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미스터 한컴, 머니게임 희생양 되나

셀런 인수 1년도 안 돼 대표이사와 모기업 경영진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
‘형님 기업’에 부실 매각 뒤 돈줄 구실
등록 2010-03-26 16:57 수정 2020-05-03 04:26

“미스터 스미스(Mr. Smith), 좋은 시절은 다 갔습니다.” 그동안 국내 업무용 소프트웨어 시장을 지배해온 마이크로소프트(MS)의 ‘MS오피스’를 겨냥한 비교광고다. 한컴이 MS 제품을 본격적으로 경쟁 상대로 선언하고, 비교마케팅에 나선 것이다.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있어서다. ‘한컴오피스2010’은 이전 버전의 제품보다 크게 개선됐다. MS의 파일들을 불러들여 읽어도 문자나 페이지, 행수 등이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나 엑셀에서와 똑같이 표현되는 등 뛰어난 호환성을 확보했다. 값도 가정 사용자용의 경우 3만6천원이라 경쟁력이 있다. 제품 출시 전 이용자를 상대로 한 베타테스트에서도 높은 만족도를 보여, 새 제품에 대한 전망이 밝다. 한컴은 최근 기업 로고와 웹사이트 주소(hancom.com)도 바꾸는 등 설립 20돌을 맞아 그동안 준비해온 사업들을 하나하나 펼치고 있다.

한컴이 셀런에 인수된 뒤 1년도 안 돼 경영진과 모기업이 횡령·배임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프라임센터에 자리잡은 한컴 사무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한컴이 셀런에 인수된 뒤 1년도 안 돼 경영진과 모기업이 횡령·배임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프라임센터에 자리잡은 한컴 사무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새 오피스로 MS와 ‘맞짱’ 선언하자마자…

스무 살 청년이 된 기업으로 도약을 준비해온 한컴이 최근 위기에 빠졌다. 김영익(39) 대표이사와 그의 형인 김영민(42) 전 셀런 대표이사 등 5명이 35억원 횡령과 350억원 배임 혐의로 지난 3월11일 불구속 기소됐기 때문이다. 여파는 이어졌다. 한국거래소는 이튿날 코스닥에 상장된 한컴의 주식거래를 중지시켰다. 상장폐지 실질심사 대상 검토에 들어갔다. 한컴은 인수된 지 1년도 안 돼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 다시 ‘매물’로 등장했다. 기업가치가 하락하고 주식거래가 금지되는 등 실질적 피해를 보는 소액주주들은 회사 쪽에 경영진 퇴진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컴의 모기업인 프라임그룹이 지난해 7월29일 삼보컴퓨터를 소유한 셀런 컨소시엄에 매각한 이후 지난 8개월 동안 한컴에서 일어난 일은 전형적인 ‘머니게임’의 사례다. 셀런 쪽은 520억원에 한컴을 인수했다고 알려졌지만, 검찰이 기소하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셀런 쪽은 한컴의 자산을 담보로 대출받는 등 440억원을 빚으로 조달하고 불과 45억원으로 한컴을 인수했다. 셀런 컨소시엄에 인수된 뒤 한컴은 부실한 셀런의 계열사들을 지원하는 돈줄 노릇을 하게 된다. 기소된 이들은 한컴의 자금 230억원을 담보 없이 셀런 계열사에 대출해주고 삼보컴퓨터의 악성 수출채권 60억원으로 갚도록 하는 등 350억원의 배임 혐의를 받고 있다.

한컴은 지난해 12월29일 셀런 등 3개사가 보유한 셀런에스엔의 주식을 120억원에 인수한다. 이들 계열사는 한컴에서 빌린 채무가 쌓이자, 한컴의 현금 120억원을 자본금 형태로 ‘수혈’받아 이 돈으로 한컴에 진 빚을 되갚은 것이다. 김영익 대표 쪽은 “회계법인의 검토를 거친 금액으로 주식을 인수했으며 언제든지 처분이 가능한 상장주식이어서 한컴에 전혀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한컴이 여유자금도 없는 상태에서 인수 필요성이 없는 회사의 주식을 매수한 행위는 배임이라고 본다. 셀런에스엔은 한컴의 인수 직전 2년 동안 2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 한컴이 주당 650원에 인수한 셀런에스엔 주식은 현재 절반도 안 되는 값으로 떨어졌다.

