개념 없는 부모는 금융 당국 꼴이다. 저축은행의 자해적인 욕심은 도를 넘었고, 관리·감독에 손 놓은 금융 당국은 무책임했다.

‘8·8클럽’ 남으려 저지른 불법

이야기의 배경을 살펴보자. 2006년 5월 금융감독원은 저축은행에 대한 대출 규제를 완화한다. 금고 사정이 괜찮은 일부 저축은행에 한해 이전 대출 규모 상한액이던 80억원보다 많은 돈을 대출해줘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조건이 있었다. 자기자본비율 8% 이상, 부실채권 비율 8% 이하여야 했다. 이런 ‘엘리트’ 저축은행들은 ‘8·8클럽’이라 불렸다. 쉽게 말해 내 돈으로 장사하면서, 빌려준 돈 확실히 돌려받을 수 있는 저축은행들은 돈 장사를 더 해도 된다는 뜻이다. 당시 부동산 시장은 활황이었다. ‘돈이 되는’ 건설사업인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저축은행의 대출이 몰리는 현상은 불 보듯 뻔했다. 규제 완화는 곧 저축은행의 부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곳곳에서 나왔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지난 4월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저축은행 청문회’에 출석해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지난 4월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저축은행 청문회’에 출석해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금감원도 이 점은 의식했다. 규제의 문턱을 길목에 마련했다. 같은 해 8월 저축은행의 PF 대출 비중을 총대출금의 30% 이내로 제한하라고 행정지도했다. 이 비율을 넘는 대출액은 2008년까지 돈을 빌린 이들로부터 돌려받도록 했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저축은행의 불법과 탈법은 사실상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방치됐다. 감사원이 지난 3월에 내놓은 ‘서민금융 지원시스템 운영 및 감독 실태’ 보고서는 언론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저축은행의 ‘꼼수’와 금감원의 펑펑 뚫린 감독망을 잘 보여준다. 보고서에 나온 꼼수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부산저축은행은 ‘8·8클럽’에 남으려고 연체이자를 추가대출로 뒤바꿨다. 사례를 하나 보면, 2004년 부산저축은행은 부동산 개발업자인 박아무개씨 등 3명과 사업추진 약정을 맺었다. 울산시 일대에 건설될 골프장 사업 개발 건이었다. 은행은 사업 전망을 보고 박씨 등에게 306억원을 빌려줬다. PF 대출이었다. 그렇지만 울산시청에서 해당 부지는 사업이 불가능한 곳이라고 알려왔다. 사업이 엎어졌다. 개발업자들은 원금은커녕 이자도 제때 못 내는 처지가 됐다. 저축은행의 꼼수가 여기서 시작됐다. 이자를 갚지 않아 쌓인 액수가 추가대출로 뒤바뀌었다. 이자가 연체되면 대출이 ‘부실채권’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는 ‘눈가림 수’였다. 이는 저축은행들의 ‘표준대출규정’에 어긋났다. 규정에는 “연체대출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대출이 가능하다”고 돼 있다. 물론 부산저축은행은 이 절차를 밟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연체이자는 빚으로 둔갑됐고, 부실채권은 정상채권으로 변했다. 금감원의 저지는 없었다.

둘째, 저축은행의 장부에서 부실채권이 정상채권으로 버젓이 뒤바뀌기도 했다. 부산저축은행이 한 법인에 빌려준 486억원은 회수가 힘든 ‘부실채권’이었지만, 은행은 이를 ‘정상채권’으로 분류했다. 이렇게 부실채권 2864억원이 정상채권으로 둔갑했다. 이런 꼼수를 통해 부실채권의 비율은 8% 아래로 지켜졌다. 또 부실채권의 손실에 대비한 대손충당금 1367억원을 마련하지 않아도 됐다. 만약 이 부분에 대한 감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부산저축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은 2008년 12월 기준 5.47%였던 것으로 추정됐다. 당연히 ‘8·8클럽’ 요건에 미달된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부산저축은행의 대규모 대출은 벌써 회수돼야 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달랐다. 부산저축은행은 ‘8·8클럽’에 남아 부실을 계속 쌓아올렸다. 감사원은 “대부분의 PF 대출 사업이 중단·지연되고 있었고, 사업 인허가 여부가 불투명한데도 위 상호저축은행에서는 자산건전성을 ‘정상’으로 분류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도 금감원은 눈을 감았다.

