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5일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 법안 가운데 하나인 대·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이하 상생법) 개정안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골목 곳곳까지 진출한 SSM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영세 자영업자의 고통을 생각하면 이날 국회를 통과한 상생법은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지만, 중소상인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처음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SSM 규제를 위한 상생법의 국회 통과는 쉽지 않았다. 2009년 하반기부터 전국의 수많은 지역 골목마다 속속 들어서고 있는 SSM을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됐지만, 법안 처리 방향을 놓고 여야 간 이견이 치열했다. 2010년 초 여야가 어렵사리 상생법 처리에 합의하자 통상 담당 공무원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뻔뻔한 훼방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었다. 그는 4월23일 쌍둥이 법안으로 불리는 상생법·유통법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자 며칠 뒤(4월27일) “유통법은 괜찮지만 상생법 처리는 보류해달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훼방을 놓더니 최근까지도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자신의 ‘소신’을 들어 상생법에 반대해왔다. 한-EU FTA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상생법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한나라당은 그의 ‘체면’을 이유로 내세워 실제로 상생법 처리를 질질 끌었다. 법안 처리가 늦춰지는 순간에도 SSM의 골목 점령은 이어졌다. 박상표 ‘국민 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은 상생법 처리 지연 과정에서 김종훈 본부장이 보인 행태를 ‘통상 독재’의 대표 사례로 지적했다. 박 정책국장은 “장관급이라고는 하지만 김 본부장은 관계 부처 장관도 아닌 일개 통상 담당 공무원에 불과하다”며 “여야가 국회에서 합의한 법안의 처리 일정에 대해 통상 담당 공무원이 일일이 제동을 거는 일은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입법부인 국회와 행정부의 일부인 통상교섭본부의 관계가 정상적이었다면 한-EU FTA 협상의 전 과정이 국회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것이 옳은데도, 김 본부장은 거꾸로 협상의 편의를 들어 국회의 입법권 행사에 개입했다. 김 본부장이 상생법의 발목을 잡을 때 내세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법이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위배된다는 주장이었지만, 국회 입법조사처와 지식경제위원회는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EU FTA와 한-미 FTA를 지휘한 김 본부장 등 통상 담당 공무원이 국회와 국민을 무시한 사례는 이것만이 아니다. 정부가 뒤늦게 한-미 FTA 재협상을 인정했지만, 협상에 나설 당시 김 본부장 등은 협상 내용 등을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국회와 국민은 오직 미국 언론이나 관계자의 입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협상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의 건강권이나 재산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을 논의하면서도 정부는 협상이 다 끝난 뒤에, 그것도 결과 일부만을 공개했다. 심지어 재협상을 하면서도 재협상이 아닌 ‘추가 협의’라며 거짓말을 해왔다. 명백히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뒤에는 ‘협상 전략’이었다는 식으로 발뺌했다.
미국은 사전 의회 승인, 한국은 사후 통보국회 입법조사처가 정부의 이런 일방통행식 통상 협상 행태에 본격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입법조사처는 11월19일 발간한 의 ‘FTA 체결 과정과 국회의 역할 강화 필요성’ 보고서에서 재협상을 앞둔 한-미 FTA와 지난 10월6일 체결한 한-EU FTA 등을 예로 들며 “국민의 의사가 체계적으로 반영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협상력 강화와 통상 협상을 둘러싼 이해당사자 간의 이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통상협상절차법’ 제정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밀실협상’ ‘졸속협상’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던 한-미 FTA 재협상 등에 대해 국회 차원에서 견제구를 던진 셈이다.
통상협상절차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입법조사처가 비교 대상으로 제시한 주요 국가는 미국이다. 우선 우리의 FTA 협상 상대국인 미국은 다른 나라와의 통상 관계를 규제하는 권한이 의회에 있다는 사실을 헌법에 밝히고 있다. 직접 통상 협상에 나서는 주체는 행정부라 할지라도 주요한 통상 협정을 체결하는 데 의회의 승인이 필수적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 행정부는 협상을 시작하려면 최소 90일 전에 해당 통상 협상의 필요성과 협상 일정, 목적 등을 의회에 알려야 한다. 특히 해당 협상이 새로운 협정 체결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현행 협정의 개정에 관한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처럼 한-미 FTA 재협상을 시작하면서 “재협상이 아니라 추가 협의”라는 식으로 국민을 속이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 협상을 시작한 뒤에도 미 대통령은 상원의 재정위원회와 하원의 세입세출위원회, 관련 상·하원 상임위원회 등과 협상의 성격과 현행법에 미치는 영향 등을 협의해야 한다.
입법조사처 외교안보팀의 유웅조 입법조사관(정치학 박사)은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통상 협상 과정에 국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다”며 “‘자유무역협정체결규정’에 따르면 통상 협상이 시작된 이후 협상의 중요 사항을 국회에 보고하고 이해당사자 및 국민을 상대로 수시로 설명하도록 하고 있지만, 강제 규정이 아니어서 국회의 실질적 역할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입법조사처가 필요성을 강조한 통상협상절차법 제정을 위해 각 정당이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2008년 18대 국회가 개원한 이후 국회에 제출된 통상협상절차법은 모두 5건에 이른다. 김종률 전 민주당 의원이 2008년 6월30일 제출한 통상절차법 제정안을 시작으로 7월에는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비슷한 법안을 발의했다. 이어 9월에는 송영길 당시 민주당 의원(현 인천시장)이, 12월에는 천정배 민주당 의원이 차례로 관련 법안을 냈다. 지난 2월에는 이영애 자유선진당 의원도 비슷한 취지의 법안을 제출했다. 법안마다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 내용은 비슷했다. 민간자문위원회를 설치해 이해관계자와 민간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는 것과 통상 협상 진행 과정을 의무적으로 국회에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상 협상을 담당하는 몇몇 엘리트 공무원이 밀실에서 협상한 뒤 일방적으로 결과를 통보하는 행태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취지였다.
통상절차법 제정 약속 저버린 한나라당미국산 쇠고기 졸속 협상으로 촛불집회가 크게 번진 2008년 중순까지만 해도 통상절차법 제정은 큰 어려움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촛불 정국의 장기화로 18대 국회 개원이 늦어지자 여당인 한나라당은 개원만 하면 통상절차법을 연내에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소극적인 태도와 정부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 정치권이 요구하는 것처럼 통상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면 협상 전략이 노출돼 협상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논리다.
하지만 최근 한-미 FTA 재협상을 둘러싼 정부의 거짓말 논란으로 어느 때보다 밀실·졸속 협상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고 있다. 여기에 국회 입법조사처까지 통상절차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상황이다. 정부의 밀실협상 관행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라는 점에서 통상절차법 처리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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