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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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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시장이 인정한 1.5등

2등 기업의 약진
2010년 제품 혁신과 과감한 투자로 주가를 높인 KT·현대제철 등 2등 기업들
대기업 독점으로 중소기업 위축되는 부작용도
등록 2010-12-29 16:22 수정 2020-05-03 04:26

케이블채널 엠넷의 에서 최종 승자로 ‘허각’이 발표될 때 시청률은 19.4%였다. 케이블채널 사상 최초로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했다. 같은 시각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은 문화방송 〈MBC 스페셜: 도시의 개〉 6.2%, 한국방송 6%, SBS 7.7% 등 절반에도 못 미쳤다.

지난 8월18일 서울 광화문 KT 올레스퀘어 매장에서 고객들이 아이폰4 예약 가입에 대해 상담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지난 8월18일 서울 광화문 KT 올레스퀘어 매장에서 고객들이 아이폰4 예약 가입에 대해 상담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삼성경제연구소는 올해의 히트상품 10개를 뽑으면서 1위 ‘스마트폰’에 이어 2위로 를 꼽았다. 빅히트의 배경에는 한부모 가정 출신의 ‘88만원 세대’인 허각씨가 있었다. 중졸 학력에 영어도 못하고 키는 163cm인 그가 보여준 ‘인생 역전’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올 2010년 시장에서도 허씨처럼 시장점유율이나 매출에서 뒤처진 기업들이 1위를 따라잡으며 ‘역전의 여왕’을 꿈꾼 사례들이 있다. 비록 완전히 1위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곳도 있지만, 주식시장에서는 그들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했다. 이른바 ‘2등 주식들의 반란’이다. 대표적으로 KT, 기아차, 호남석유화학, 현대제철, 모두투어, 아시아나항공 등을 꼽을 수 있다.

1등을 압도한 주식 상승률

KT와 기아차는 ‘반란’을 주도한 상품으로 재미를 봤다. KT는 ‘아이폰’, 기아차는 K5·K7 등 ‘K 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통신시장의 공룡’ KT는 그동안 유선전화와 인터넷 시장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유선전화 가입자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으며, 인터넷 시장은 포화상태로 경쟁사의 저가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KT가 지난해 6월 KTF와 합병하면서 새 모습을 보였다.

그 바탕에는 그동안 국내 시장에서 볼 수 없던 스마트폰이 있었다. 한때 ‘담달폰’(아이폰 출시가 계속 늦춰지면서 ‘다음달에 출시된다’는 예고가 잇따랐던 것을 조롱한 말)이라는 비웃음을 샀지만 결국 시장에 스마트폰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동통신 시장에서 여전히 SK텔레콤이 5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며 KT(32%)와 LGU+(18%) 등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있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12월 말 현재 총 가입자 625만 명 가운데 KT가 265만 명(42.4%)을 차지해 SK텔레콤(350만 명·56%)을 맹추격하고 있다. 앞으로 스마트폰 가입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어서 SK텔레콤과 KT의 1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KT 언론홍보담당 서민우 상무는 “2위 사업자로서 시장의 판도를 바꿔보자는 의지가 스마트폰 시대와 맞물려 빛을 발했다”며 “휴대전화를 통한 무선인터넷 서비스에서 KT의 와이브로·와이파이와 옛 KTF의 무선망이 합쳐지면서 큰 효과를 발휘했다”고 말했다.

주요 업종 1·2등 기업의 올해 주가상승률

주요 업종 1·2등 기업의 올해 주가상승률

이런 성과는 주식시장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KT는 2009년 12월30일 1주당 3만9100원에서 지난 12월21일 현재 4만8천원을 기록해 22.76%가 올랐다. 반면 SK텔레콤은 같은 기간 16만9500원에서 17만7천원으로 4.42% 오르는 데 그쳤다.

