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동반성장 문제를 기업 자율에 맡겨 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내가 분명히 ‘아니다’라고 말하겠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기업의 자율이 중요하지만, 시장이 깨지거나 완벽하지 않으면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밝힌 ‘자율적 기업문화에 의한 동반성장 추진론’과 선을 그었다. 그는 대기업과 협력사의 초과이익공유제(Profit Sharing)를 추진하는 것을 두고 여당과 재계, 보수 언론에서 ‘급진좌파’ ‘사회주의적’ ‘반시장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에 관해 “대기업 이윤을 빼앗아 중소기업에 나눠주자는 사회주의적 분배정책이 아니고 대기업이 자율로 하자는 것인데, 내용도 잘 알아보지 않고 비판만 한다”고 안타까워하며, “동반성장을 위해 반드시 추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정 위원장은 4월 국회의원 재보선 출마설과 관련해 불출마 뜻을 확인하면서도, “19세기 초 영국 의회를 개혁한 경제학자들처럼 ‘엉터리’인 여의도(한국 정치)를 바꿔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포부를 밝혔다. 인터뷰는 2월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동반성장위원장 사무실에서 가졌다.
-지난 2월23일 동반성장위원회(이하 위원회)에서 협력사와의 초과이익공유제를 포함한 동반성장지수(56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협력사에 대한 동반성장 이행 실적과 협력 중소기업이 느끼는 체감도를 합산해 점수를 매기는 제도) 시행안을 발표한 뒤 대기업과 보수 언론의 비판이 연일 쏟아지고 있는데.
=언제든 변화를 추구하는 그룹이 있다면, 저항하는 그룹이 있기 마련이다. 일부에서는 협력사와의 초과이익공유제가 마치 기업의 남는 이익을 모두 강제적으로 협력사와 나눠가지라는 것으로 오해하는 듯하다. 대기업이 연초에 세운 이익 목표를 초과했을 경우 그 일부를 임직원뿐만 아니라 협력사에도 제공해서 생산성 향상, 기술개발, 고용안정에 투자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 정부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 같은 유인책을 주겠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사회주의니 좌파급진주의니, 반시장주의라는 비판까지 하는데.
=지금껏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시장의 효율성을 믿어왔다. 나는 반시장주의자가 아니다. 영국의 경제학자인 케인스가 (총수요 증대를 위한 적극적인 재정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부인이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여서 더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나라나 다 받아들이는 정책이 됐다. 시장이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시장이 깨질까봐 정부가 개입을 한다. 아직도 시장 인프라가 형성되지 않은 나라, 시장의 수급자와 공급자가 대등하지 않은 나라에서 정부가 나서서 시장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전에 위원회에서 논의가 없었고, 부처나 청와대와도 조율이 안 됐다는 지적이 있는데.
=위원회가 민간기구인데 정부부처나 청와대와 사전에 꼭 조율을 해야 하나? 위원회에서 초과이익공유제를 동반성장지수 평가항목에 추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기자간담회에서 이를 발표하겠다는 얘기도 미리 했다. 또 일부 동방성장위원들이 검토 과정에 참여했다.
-일부 언론은 대통령이 불쾌하게 생각한다고 보도했는데, 청와대에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 (해당 기사의 제목은 ‘정운찬에게 불쾌한 이 대통령’이었다.)
=사전이나 사후에나 전혀 들은 바가 없다. 이건 언론의 수준 문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된 적이 없고, 대통령이 불쾌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어쩌면 이번 일은 예고된 것인지 모른다. 동반성장지수 발표 직전 전경련은 기업들 입장에서 대폭 완화를 요구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실효성이 의문시된다는 상반된 입장을 내놓았다. 어떻게 최종 조정을 했는가.
=대·중소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한 업종별 간담회와 경제단체·학계·연구계 전문가들이 참석한 간담회를 20차례 가까이 열고 공청회까지 개최해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했다. 막판에 제기된 전경련 등 7개 경제단체의 요구도 많이 반영했다.
-전경련 등에서는 기업별로 동반성장지수 점수나 순위를 자세히 공개하는 것은 일종의 ‘대기업 줄세우기’라며 반대하는데.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의 순위를 다 매기고, 잘못한 곳에는 페널티를 주라고 한다. 반면 대기업은 잘하는 곳만 발표하라고 한다. 정부와 업계의 의견을 수렴해 방침을 정하려고 한다.
