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14일, 5만여t의 미국산 옥수수가 국내에 반입됐다. 세계 최대 곡물 유통업체인 카길사의 제품이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질은 명성에 못 미쳤다. 국내 수입업체 관계자들은 제품 상태가 “황당한 수준”이라고 입을 모았다. 계약한 제품은 중급인 3등급이었데, 도착한 건 가장 낮은 5등급이었다. 일부 옥수수는 상했고, 산산이 부서진 것도 많았다. 중국산 저가 옥수수보다 못했다.
싫으면 사지 마라?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미국산 옥수수의 질은 2009년 들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카길사뿐 아니라 다른 대형 업체의 품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품질이 떨어지면 등급도 같이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등급은 유지됐다. 값은 값대로 비싸고, 품질은 낮았다. 피해는 한국에 돌아왔다.
보다 못한 한국사료협회가 나섰다. 6월에 주한 미국대사관과 미국연방곡물검사소, 해당 업체들에 공문을 보냈다. 답은 없었다. 8월에 다시 공문을 보냈다. 공문에는 27건의 수입 품목, 수량, 수출업체, 품질 분석 결과 등을 꼼꼼히 담았다. 한국사료협회장과 농협사료 대표이사 공동명의로 보낸 공문에서 이들은 “작금의 미산 옥수수 품질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측에서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더욱 염려되는 것은 이러한 품질 문제가 곧 사라질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미국에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조처를 취할 것”을 공식 요청했다. 역시 메아리는 없었다. 농협사료 관계자는 “1년째 아무런 공식적인 답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2~3년 전만 해도 품질에 문제를 제기하면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싫으면 사지 말라는 식으로 미국 쪽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뭘 믿고 이렇게 고압적일까? 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대섭 박사팀이 만든 ‘2009년 곡물 수입 실적’ 보고서를 입수했다. 보고서를 보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몇몇 외국계 곡물 유통업체들의 한국 시장 장악력이 눈에 띄게 커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4대 메이저’로 불리는 카길,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ADM), 벙기, 루이스 드레퓌스(LDC)는 어느새 농산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곡물 시장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우리 업계가 공문을 보내고 하소연해도 이들이 굳이 눈치를 볼 이유가 없게 됐다.
보고서는 사료용과 식용을 포함한 옥수수와 밀의 수입량 가운데 4대 메이저 업체의 거래량 비율을 분석했다. 우선 옥수수의 수입 현황을 보자(표1 참조). 지난해 국내에 수입된 옥수수 가운데 87%가 4대 메이저 업체에서 들어왔다. 2003년 60% 수준이던 메이저 업체 거래 비중은 등락을 거듭하면서도 경향적으로 증가세를 나타냈다. 특히 세계 최대 곡물 유통업체인 카길은 지난해 옥수수 수입 물량의 절반 이상(57%)을 차지했다.
밀 수입도 흐름은 비슷하다. 4대 메이저는 지난해 전체 수입 물량 가운데 61%를 거래했다. 2003년 비율인 35%에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지난해 카길과 ADM 두 업체만 국내 수입 물량의 52%를 거래했다.
밀과 옥수수, 두 품목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옥수수는 우리나라 곡물 수입 전체 물량 가운데 49%를, 밀은 26%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표2 참조). 두 품목을 합하면 전체 곡물 수입량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곡물 자급률은 27%다. 나머지 70% 이상의 곡물은 수입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가격 급등하면 공격적으로 돌변자료를 종합하면, 수입 옥수수와 밀은 우리나라 전체 곡물 수요의 절반을 차지하고 이 가운데 60~90%는 4대 국외 곡물 메이저들이 충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다시 환산하면, 우리나라 전체 곡물 수요의 최소 30~40%는 해외 곡물 메이저들이 담당한다는 말이다. 메이저 회사들은 옥수수와 밀 외에도 대두, 보리 등 대부분의 곡물을 한국에 수출한다. 4대 곡물 메이저가 우리 식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이 떨어지는 추세도 주목할 만하다. 농림수산식품부의 자료를 보면, 사료용을 포함한 곡물의 자급률은 2001년 31%였지만, 지난해에는 27%까지 떨어진 것으로 추산됐다. 메이저들의 영토가 점점 넓어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여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곡물 메이저들의 정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긍정적 평가를 하는 쪽에서는 메이저들의 곡물 공급 기능을 꼽는다. 곡물 메이저들이 전세계에 효과적인 공급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 수확이 급변해도 세계시장에서 공급을 꾸준하게 유지해준다는 말이다. 반대편에서는 메이저가 시장 지배력을 악용해이윤을 얻어낸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9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낸 ‘국제 곡물시장 분석과 수입방식 개선방안’ 보고서는 옥수수와 밀을 중심으로 2003~2008년 메이저와 비메이저 곡물 업체들의 가격을 비교했다(표3 참조).
우선 옥수수의 예를 보면, 메이저 업체는 6년 동안 t당 평균 179달러로 상품을 공급했다. 비메이저 업체의 187달러보다 저렴한 가격이었다. 그렇지만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 메이저는 ‘변신’했다. 옥수수 가격이 급등한 2006년 11월에서 2008년 12월 사이를 살펴보니, 메이저의 공급 가격은 t당 274달러로, 비메이저 업체의 253달러보다 21달러나 비쌌다. 시장 상황이 불안정할 때, 메이저들은 공격적으로 가격을 올렸다.
