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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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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열길 안갯속 물가

단기 전망 어려운 유가와 최고점 찍은 국제 곡물가로 물가 불안 당분간 지속…

중·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의 대외 민감도 낮춰야
등록 2011-03-16 15:36 수정 2020-05-03 04:26

지난해 하반기부터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던 물가 상승세가 한층 더 확대되고 있다.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5%로, 전월보다 4.1% 높아지면서 2008년 11월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물가 불안은 국제 원자재 가격과 국내 농축산물 가격 상승에 주로 기인하고 있지만,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근원소비자물가 상승률도 2월 들어 3.1%로 올라서는 등 최근 공산품과 서비스물가를 포함해 전방위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장바구니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면서 대형마트 등 유통업체들이 잇따라 할인 행사를 하는 등 판촉 활동을 벌이고 있다.연합

장바구니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면서 대형마트 등 유통업체들이 잇따라 할인 행사를 하는 등 판촉 활동을 벌이고 있다.연합

기본적으로 해외 요인의 영향

지난해 중반까지 소비자물가는 상당 기간 안정세를 보였다. 2008년 하반기의 금융위기 이후, 국제 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하고 원-달러 환율의 급등락도 완화되면서 국내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8월까지 2%대의 상승률로 안정세를 유지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채소류의 작황 부진 등으로 신선식품 물가가 급등하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로 올라섰을 때만 해도, 물가 불안은 기후 요인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주요 곡물 산지의 가뭄과 홍수, 폭설 등 기상이변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물가 상승세가 확대됐다. 급기야 올해 들어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이 북아프리카와 중동 산유국들로 확산되면서 국제 유가도 급등세로 돌아섰다.

이처럼 처음에는 일시적 현상에 그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물가 불안이 올해 들어 더욱 확대되면서 향후 전망의 불확실성도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물가 불안의 핵심 요인이 산유국의 지정학적 불안에 따른 국제 유가 급등이라는 점에서 전망은 더욱 어렵다. 예컨대 북아프리카의 대표적 산유국인 리비아의 정치 불안이 내전 양상으로 장기화될 조짐마저 보여 국제 유가의 향방은 더욱 불확실해졌다.

유가 전망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의 원유 생산 규모는 일평균 8732만 배럴인데,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의 잉여생산 능력은 일평균 500만 배럴을 상회한다. 낙관적인 시각에 따르면, 이처럼 기본적으로 공급 여력이 있기 때문에 정정 불안이 확대되지 않는 한 유가 급등세가 장기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경제의 원유 수요가 공급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유가 상승 압력이 쉽게 꺾이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있다. 산유국의 정정 불안이 최근 유가 급등세를 가속화했지만, 그런 요인이 없더라도 유가의 중·장기적 상승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유가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상품인 곡물 가격 전망도 긍정적이지 않다. 국제 곡물 가격 급등의 일차적 원인은 기상이변에 따른 작황 부진이지만, 문제는 기상이변이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지구온난화 등으로 인해 수시로 반복될 수 있는 구조적 요인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곡물 가격의 움직임은 유가와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유가 상승이 바이오연료용 곡물 수요 증가로 이어져 곡물 가격 상승을 더욱 부추기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세계경제 스태그플레이션 올 수도

중·장기적 관점에서는 중국과 인도 등 거대 신흥국들의 고성장에 따른 소득 증가가 원유와 곡물, 주요 에너지의 소비 증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원자재 가격 상승세가 상당 기간 불가피하다는 견해마저 제기된다.

요컨대 최근의 물가 불안은 기본적으로 해외 요인의 문제다. 세계경제의 고성장과 수요 증가라는 장기적·구조적 요인을 기반으로 하고 산유국의 정정 불안, 기상이변에 따른 작황 부진 등이 추가로 발생함으로써 야기된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세계 원유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정치 불안이 확산되고 장기화할지 여부가 관건이다. 이런 사태들의 향방은 예측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이로 인해 초래된 물가 불안의 성격이 과거와 다르다는 점이다.

산유국의 정정 불안에 따른 유가 급등은 일종의 ‘공급 충격’(Supply Shock)으로서 수요견인형 인플레이션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호황기에 수요가 증가해 발생하는 수요견인형 물가 상승은 금리 인상 등 총수요 관리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수요 측면에서 물가 상승 압력은 호황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에 대한 정책 대응은 경기 과열을 막기 위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공급 측면의 충격으로 인한 물가 불안은 다르다. 최근과 같이 원자재 공급 차질로 인한 물가 불안은 경제 전반에 비용 상승 압박으로 작용하면서 경기 후퇴를 야기한다. 1970년대 중동 지역의 원유 수출 중단에서 비롯된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불황 중에도 물가가 계속 오르는 현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국제 유가가 급등했던 2007~2008년과 현재 상황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2007~2008년의 유가 급등은 금융시장에서의 투기 수요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흥국을 비롯한 세계경제의 고성장에 따른 수요 증가의 결과였다. 그래서 고유가가 상당 기간 지속됐음에도 세계경제의 성장세는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고, 금융위기 발발 이후 실물경기가 급랭하면서 원유 수요가 감소함에 따라 유가도 큰 폭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수요 쪽 요인이 아니라 공급 쪽에서의 차질로 인해 야기된 물가 불안이기 때문에 대응이 쉽지 않고, 최악의 경우 세계경제가 경기 후퇴와 물가 상승이 공존하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진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가와 곡물 가격의 상승세는 주요국들의 정책 기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세계경제는 ‘환율 전쟁’이 현안으로 부상하면서 신흥국 통화에 대한 절상 압력이 높아졌다. 이제는 수입 물가 상승이 문제가 되면서 신흥국의 정책 기조는 자국 통화의 점진적 절상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 경제도 완만한 원화절상이 수입물가 급등으로 인한 물가 불안 압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원화절상은 수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수출 둔화로 인한 경기 하강 압력 증대라는 부작용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동안 물가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찍는 듯하던 우리 정책 당국의 태도도 변화하고 있다. 3월 금융통화위원회는 수요 쪽 물가 상승 압력과 인플레이션 기대심리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올해 들어 두 번째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한편에서는 물가 불안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지난해에 선제적으로 금리를 인상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해외발 공급 쪽 요인에서 비롯된 물가 불안의 특성을 감안할 때 금리정책의 유효성은 제한적일 수 있다.

해외발 물가 불안 요인은 시차를 두고 국내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 단기 전망조차 쉽지 않은 유가, 역사상 최고점을 찍은 국제 곡물 가격 등 최근 움직임을 감안할 때, 우리 경제의 물가 불안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제조업 가동률이 84%대로 상승하는 등 국내 수요 측면의 물가 상승 압력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에너지 소비구조 개선 등 대처 능력 키워야

현재의 물가 불안에 대한 정책 대응을 위해서는 수입세율 조정, 유통구조 개선 등 미시적 수단도 중요하며, 국내 수요 쪽 물가 상승 압력을 차단하기 위한 추가적인 금리 인상도 검토해볼 수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경제의 대외 민감도를 낮추려는 노력이다. 일각에서는 기상이변의 만성화와 신흥국의 고성장에 따른 수요 증가 등으로 인한 세계적 인플레이션의 장기화 가능성마저 제기하고 있다. 에너지효율 증대와 에너지 소비구조 개선, 안정적 곡물 공급원 확보와 곡물 자급률 제고 등을 통해 국제 원자재 가격의 변동성에 대한 우리 경제의 대처 능력을 제고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임일섭 농협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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