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하도 상가는 애초 ‘벙커’ 용도로 태어났다. 1975년 무렵 박정희 정권은 전시에 한강 이북의 시민을 강 건너로 피난시키는 대신 수도를 ‘사수’하기로 작전계획을 바꿨다. 수도군단이 창설되고 도심부에 일종의 콘크리트 바리케이드인 ‘가각진지’가 설치됐다. 민자유치 사업으로 대규모 지하상가 조성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씨는 자신의 책 에서 “서울시 재정으로 그런 지하시설까지 설치할 엄두를 못 내고 있을 때 손현수가 찾아온 것이다. 손현수가 ‘민방위 대피시설로의 활용’을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에게) 설명하는 순간에 민자유치 사업으로 대규모 지하상가 조성의 결심이 선 것”이라고 말한다. 손현수씨는 서울·부산·마산·청주·안양 등지에 대형 지하상가 체인을 가진 ㄷ그룹의 창업주다.
서울시가 4월 중 운영권을 경쟁입찰에 붙일 예정인 5개 지하도 상가 중 하나인 영등포역 지하도 상가 기둥에 상인들이 입찰에 반대하는 문구를 써붙여 놓았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점포 안 비우는 상인 대상 명도소송
지금 지하도 상가는 ‘화약고’가 됐다. 노후 상가의 리모델링 추진이 사단이다. 전국지하도상가상인연합회(이하 연합회)는 지난 2월 “서울시가 시내 지하도 상가 리모델링 공사 경쟁입찰 추진 과정에서 특정 업체와 유착한 의혹이 있다”며 오세훈 서울시장을 ‘공무원 직무집행 관련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고, 이에 맞서 서울시는 지난 3월23일 정인대 연합회 이사장을 명예훼손·모욕·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 상태다. 서울시는 리모델링 공사를 추진하기 위해, 최근 계약 기간이 만료됐지만 계약 갱신을 요구하며 점포를 비우지 않는 1천여 점포 상인을 대상으로 가게를 비우기 위해 명도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맞서 상인들은 통로 기둥과 점포 벽면에 서울시와 재벌을 비난하는 문구를 붙여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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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불거진 건 서울시가 2780여 점포가 들어서 있는 시내 29개 지하도 상가의 리모델링을 추진하면서 이 공사를 맡는 민간업체에 상가 운영을 위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재벌 등 민간업체가 운영권을 가지게 되면 계약 갱신이 어려워지거나 임대료가 높아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차라리 상인단체에 공사를 수의계약으로 맡기라는 게 상인들의 요구다.
지하도 상가의 갈등은 왜 지금 불거지게 됐을까? 처음 지하도 상가를 만들 때 서울시는 재정이 부족해 기부채납 방식으로 민간자본에 건설을 맡겼다. 건설업체들은 상인들의 분양 보증금을 걷어 마련한 공사대금으로 지하상가를 완공했고, 이후 임대료를 받으며 20년간 운영한 뒤 서울시에 기부했다. 영등포역 앞 지하도 상가를 예로 들면, 1978년 건립 당시 80여 개 점포가 들어섰는데 점포당 임차보증금은 4천만원, 총 공사비는 38억원이었다.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전임 이명박 시장 시절인 2002년이다. 당시 서울시는 현재와 같은 위탁운영 계획을 발표했으나, 상인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서울시는 5년 뒤 위탁운영 도입을 조건으로 한 차례 수의계약을 연장해줬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정인대 연합회 이사장은 “당시 이명박 시장은 5년 이후의 문제는 차기 서울시장과 협의하라고 했다”고 반박한다. 시한폭탄의 시계는 유예됐지만, 그렇다고 폭탄 자체가 제거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서울시는 이달 중에 일차로 강남역, 강남터미널역, 영등포역 등 5곳의 지하도 상가에 대한 리모델링 공사 입찰공고를 낼 계획이다. 해당 지역의 점포 수는 1천여 개로 총 공사비는 600억원가량이다. 기존 상인들은 대부분 다시 입점시키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인들이 이렇게 극력 반발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연합회는 서울 시내 지하도 상가들이 대구 지역 중심가인 동성로 중앙지하도상가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상가는 애초 대구시설관리공단이 관리할 당시 임대보증금이 3.3㎡당 1천만원 안팎에 월 임대료는 6만원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난 2000년 공개경쟁입찰에 따라 민간회사가 리모델링을 한 뒤 3.3㎡당 보증금은 1700만원, 월 임대료는 17만원으로 뛰었다. 