밀은 시장 상황과 상관없이 메이저 업체의 가격이 언제나 비메이저보다 높았다. 물론 메이저가 내놓는 상품의 질이 더 좋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곡물 가격이 크게 오르는 시기에 메이저의 가격 상승폭이 비메이저 업체보다 큰 점은 분명히 관찰됐다. 밀 가격이 급등하는 때에 메이저는 가격을 평균 44% 올렸고, 비메이저들은 35%를 올렸다. 보고서는 “곡물 메이저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회사를 통한 정보 수집, 막강한 로비력, 인공위성을 통한 세계 작황 점검 능력 등을 바탕으로 향후의 가격 및 시장 예측력이 뛰어나 높은 가격대에 판매하여 이익을 극대화한다”고 밝혔다.
김화년 삼성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시장에서 과점이 심화하면 소비자 후생이 줄어드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며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메이저의 점유율이 높아지면 우리 업체의 협상력이 떨어지고, 그 손실은 다시 우리나라 소비자에게 돌아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홍순찬 사료협회 기획부장은 “국내 곡물 시장이 메이저의 손에 장악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업계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어쩌다 이런 처지까지 몰리게 됐을까? 식량 자립 준비가 지나치게 부족했던 까닭이다. 이웃한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면 생각할 부분이 많다. 일본도 곡물 자립률은 28% 수준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다. 차이점은 일본은 1960년대부터 해외로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1960~70년대부터 직접 해외 농장을 통해 곡물을 생산한다는 전략을 세웠는데, 이 계획은 실패했다. 1970년대 말에 들어 자체 곡물 메이저를 육성해 공급 경로를 마련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지는 못해도, 필요할 때 물건을 구하는 길은 뚫어놓겠다는 전략이었다.
우리나라 농협중앙회에 해당하는 일본의 ‘젠노’는 1979년 미국 뉴올리언스에 2770만달러를 들여 초대형 저장·유통 시설을 짓고 미국 시장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1988년에는 미국 곡물 메이저인 CGB사를 인수했다. 민간 업체들도 함께 컸다. 미쓰비시, 이토추, 마루베니 등 종합상사들도 서양 메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자로 성장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옥수수 수입 물량 가운데 8%는 미쓰비시와 마루베니사를 통해 들어왔다.
일본이 다져놓은 공급 루트는 위기에 빛을 발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자료를 보면, 지난 2008년 곡물 가격이 크게 오르던 시절에 한국의 밀 수입 가격은 1년 전보다 82%가 뛰었지만, 일본은 61%만 뛰었다. 옥수수 가격 상승률도 일본(29%)이 우리나라(47%)보다 낮았다. 이영일 농협사료 구매부장은 “일본은 식량 안보와 먹을거리 품질 보장 차원에서 곡물 수입에 꾸준히 접근했고, 그 결실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LG, 대우, 삼성, 현대 등 웬만한 대기업은 종합상사 등을 통해 곡물 유통에 발을 들였다. 정부에서도 이 업체들에 대한 지원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김치영 한국사료협회 구매본부장은 “기업들이 대부분 메이저 업체로부터 커미션을 받는 수준에서 영업을 했을 뿐 멀리 보고 투자한 곳은 없었다”고 말했다. 대기업은 곡물 분야에서 수익 모델을 만들지 못하고 2000년을 전후해 대부분 발을 뺐다.
우리나라 기업이 곡물 시장에 다시 눈을 돌린 계기는 2008년 ‘곡물값 파동’이었다. STX팬오션, 농수산물유통공사 등 일부 기업은 곡물 시장이 가진 파괴력에 뒤늦게 눈을 떴다. 해운업체인 STX팬오션은 지난해 미국 벙기, 일본 이토추상사와 함께 미국에 합작 법인을 세우고 곡물 사업에 뛰어든다고 발표했다. 농수산물유통공사도 지난 2월 미국에 곡물회사를 설립해 국제 선물 시장에 참여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전문 인력 키우고 수급 정보 시스템 마련해야
홍순찬 부장은 “무엇보다 전문 인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나라 업체들은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 등에서 선물을 거래하는 등의 방식으로 곡물을 확보하는 요령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단계”라고 말했다. 이대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정부가 곡물 수급 관련 정책 수립을 위한 정보 시스템을 마련하고, 국제 곡물 시장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 |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권성동 “얼굴 두껍게…지역구서 숙이지 마” 도로 친윤당
얼큰하게 취한 용산 결의…‘나라를 절단 내자’
[단독] “국정원, 계엄 한달 전 백령도서 ‘북 오물 풍선’ 수차례 격추”
버티는 한덕수, 대행 탄핵에 ‘200석 필요’ 해석 믿나
윤석열이 더럽힌 회색 유니폼 [뉴스룸에서]
받는 사람 : 대통령님♥…성탄카드 500장의 대반전
끝이 아니다, ‘한’이 남았다 [그림판]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이종찬 “윤석열 부친, 아들 뭐 모르고 자랐다며 충고 부탁했는데…”
과일·가공식품 속 과당, 암세포 증식 돕는다…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