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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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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 일가의 부당거래를 막아라

법무부, 재벌의 ‘회사기회 유용’ 금지 법률 추진…
포이즌필 도입 위한 명분쌓기 아니냐는 의심도 일어
등록 2010-12-29 15:49 수정 2020-05-03 04:26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 12월1일 차명계좌를 통한 비자금 조성과 그룹 계열사에 대한 부당지원 의혹 등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서부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 12월1일 차명계좌를 통한 비자금 조성과 그룹 계열사에 대한 부당지원 의혹 등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서부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한화의 전산사업부문을 분리해 2001년 설립된 한화S&C는 (주)한화(66.67%)와 김승연 회장(33.33%)이 대부분의 지분을 소유했다. 이후 2005년 (주)한화는 보유한 지분 전체를 주당 5100원에 김승연 회장의 장남 동관씨에게 매각했다. 경제개혁연대는 김동관씨가 헐값에 주식을 매수했고, 이로 인해 (주)한화가 손실을 보는 등 ‘회사기회의 유용’에 해당한다고 주장해왔다.

총수 일가-회사 거래 때 이사회 승인 요구

회사기회 유용은 주식회사의 지배주주나 이사 등이 회사에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 기회를 가로채 본인들의 이익을 얻거나 경영권 승계의 발판을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한화의 경우 나날이 커져가는 그룹 내 정보기술(IT) 서비스를 사업부문으로 유지하거나 한화S&C의 지분을 그대로 보유했다면 매각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5월 (주)한화 소액주주들과 함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을 포함한 (주)한화의 전·현직 이사 8명을 상대로 총 45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또 서울서부지검은 김동관씨가 한화S&C의 지분을 매입하는 데 비자금이 쓰인 혐의를 갖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처럼 국내 대기업들은 총수의 2·3세나 친인척에게 비상장 계열사 주식을 헐값에 넘겼다고 의심받는 사례가 많다. 이후 비상장 계열사는 그룹 내 제품 운송(현대그룹 글로비스)이나 제품 판매(신세계 그룹의 이마트 피자)를 독점하거나 IT 서비스(SK그룹의 SKC&C, 한화그룹의 한화S&C 등)를 독식하는 식으로 규모를 늘린 뒤 다른 계열사 주식을 인수하거나 기업 공개를 통해 부를 키워 경영권 승계의 발판 등으로 이용해왔다. 하지만 현행 상법에는 이를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규정이 정해져 있지 않다.

법무부는 지난 12월20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2011년 업무계획’을 보고하면서 이사 등 경영진뿐만 아니라 그 배우자와 직계가족 등 이사와 일정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회사와 거래할 때 이사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회사기회 유용에 대한 제도적 방지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집행임원의 책임과 임기를 법으로 정해 ‘비등기이사’라는 입법의 사각지대를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LG전자의 구본준 부회장은 지난 10월1일 공식 취임했지만 회사 경영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는 이사를 맡지 않고 있다. 상법 382조는 ‘이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구 부회장이 아직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취임 뒤 휴대전화·TV부문 사업본부장을 교체하는 등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처럼 경영에 대한 책임과 권한의 불일치를 법적으로 바로잡겠다는 것이 법무부의 계획이다.

이에 대해 오랫동안 회사기회 유용을 금지하는 법률 개정을 요구해온 학계와 시민단체들은 “늦었지만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럼에도 회사기회 유용을 막는 데 실효성이 있는지에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특히 “재벌그룹의 사외이사가 독립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사회 승인’ 규정만으로는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 것”(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사회 승인 때 다수의 동의(예를 들어 3분의 2 이상)를 받도록 하는 조항 등이 개정안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법무부가 ‘포이즌필’을 도입하기 위한 명분쌓기용으로 회사기회 유용 금지 조항을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낳고 있다. 법무부는 이미 지난 3월 포이즌필 조항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지만, 재벌의 지배권만 강화하고 소수 주주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 지난 11월9일에는 포이즌필 도입에 관한 공청회를 연 바 있다. 포이즌필은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 위기에 처했을 때 기존 지배주주가 싼값으로 신주를 발행해 본인 혹은 제3자에게 배정할 수 있는 제도로, 소유 지분이 낮은 재벌 총수에게 유리한 경영 방어 수단이 될 수 있다.

“포이즌필 도입은 국제규범에 역행”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회사기회 유용 금지는 당연히 입법화해야 하지만, 재계가 요구하는 포이즌필 등 경영권 방어 장치까지 함께 추진한다면 안 될 일”이라며 “G20을 통해 국제규범에 맞는 경제질서를 강조했는데, 포이즌필을 도입하면 이를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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