점포 규모를 키우는 바람에 전체 점포 수도 400여 개에서 200개 안팎으로 줄었다. 점포의 양도·양수도 상가 운영을 위탁받은 민간회사의 승인을 받아야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당시 중앙지하상가 3지구 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신영섭(48)씨는 “위탁운영 업체에 대한 특혜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쫓겨난 상인들 중에는 인생이 무너진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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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 상가 갈등의 불씨로 또다시 등장하는 것이 권리금이라는 괴물이다. 상권 활성화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강남권이나 명동 일대 지하도 상가는 점포당 5억~10억원대 권리금이 형성돼 있다. 용산 참사의 사례에서 보듯, 권리금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기에 나중에 엄청난 권리금을 주고 들어왔다가 이를 돌려받지 못한 채 쫓겨나야 하는 상인들의 반발은 클 수밖에 없다. 강남역 지하도 상가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김아무개씨는 “지난해 초 3억원의 권리금을 주고 가게를 인수했는데, 5월 말 서울시로부터 임차계약이 만료됐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은행빚 등을 생각하면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한탄했다.
서울 시내 주요 지하상가들은 대부분 대기업 백화점들과 바로 연결된다. 회현 지하상가와 신세계백화점 본점, 강남터미널 지하도 상가와 신세계 강남점, 명동 지하상가와 롯데백화점 본점, 잠실 지하상가와 롯데 잠실점 등이 그렇다. 백화점 처지에서는 고객의 이동선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라도 지하도 상가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상인들은 백화점을 소유한 대기업 쪽이 상가 운영권을 노리고 입찰에 참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이전한 삼성타운과 연결되는 강남역 지하상가의 경우, 8개 출입구 구조물(캐노피) 중 7곳은 중소업체가 건설하고, 삼성타운으로 이어지는 1곳만 삼성물산이 시공했다. 이에 대해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지하도 상가가 상권 확보 차원에서 가치가 큰 것은 분명하다”며 “그러나 현재 상인들의 반발이 심하기 때문에 입찰에 참여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시와 상인들이 ‘윈윈’할 해법은 없는 것일까? 상인들은 인천시처럼 상인들에게 권리를 주되 책임을 물으면 된다고 제안한다. 인천도 서울과 비슷하게, 지난 2001년 기부채납 기간이 끝나면서 15개 상가 3711개 상점에 대한 리모델링을 추진했다. 인천 광역시 지하도 상가 연합회의 김세훈 이사장은 “당시 500억원의 공사대금을 상인들이 부담하고, 인천시는 조례를 만들어 지하상가연합회가 상가 운영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며 “상인들이 관리 주체가 되다 보니 통로에 물건을 쌓는 사례도 없어졌고, 각종 이벤트 개최와 내부 조형·장식에도 섬세하게 신경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천시 시설관리공단의 오인환 상가관리팀장은 “조례 제정 때 리모델링 공사를 공개입찰하는 대신 기존 상인들에게 우선권을 준 게 상위법을 위배하는 것 아니냐는 일부 지적이 있었지만, 인천시와 시민들 모두 만족하는 해법이라 현재까지 잘 운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시 “입찰 평가 때 상인 보호 측면 고려”이처럼 서울시가 일정한 리모델링 요구조건을 제시하면 상인들이 돈을 추렴해 이에 맞게 공사를 하면 된다는 연합회 쪽의 주장에 서울시는 시큰둥한 태도다. 서울시 관계자는 “공개경쟁입찰에 부치지 않으면 상위법에 위배된다. 지하상가 상인들은 공유재산에 대한 특권을 오래 누렸다. 권리금도 상권 형성에 기여해서 생긴 게 아니다. 더구나 공개경쟁입찰 참여업체를 평가할 때 상인들에 대한 보호 항목을 가장 중요하게 놓을 것이기 때문에, 재벌이나 특정 업체에 특혜를 준다는 연합회의 주장은 틀린 것”이라고 말했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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