감사원도 알아낸 불법을 몰랐다?

셋째, 부산저축은행은 탈법적으로 PF 사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상호저축은행법에는 대출과 관련한 이자 등으로 저축은행의 수익원을 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부산저축은행은 사실상 ‘업자’로 나섰다. 10~11%에 이르는 대출이자와 따로 PF 사업 수익의 50~90%를 분배받는 ‘조건부 대출’로 약정을 했다. 스스로가 나서서 부실의 거품을 키웠다는 뜻이다. 금감원은 이 부분에도 침묵을 지켰다.

넷째, 부산저축은행은 규제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PF에 대출을 쏟아부었다. 부산저축은행은 정부의 방조 속에 ‘8·8클럽’에 머물며 80억원 이상 대출액을 끊임없이 늘려갔다. 2007년 6월 80억원 이상 규모의 대출을 합한 액수는 1조2841억원에서 2009년 12월 2조7039억원으로 늘었다. 2년6개월 사이 빌려준 돈이 두 배 이상 뛰어올랐다. 이 가운데 PF의 비율은 절대적이었다. 부산저축은행이 금감원에 제출한 PF 대출 비중은 2009년 말 기준으로 43.8%였다. 이미 정부의 규제 수준인 30%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나마 이 수치도 ‘세탁’을 거친 결과였다. 저축은행이 많은 PF 대출액을 일반대출 속에 숨겼기 때문이다. 감사원이 부산저축은행의 여신 규모를 분석해보니 부산저축은행의 대출 가운데 PF 대출의 비중은 72.8%에 이르렀다. 금감원은 부산저축은행의 과욕을 막는 데 실패했다.

금감원은 저축은행들로부터 업무보고서를 항상 넘겨받는다. 상호저축은행법을 보면, 금감원은 저축은행의 자금 흐름을 점검하며 이상이 생기면 이를 “조기 식별하고 그 결과에 따라 검사 실시 등의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금감원은 저축은행의 금고 속을 들여다볼 권한과 의무가 있다. 저축은행의 ‘꼼수’가 파악하기 힘든 내용도 아니었다. 위와 같은 탈법·불법을 밝혀낸 기관은 ‘비전공자’인 감사원이었다. ‘아마추어’인 감사원이 찾아낸 내용을, ‘프로’인 금감원은 몰랐다고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금감원의 침묵은 최소한 직무유기이고, 크게 보면 범죄에 가깝다. 금감원이 앞에서 살펴본 문제점 가운데 한두 가지라도 제대로 짚었다면, 부산저축은행의 부실과 불법 인출 사태는 예방할 수 있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앞선 노무현 정권 때부터 저축은행의 부실을 정리하지 않고, 오히려 부실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적절한 관리·감독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금융 당국 수장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저축은행 부실에 대해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는 없다.

금감위 삽질로 국민부담 1조5천억

감사원은 “부산저축은행이 대주주 혹은 제3자를 통한 자본금 증자 등으로 경영 정상화를 달성하지 못하고 파산 또는 계약 이전 등의 정리 절차에 들어갈 경우 정부의 예금보험금 손실액이 1조5809억여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지방의 한 저축은행에서 금융 당국이 ‘삽질’한 결과, 국민 한 사람마다 3만3천원씩 떠안게 될 수도 있다.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최근 분석 자료를 보면, 비상장 대형 저축은행 24곳 가운데 10곳은 특별한 조처가 없으면 올해 안에 문을 닫을 정도로 자금 사정이 안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랏돈이 필요한 곳이 그만큼 많다는 말이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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