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회장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벼랑 끝 전술’을 배운 것 같다.”
지난해 대규모 적자에 따라 채권단이 요구한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둘러싸고 채권단 및 금융감독 당국과 정면 대결을 벌이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두고 재계에서 나오는 말이다. 현대가 사실상 그룹의 명운을 걸고 정면 돌파의 승부수를 던진 것은 총수인 현 회장의 결단이 없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현 회장은 2003년 남편인 정몽헌 회장의 뒤를 이어 경영을 맡은 뒤, 그룹의 위기 때마다 특유의 뚝심을 보여왔다. 현대의 한 임원은 “범현대가의 협공에 맞서 현대그룹 경영권을 지켜냈고, 단 1명의 관광객이라도 있는 한 금강산관광 사업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으며, 대북사업이 난관에 부딪히자 김정일 위원장과 담판을 통해 정면 돌파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채권단 초강경 제재, 현대 “당장은 타격 없다”
현정은 현대 회장은 2003년 경영을 맡은 뒤 고비마다 특유의 뚝심을 보여왔다. 지난해 8월17일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현 회장. 한겨레 김태형 기자
채권단은 7월8일 약정 체결을 거부하는 현대에 대해 신규 대출뿐만 아니라 지급보증, 선박금융까지 중단하는 초강경 제재를 취했다. 채권단은 현대가 계속 버티면 만기가 돌아온 대출금에 대해 재연장을 안 해주는 등 단계적으로 제재 강도를 높일 계획이다. 하지만 현대가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주채권은행(외환은행)의 교체와 재무구조 재평가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채권단의 제재가) 전혀 타격이 없을 수 없지만, 당장 큰 문제는 없다”고 자신한다. 현대는 올해 1분기 말 기준으로 1조2천억여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는 오히려 채권단이 공동으로 제재 조처를 내린 것은 일종의 담합으로, 공정거래법 위반 소지가 있다며 역공을 취할 태세다.
현대가 약정 체결에 반대하는 명분은 경영 부실의 가장 큰 요인이던 현대상선의 실적 부진이 해운 업황의 호조로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한 임원은 “올해 상반기 전체로 1600억원의 영업이익과 1천억원의 당기순이익이 예상되고, 하반기에도 실적 개선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채권단은 원칙에 위배된다고 일축한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관계자는 “다른 그룹과의 형평성은 어떻게 되느냐”면서 “일단 약정을 체결한 뒤 실적 개선 추이를 봐서 조기 졸업 문제를 논의하는 게 순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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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현대나 채권단 중 그 누구로부터도 양보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현 대치 상태가 한없이 계속될 수는 없다. 채권단은 앞으로 제재 강도를 계속 높일 것이고, 현대는 확보한 자금이 고갈되면서 유동성 위기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재무 상태가 가장 취약한 계열사가 부도 위기에 몰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벌써 사실상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가 가장 먼저 유동성 위기에 몰릴 것이라는 다소 성급한 전망까지 나온다. 현대엘리베이터는 그룹의 주력사인 현대상선보다 규모가 작은데다, 지난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해 재무 상태가 취약하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채권단이 기존 대출금의 만기 재연장을 안 해주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부인한다.
현대나 채권단이 파국을 피하려면 서로 타협책을 모색하는 것이 순리다. 문제는 그 해법이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금융 당국으로서는 이번에 밀리면 앞으로 영(令)이 서지 않고 기업 구조조정에도 차질이 올까봐 걱정한다. 재무구조개선약정은 부실경영의 우려가 있는 그룹의 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기업 구조조정 차원에서 맺는 협정이다. 지금까지 약정 체결을 둘러싼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해당 그룹과 채권단이 정면 대결로 치달은 일은 없었다.
현대그룹으로서는 약정을 체결할 경우 그동안 공언해온 현대건설 인수가 물 건너가면서 경영권 위협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 약정 체결 기업은 자산 매각, 부채 감축 등 강력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따라서 최소 3조원이 필요한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현대상선의 경우 현 회장의 우호 지분은 현대엘리베이터(20.6%), 외국계인 케이프포천(6.61%) 등을 모두 합쳐 43.77%다. 잠재적 경영권 위협 세력인 범현대가의 우호 지분은 현대중공업(17.6%), KCC(5.04) 등을 합쳐 30.51%다. 현대건설은 8.3%의 현대상선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범현대가가 이를 인수하면 현대상선 지분이 40% 가까이 높아져 2006년의 현대상선 경영권 분쟁이 재연될 수 있다.
채권단에서는 이런 사정을 감안해 현대건설을 누가 인수하더라도 현대상선 지분을 시장에 공개 매각해 현대의 경영권이 위협받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현 회장의 태도는 단호하다. 경영권도 문제지만, 현대건설 인수 자체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 회장이 현대건설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것은 현대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유지 때문이라는 게 현대의 설명이다. 현대의 한 임원은 “창업주가 생전에 현대를 세 개로 나눈 뒤 자동차는 정몽구 회장, 중공업은 정몽준 고문, 건설과 그룹 회장직은 정몽헌 회장에게 각각 주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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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는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 여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현대가의 사실상 장자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직접 겨냥하는 것은 피하면서도, 현대차의 현대건설 인수는 창업주의 유지에 어긋난다고 강조한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현대차는 자동차 전문 그룹으로서 이미 엠코라는 건설사를 갖고 있고, 앞으로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텐데 수조원을 들여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것을 시장에서 좋게 보겠느냐”고 지적했다. 범현대가 쪽에서는 이에 대해 “현대가 자력으로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몽구 회장이 현대가의 장자로서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을 챙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현 회장의 발목을 잡는 것은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이나 현대차 등 범현대가뿐만은 아니다. 설령 약정 체결을 하지 않더라도 현대가 자력으로 현대건설을 인수할 힘이 취약하다는 게 치명적 약점이다. 현대가 지난해 7조8천억원 매출(금융계열사 제외)에 1조원 적자라는 최악의 실적을 거둔 것은 주력사인 현대상선의 일시적 실적 부진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현대의 재무구조는 대단히 취약하다. 지난해 말 현재 부채 총액(금융계열사 제외)이 7조2270억원으로, 현 회장이 취임한 2003년 말보다 73.5%나 급증했다. 부채비율은 246%로, 53개 재벌그룹 평균치인 115%의 2배 수준이다. 현대가 무리하게 외부 자금을 동원해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했다가 위기에 빠진 ‘승자의 저주’를 되풀이할 수 있다. 현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인수대금은 어차피 내년에 내는 것이고, 올해는 인수제안서를 평가하는 것”이라면서 “평가에서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인수전 참여 자체를 막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현대 사태는 유동성 위기가 현실화하고 현대건설 인수전이 본격화하는 올 3분기 이후가 분수령이 될 공산이 높다. 그때가 되면 현대는 계속 버텨서 부도 사태를 맞을지, 아니면 백기를 들고 약정을 체결할지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다. 채권단과 감독기관도 현대를 부도로 내몰았다는 비난을 살 수 있어 고민이 커진다. 과연 현정은 회장의 ‘벼랑 끝 승부수’가 통할 것인지 주목된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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