-동반성장 노력을 열심히 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간에 변별력이 없어지면 지수를 발표하는 취지를 상실할 수도 있을 텐데.
=잘하는 기업에 대한 보상이 미미하다거나 지수의 변별력이 너무 없다는 지적을 모두 받지 않도록 하겠다.
-위원회의 현 인력이나 예산으로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또 예산 부족으로 감시 대상이라 할 수 있는 대기업들의 모임인 전경련으로부터 거액(5년간 100억원)을 받기로 했는데, 눈치보기가 불가피하지 않을까.=옳은 문제제기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경련 돈을 안 받으려고 했다. 대신 정부 돈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 데서도 돈을 안 줬다. 어쩔 수 없이 대기업 돈을 쓰되, 중소기업과 정부로부터도 돈을 조금씩 받기로 했다. 하지만 전경련의 돈을 받는다고 재계 입장대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정부가 대부분의 돈을 내도록 해야 한다.
-평소 우리 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 해소를 강조해왔는데.=한국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데 두 가지 위협 요인이 있다. 하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고, 다른 하나는 양극화로 인한 사회 분열이다. 양극화는 과거 압축성장 과정에서 빈부 간, 대·중소기업 간, 도농 간 불균형이 심해진 것이다. 공정한 경쟁이 이뤄져야 하고 기회를 골고로 줘야 하는데, 현재는 관련 인프라가 전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가 정신이 제대로 자랄 수 없고, 동반성장도 안 된다. 그래서 동반성장지수도 만들고, 중소기업 기술개발 협력을 위한 기금을 만드는 등 특단의 조처가 필요한 것이다.
-대통령은 동반성장 문제를 자율적 기업문화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가능하다고 생각하나.=한국 경제는 아직도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많다. 위원회도 민간기구지만 정부의 관심이 지대한 위원회다. 예산이나 인력 지원을 아직 안 하고 있는 게 문제지만…. 이런 일들이 자율에 맡겨서 그냥 된다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만약 이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지난해 8월 총리를 그만둔 뒤 처음으로 맡은 자리가 동반성장위원장인데.=일부에서는 총리를 일찍 그만둔 보상으로 위원장을 맡겼다고 하는데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2009년 가을부터 2010년 봄 사이 몇몇 중소기업 사장들을 만났는데,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너무 심해 이민가고 싶다고 하소연을 하더라. 대통령을 직접 만나 대·중소기업 관계가 심상치 않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제제기를 한 내가 (위원장을) 맡기 싫다고 할 수 있나?
-4월 국회의원 재보선을 앞두고 출마설이 계속 나온다.=집안 형편이 어려워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평소 많이 했다. 서울대 총장도 그래서 한 것이고, 총리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지난 5년간 이명박 대통령에게 몇 차례나 부탁을 받고 사양한 적이 있어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었다. 사회를 위한 봉사에는 여러 일이 있지만, 지금 동반성장위원장만큼 중요한 일이 있나? 또 하나 제주도 세계 7대 자연경관 범국민추진위원장 일도 11월까지는 매달려야 한다. 두 가지 일이 바빠 (출마가 어렵다는) 부정적인 뜻을 전달했다.
-출마설이 사라지지 않는데,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은 것 아닌가.=어릴 때부터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절대라는 말은 절대 쓰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다.
-이번은 아니더라도 기회가 되면 다시 정치를 할 가능성은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19세기 초 영국 의회는 엉망이었다. 표를 돈으로 사고, 의회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이것을 고친 사람들이 당시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였던 데이비드 리카도, 제임스 밀, 헨리 손턴 등이었다. 내가 보기에 여의도(한국 정치)는 엉터리다. 은사들도 욕만 하지 말고 직접 들어가 고쳐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그러고 싶은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정치권의 복지정책 논란과 관련해 ‘동반성장이 복지정책의 핵심’이라는 말을 했는데.=지금의 복지론은 이미 생산된 것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관한 논의인데 반해, 동반성장은 생산 과정에서 참여자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고 거래 질서를 공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생산 과정에서 복지 문제가 상당히 해결된다. 동반성장은 한층 진일보된 복지 개념이다.
-한국 사회(경제)가 21세기에 풀어야 할 가장 큰 화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국내적으로 건전한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이를 위해 양극화 해소, 중산층 재구축이 중요하다. 국외적으로는 따뜻한 국제사회의 일원이 돼야 한다. 그동안 많은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못사는 사람들에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도와줘야 한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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