투자로 빛을 본 경우도 있다. 현대제철은 2006년부터 6조2300억원을 들여 건립한 충남 당진의 일관제철소가 지난 1월부터 제1고로를 가동한 데 이어, 11월에는 제2고로까지 완공했다. 이로써 연 2천만t 조강(쇳물) 생산 능력을 갖춘 세계 10위권 철강업체로 뛰어올랐다. 모회사인 현대·기아차 그룹과의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전망이 회사 가치를 높인 것이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향후 자동차용 판재류 제품 가운데 3분의1은 현대·기아차로 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주가도 2009년 종가 8만6500원에서 지난 12월21일 12만7천원으로 46.82% 올랐다. 반면 이 분야의 ‘대장주’인 포스코는 같은 기간 61만8천원에서 49만3천으로 오히려 20.23% 떨어져 대조를 보였다.

여행업체인 모두투어도 1위인 하나투어와의 격차를 줄였다. 2009년 말 종가가 모두투어는 주당 2만7900원이고 하나투어는 5만200원으로 2만원이 넘는 격차였지만, 지난 12월21일에는 각각 3만5750원과 4만4800원으로 1만원 이내로 줄었다. 모두투어 관계자는 “경제위기 때 많이 힘들었지만 영업활동을 강화하고 대리점 관리를 꾸준히 했다”며 “경제회복 시기에 대리점에서 우리 제품을 많이 선택해줘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롯데그룹 계열사인 호남석유화학도 과감한 투자로 기업 가치를 끌어올렸다. 지난 7월 말레이시아계 석유화학업체인 타이탄을 1조5천억원에 인수하는 등 잇단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불렸다. 기업 규모가 커진 만큼 주가도 2009년 종가(10만2500원)에 비해 181.46% 뛰어 28만8500원을 기록했다. 반면 LG화학은 2009년(22만8500원)에 비해 37만9500원으로 66.08%의 상승률을 보였다.

아시아나항공 역시 경제회복기를 틈타 대한항공과의 격차를 줄였다. 아시아나항공 주가가 2009년 12월30일 주당 3645원에서 지난 12월21일 현재 9980원으로 3배 가까이 오른 반면, 대한항공은 지난해 종가 5만4900원에서 12월21일 7만2200원으로 올라 전년에 비해 31.51%의 상승률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2등 기업의 상승에 대해 유진투자증권 조병문 리서치센터장은 “경기회복기인 올해 2등 기업의 수익성 개선 및 성장 가능성 등이 더 많이 부각됐다”며 “이 기업들은 기존 1등 기업에 버금가는 시장지배력을 지닌 경우가 많은데, 내년에도 경기회복기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돼 2등 기업의 반란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1+2=승자독식 시대

하지만 의 허각씨가 각광받는 것은 현실에서는 허씨와 같은 사람이 역전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역설도 존재한다.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대기업끼리의 수성과 역전은 가시화되지만, 그들만의 경쟁인 경우가 많다. 공정위가 지난 12월21일 발표한 ‘시장집중도 조사 및 독과점 고착산업 분석 결과’를 보면, 2008년 현재 제조업·광업의 시장 집중도는 55.3%로 2007년(54.2%)보다 1.1%포인트 높아졌다. 1985년 58.3%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특히 2004~2008년 독과점 구조가 고착화된 산업은 맥주·설탕·담배·승용차·조미료·화약 등 46개 분야에 이르며 이들 산업의 평균 시장집중도는 92.9%에 달했다.

그만큼 중소기업도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03년 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은 53.1%였지만 5년 뒤인 2008년에는 38.8%로 떨어졌다. 반면 대기업 수출 비중은 같은 기간 46.9%에서 61.2%로 늘었다.

중소기업연구원의 김세종 선임연구위원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벌어지는 ‘승자독식 시대’로 가고 있다”며 “그동안 정부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치중했다면, 향후에는 긴 호흡으로 중소기업의 연구·개발(R&D)과 혁신역량 강화 등에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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