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인수·합병(M&A) 시장에 큰 장이 선다. 규모만 수조원대의 기업들이 쏟아진다. 애초엔 올해 대형 M&A가 터질 것으로 재계 안팎에서 기대를 모았다. 하이닉스·현대건설과 같은 ‘대어’들이 있었다. 하지만 올해 시장은 소문만 무성한 채 별 성과 없이 끝났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었다.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 탓이 컸다.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오히려 M&A 실패로 더 많은 물량이 쌓였다. ‘승부사’ 김승연 한화 회장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는 허무하게 실패로 끝났다. 지난 1월22일 산업은행은 대우조선 매각 협상 결렬을 공식 선언했다. 한화가 포스코·GS·현대중공업을 제치고 단독으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지난해 10월24일 뒤 100여 일 만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도 대우건설을 토해냈다. 금호가 2006년 대우건설 인수에 들인 돈은 무려 6조4225억원이었다. ‘실탄’이 넉넉지 않았던 금호는 국내외 금융기관에 손을 벌렸다. 대우건설 주식 39.6%를 담보로 내놓고 3조5천억원을 빌렸다. 인수자금의 절반이 ‘빚’이었다. 지난해 말부터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던 금호는 결국 대우건설을 시장에 내놓았다.
현재 새 주인을 기다리는 곳은 대우건설을 비롯해 대우조선해양·대우인터내셔널·하이닉스·대우일렉트로닉스 등이다. 현대건설·쌍용건설 등이 시장에 나올 대기 매물이다.
이 가운데 대우건설·하이닉스·대우조선은 M&A 시장의 ‘빅3’로 불린다. 덩치가 만만치 않다. 몸값만 해도 각각 3조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대우건설의 매각 규모는 3조원 안팎에 이른다. 하이닉스의 매각 규모는 4조원 이상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분을 쪼개 매입할 때도 2조~3조원가량 투입해야 한다. 대우조선해양도 매각 규모가 3조~4조원으로 추산된다.
현재 가장 빠르게 매각 작업이 진행되는 곳은 대우건설이다.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자베즈파트너스와 TR아메리카 컨소시엄이 선정됐다. 두 곳 모두 사모펀드(PEF)다. 하지만 대우건설 매각 작업은 진통을 겪고 있다. 두 곳 모두 1차 관문인 투자확약서(LOC)를 금호에 제출하지 않았다. LOC가 제출되지 않았다는 건 아직 인수자금이 확보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두바이 사태로, 미리 자금을 확보해두지 못한 이들의 자금 확보 능력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신호다.
금호그룹은 매각이 지지부진해지면 또다시 유동성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금호는 12월15일 도래하는 4조원대 풋백옵션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3년 전 대우건설 인수 때 금호는 이후 주가가 주당 3만1500원을 밑돌 경우 금융기관이 갖고 있는 대우건설 주식을 이 값에 사준다는 풋백옵션 계약을 투자자들과 맺었다. 최근 주가는 1만2천원대에 그치고 있다. 투자자들이 풋백옵션을 행사하면 금호아시아나는 당장 4조원 이상의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다. M&A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금호는 다시 한번 휘청거릴 수 있다. 이에 따라 금호는 대우건설 풋백옵션 행사 시기를 내년 3월로 연기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하이닉스는 효성의 인수 의향 철회로 다시 오리무중 상태다. 효성의 하이닉스 인수 추진에 대해 ‘다윗이 골리앗을 삼킨다’는 시장 반응이 나왔다. 자산 규모 6조원의 효성이 자산 규모 10조원의 하이닉스를 인수하려는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효성은 특혜설 논란에 휩싸였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조카인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셋째 사위이기 때문이다. 한 전자업계 임원은 “하이닉스 같은 기업의 매각에 한 업체가 단독으로 참여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효성에서 하이닉스 인수에 나섰기 때문에 다른 인수 후보들이 빠졌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말했다.
채권단이 몸값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분할 매각(블록딜)을 할 수 있다고 밝힌 점도 논란거리였다. 보유한 하이닉스 지분 28.07% 전량 매각을 추진하던 채권단이 효성의 단독 입찰 뒤 지분의 15~20%만 떼어내 분할 매각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효성에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여기에 재미 블로거 안치용씨가 효성가 3세들의 미국 부동산 취득자금 출처가 비자금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효성은 인수를 포기했다.
하이닉스의 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12월21일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매각 공고를 내고 내년 1월 말까지 인수의향서(LOI)를 접수할 예정이다. 하지만 하이닉스 매각도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일단 몸집이 커 ‘총알’이 충분한 기업이 많지 않다. 반면 반도체 시황이 회복되면서 하이닉스의 몸값은 더 오를 전망이다. 하이닉스는 지난 3분기에 영업흑자 2090억원을 올려, 8분기 만에 흑자로 전환했다.
일부에선 다시 블록딜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이 경우 외국계에 인수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해외 기술 유출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그동안 ‘해외 매각 불가’를 밝혀왔다. 지난 7월 16∼18% 수준이던 하이닉스의 외국인 지분율은 하반기 들어 23%에 이르고 있다. 외환은행(6.4%)과 산업은행(4.8%)이 갖고 있는 지분만 블록딜로 해외에 매각해도 하이닉스가 외국계로 바뀔 수 있다. 이 때문에 국민주 형태로 매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원점으로 돌아간 대우조선의 주인 찾기도 다시 점화되고 있다. 민유성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지난 11월12일 대우조선해양 매각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 안에 매각 주간사를 선정해 내년 상반기에 공식적인 매각 작업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이날은 효성이 하이닉스 인수 의사를 철회한 날이기도 했다.
산업은행은 지난 12월8일 국내외 20여 곳의 증권사 및 투자은행에 대우조선 매각 주간사 선정을 위한 입찰제안서(RFP)를 보냈다. 본격적으로 재매각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대우조선 인수 후보로는 지난해 인수전에 참여했던 포스코·한화·현대중공업 정도가 꼽히고 있다.
자금 많은 포스코, 대우인터내셔널 입찰 참여장이 서려면 사려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삼성·현대차·LG·SK 등 4대 그룹은 M&A 시장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른 기업들은 글로벌 경제위기로 M&A 여력이 충분하지 않다. 대형 M&A 과정에서 자기 덩치에 맞지 않는 기업을 인수한 기업이 모기업까지 함께 어려워지는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도 인수에 나서는 데 망설이게 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기업이 있다. 포스코다.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풍부한 포스코의 행보에 가장 큰 관심이 쏠린다. 약 6조원에 이르는 동원 가능한 ‘총알’이 포스코의 최대 무기다. 현재 포스코는 대우인터내셔널(옛 (주)대우) 매각 입찰 참여를 확정했다. 여기에 포스코는 대우조선 인수 유력 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포스코 쪽은 “아직 인수전 참여 여부를 말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올해 효성과 금호, 한화는 M&A 시장에서 쓴맛을 봤다. 내년 M&A 시장에선 어떤 기업이 대어를 낚을지, 어떤 기업이 승자의 저주라는 그물에 걸릴지에 관심이 쏠린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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