한컴은 2000~2002년 200억~400억원대의 손실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2003년 이후 7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며 그 규모를 확대해오고 있는 ‘알짜 기업’이다. 최근 3년간은 순이익이 해마다 100억원을 넘어서며, 부채도 거의 없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셀런에 인수된 지난해 3분기부터 금융자산이 급격히 사라지고 부채가 급증하고 있다. 한컴의 자산이 셀런의 부실한 계열사들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켜지지 않은 ‘인수 기준’ 약속
한컴이 MS를 겨냥해 만든 광고. 한글과컴퓨터 제공

한컴이 MS를 겨냥해 만든 광고. 한글과컴퓨터 제공

삼보컴퓨터를 계열사로 둔 셀런 쪽은 지난해 한컴 인수 당시 “하드웨어 회사와 소프트웨어 회사의 융합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고 밝혔지만, 한컴의 인수 목적이 한컴의 자산을 활용하기 위한 ‘머니게임’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의문은 왜 한컴이 자금력이 없는 셀런에 인수됐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해 한컴을 인수하려던 업체들 중에는 NHN, 엔씨소프트 등 튼실한 기업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임그룹은 한컴을 매물로 내놓을 때 3가지 기준을 밝힌 바 있다. “외국 기업에 넘기지 않겠다. 시세차익을 노린 자본에 팔지 않겠다. 한컴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업에 매각하겠다”가 그 기준이었다. 부동산 개발사가 “한컴을 세계적 소프트웨어 업체로 키우겠다”며 인수했다가 자금난에 몰리자 다시 매물로 내놓는 데 대한 비난을 의식한 약속이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셀런이 한컴을 인수하는 과정엔 석연치 않은 모습이 많다. 프라임그룹은 자금 없이 인수에 나선 셀런이 한컴의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인수대금을 낼 수 있도록 보증을 서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셀런 쪽도 ‘화답’했다. 인수 뒤 삼보컴퓨터는 프라임그룹이 지분을 갖고 있는 강변테크노마트로 이주해와 5개층을 쓴다.

또 다른 의혹도 있다. 앞서 한컴은 강변테크노마트 5개층에 114억원의 임대보증금을 내고 사업을 했다. 그러다 프라임 쪽이 2008년 임대보증금을 200억원 추가로 올려달라고 해, 한컴은 프라임이 지분을 갖고 있는 신도림테크노마트 7층과 8층을 담보로 잡는 조건으로 임대료 인상에 합의했다. 그런데 셀런이 한컴을 인수한 뒤인 지난해 12월 신도림테크노마트 7층에 대한 1순위 담보가 해제됐다. 대신 강변테크노마트의 81개 사무실에 2순위 담보가 설정됐다. 새로 지은 건물의 1순위 담보를 오래된 건물의 2순위 담보와 바꾼 ‘희한한 결정’이다.

매각 전후의 과정에서 드러난 일련의 ‘비정상적’ 거래는 각각 자금난을 겪고 있던 프라임과 셀런이 별도의 이면계약을 맺은 게 아닌지를 의심하게 한다.

한컴 직원-경영진 갈등 ‘국민 IT’ 발목 잡나

한컴 경영진에 대한 기소가 이뤄지고 각 매체의 보도가 잇따르자, 한컴 경영진은 지난해 7월 인수 직전까지 사장을 지낸 김수진 전무를 대기발령하는 등 조직개편을 실시했다. 직원들은 ‘보복’이라고 본다. 지난 1월22일 검찰의 한컴 사무실 압수수색 이후 한컴 직원들은 회사가 직원의 전자우편을 모니터링할 수 있다는 내용의 동의서에 서명해야 했다. 회사 쪽은 ‘보안상의 이유’를 들었지만, 직원들은 회사가 검찰 수사가 내부고발에 따른 것이라고 보고 회사가 직원 감시에 나섰다고 받아들인다.

횡령과 배임 혐의를 받는 대표이사가 회사의 알토란 같은 자산이 부실 기업에 빠져나가는 것을 ‘경영적 판단’이라고 강변하는 상황에서 직원들은 감시와 모니터 대상이 된 것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MS의 지배력에 맞서 자국 문서작성기 시장을 지켜오며, 한국 소프트웨어 기업의 상징이 된 기업이 겪고 있는 모습이 초라하다. 애플 아이폰 열풍에서 보듯 세계는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고 있지만, 국내 대표적인 소프트웨어 기업은 ‘머니게임’의 희생양이 되어 연구·개발 경쟁력 향상은 뒷전인 채 기업의 앞날이 지극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월4일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며 소프트웨어 산업을 적극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성공사례가 우리나라에서도 나와야 한다”며 “정부도 파격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컴은 ‘국민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불리며 1998년 MS에 매각될 운명에 처하자 ‘한컴 지키기’ 운동까지 일어났던 기업이다. 그런 한컴의 오늘 모습이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의 현주소다.

구본권 기자 한겨레 경제부문 starry9@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