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은 이면 계약을 통해 재판부를 기망한 치밀한 연극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삼성에 농락당했다.”
사건 터질 때마다 사재 출연 약속
지난 10월5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법·중앙지법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이은재 의원은 법원을 속여넘긴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에 대해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소속 비례대표 초선 의원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심한 듯 강경한 발언이었다. 이 의원은 “삼성은 과거 사카린 밀수사건(1966년) 당시 (계열사인) 한국비료의 사회 환원을 약속하고, 2006년 불법대선자금 사건 당시에는 8000억원을 사회기금으로 헌납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재 출연 운운하며 (재판을) 돈으로 해결하는 것을 전가의 보도로 여기고 있다”며 “이 회장은 선처를 바란다며 (사재 출연을 약속하고는) 줄 돈도 안 주고 판결을 산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의 ‘저격수’ 박영선 의원 역시 이 회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박 의원은 “만인에 평등하다는 법조차 강자와 약자에게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며 “사재 출연을 약속하고 형을 감경받았는데 사회 환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결국 법원은 삼성에 농락을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1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6월 법학교수 43명은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로 이 회장을 고발했다. 7년여 동안을 ‘뭉개기’로 일관하던 검찰은 2007년 10월 김용철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의 ‘비자금 양심선언’이 있은 뒤에야 ‘삼성비자금 특별수사본부’를 출범했다. 그러나 검찰의 특별수사본부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번엔 삼성 특검이 구성돼 2008년 4월 이 회장 등 삼성그룹 경영진 10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들에게는 삼성 에버랜드와 삼성SDS의 전환 사채와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헐값에 이재용 전무 등에게 넘겨 경영권 승계를 위한 종잣돈을 만들고, 각 회사에 969억원과 1539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수사만큼이나 재판도 복잡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서울중앙지법→서울고법→대법원→서울고법’ 네 번의 재판을 거치는 동안 사법부는 복잡한 법논리를 동원해 이 회장의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에는 면죄부를 줬다. 결국 서울고법은 2009년 8월 이 회장 등이 삼성SDS에 손해를 미친 혐의만 인정해 이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했고, 이 형은 확정됐다. 천문학적인 피해 금액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벼운 형량이었다. 재판부는 이 회장이 2008년 1심 재판 과정에서 법원에 낸 양형 참고자료를 중요한 감경 사유로 들었다.
법원도 몰랐던 감형 사유 뒤의 이면계약이 회장은 당시 재판부에 제출한 양형 참고자료에서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 회사의 손해 발생 여부를 떠나 공소장에 피해액으로 기재되어 있는 돈을 회사에 지급하겠다”며 삼성 특검이 피해액으로 든 2508억원을 삼성 에버랜드와 삼성SDS 쪽에 지급했다고 밝혔다. 실제 피해액이 재판 결과에 따라 얼마로 인정되건 사회적·도의적 책임에 따라 삼성 특검이 제시한 피해액을 이 회장 개인 돈으로 메우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재판부로서는 범죄로 발생한 피해가 회복된 이상 큰 폭의 감형을 해줄 명분이 생긴 셈이다.
그러나 ‘피해액 969억원과 1539억원을 각각 지급받았다’는 확인서까지 제출한 삼성 에버랜드와 삼성SDS는 이 돈을 그해 회사의 공식 수익으로 계상하지 않았다. 상법상 수익금은 해당 연도의 수익으로 회계처리해야 함에도 두 회사는 2008년 공식 재무재표에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 2508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오고 갔음에도 이같은 거래 내역이 장부에 기재되지 않은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경제개혁연대는 “분식회계를 하고 있다는 뜻이며, 수익금을 편입시키지 않아 회사에 손해를 미치고 있다”며 지난 4월 서울중앙지검에 두 회사의 전·현직 경영진들을 고발했다. 그러나 최근 검찰이 이 사건에 무혐의 처분을 하면서 이 회장과 두 회사 사이의 ‘이면계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회사와 이 회장 사이에는 ‘재판을 통해 피해액이 확정되면 손해액을 정산한다’는 ‘이면계약’이 맺어져 있었다. 언제 다시 이 회장에게 돌려줘야 할지 모르는 돈이기 때문에, 두 회사로서는 수익금을 정상적으로 계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앞서 본 우여곡절의 재판 과정을 통해 이 회장에게 인정된, 두 회사에 끼친 손해 액수는 227억원에 그쳤다. 결국 이 회장은 ‘이면계약’에 따라, 두 회사로부터 최종 유죄 인정 액수를 제외한 2282억원을 돌려받았다. 이 회장은 당초 ‘오랫동안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책임감을 느껴’ ‘손해 발생 여부를 떠나’ ‘공소장에 피해액으로 제시된 돈을 지급하겠다’고 재판부에 약속했지만, 뒤로는 몰래 사후 정산 계약을 맺어둔 것이다.
물론 재판부는 판결 선고 당시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해액을 갚겠다는 약속만 믿고 형을 감경해줬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더구나 이 회장은 지난해 연말 ‘나 홀로 사면’을 통해 이미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된 지 오래다.
법원이 삼성과 이 회장에게 속아 넘어갔다면, 검찰은 적극적으로 면죄부를 준 쪽이다. 특히 검찰은 최근 이 사건의 고발인인 경제개혁연대 쪽에 보낸 무혐의 처분 통지서에서 “이 회장 쪽이 세부약정서를 첨부하지 않고 ‘공소장 기재 금원 지급 관련’ 서면만 재판부에 제출함으로써 법원으로부터 유리한 양형 판단을 받는 자료로 사용되도록 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쉽게 말해, 삼성과 이 회장이 법원을 속여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말이다. 두 회사 입장에서는 각각 1천억원 정도의 돈을 ‘토해낸’ 셈이지만, 검찰은 ‘이는 약정서에 따른 정상적인 돈거래’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삼성만 보면 움츠러드나”
법원에 대한 국감 이틀 뒤인 지난 10월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서울고검·중앙지검에 대한 국감을 진행했다. 민주당 이춘석 의원은 “도둑이 도둑질하다가 검찰에 걸렸을 때 피해액을 변상한다고 해서 석방했더니, 변상 안 하겠다고 버티면 두 배로 무겁게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틈만 나면 공정사회를 말하고 있는데 (앞서 말한) 도둑질한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면, 삼성도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이은재 의원도 “국민들은 ‘검찰이 삼성과 이 회장만 보면 왜 움츠러드느냐’고 말한다”며 “결국 검찰이 법원을 속인 삼성과 이 회장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 아니냐”고 질타했다.
“세법의 발전과정은 삼성의 편법·탈법과의 투쟁사였다.” 과거 10년여간 진행된 삼성 일가의 불법 경영권 승계 논란을 바라보며, 세법학자들이 내놓은 평가였다. 그러나 이제 법원을 속이고 검찰의 비호를 받는 삼성을 본다면, 대한민국의 사법 정의는 삼성과의 투쟁을 이미 포기한 게 아닐까.
노현웅 기자 한겨레 법조팀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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