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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말씀’과 엇나간 올 한 해

이건희·정몽구 회장 사회환원 지연 입방아… “기업윤리 제고” 강조한 남중수 전 사장 비리 구속
등록 2008-12-23 14:06 수정 2020-05-03 04:25

주요 그룹 회장들은 올해 많은 말을 남겼다. 예상치 못한 약속도 내놓았다. 신년사에서, 기자회견장에서, 국정감사장에서 나온 회장들의 말이 회자됐다. ‘회장님 말씀’을 통해 올 한 해 재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정리해봤다.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4월22일 이 말을 남기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삼성 비자금 문제에 대한 법적·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고 삼성은 설명했다. 올해 ‘회장님 말씀’ 가운데 우리 사회에 가장 큰 파장을 남겼다. 그는 20여 년 동안 삼성 회장을 맡으며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를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한겨레 김진수 기자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한겨레 김진수 기자

“지난 허물은 모두 내가 떠안고 가겠다”

한 달 뒤 참여연대는 ‘삼성 거짓말 보고서’를 내놓는다. 보고서는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큰 약속들’의 한 예로 이건희 전 회장의 퇴진을 꼽았다. 보고서는 “일부에서는 이건희 회장도 앞으로 진행될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 고 이병철 회장처럼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하지 않겠냐는 예측을 한다. 또 꼭 경영 일선에 복귀하지 않더라도 대주주로서 경영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예상을 하기도 한다. 만약 이건희 회장이 고 이병철 회장처럼 경영 일선에 복귀한다면 2대째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된다”고 지적했다.

1966년 9월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를 밀수한 사실이 언론에 공개됐다. 파문이 커지자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기로 하고 이 기회에 자신이 대표로 있는 중앙매스콤과 학교법인을 비롯한 모든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했다( 1966년 9월22일치 1면). 하지만 이 전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1년 만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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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약속’은 국감장에서 불거졌다. 정 회장이 특별사면된 뒤 재산 환원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 회장은 수백억원대의 회삿돈을 횡령해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뒤 지난 8월 특별사면됐다. 그는 7년 동안 8400억원의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나라당 주광덕 의원은 10월23일 법무부 국감에서 “지난 2007년 5월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 1년 안에 12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던 정 회장은 같은 기간 600억원의 사회 환원밖에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 회장이 600억원을 증여해 설립한 ‘해비치재단’도 설립 1년이 다 되도록 단 한 건의 봉사활동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재벌 총수들의 약속 지키기와 관련해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도 한 마디 했다. 김성태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11월6일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이 1조8천억원 규모의 재산 환원 약속을 해놓고도 2년이나 지키지 않고 있다”며 “재계가 투자와 일자리 창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기업들을 위해 법인세를 인하해줘야 하느냐”고 지적했다. 강 장관은 “과거에 천명한 재산 사회 환원 약속이 왜 이행되지 않는지 확인해보겠다”고 답했다.

정몽구 현대 ·기아차 회장. 현대·기아차 제공

정몽구 현대 ·기아차 회장. 현대·기아차 제공

“사회공헌 기금 입장 변화 없다”

이에 대해 삼성 쪽은 “1조원 이상 규모가 될 이번 사회 환원 금액은 아직 구체적인 용도를 결정하지 못했다. 이 회장의 취지에 맞게 쓰일 수 있도록 시간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 쪽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8400억원의 사재를 사회공헌 기금으로 내놓겠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해비치재단이 외부 컨설팅을 통해 장학사업 등 기금 운영 방안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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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회장들의 신년사는 그해의 경영 화두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올 신년사에서 밝힌 ‘말씀’과 달리 실제 상황은 너무나 엉뚱하게 흘러가는 경우도 흔했다.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이 그랬다. 박 회장은 신년사에서 “미국 시장에서 일어난 서브프라임 사태는 2003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카드채 사태보다도 구조와 위험 측면에서 보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선진화된 금융 시스템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리스크에 충분히 노출된다는 것을 보여준 계기였다”고 진단했다. 금융위기를 앞서 내다본 통찰력이 돋보인다. 박 회장은 “리스크 관리를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고객과 함께, 한국 사회와 함께 자본 수출의 시대를 열어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박 회장의 신년사와 달리, 미래에셋은 ‘몰빵’ 투자를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래에셋의 인사이트펀드는 원금의 절반 이상을 까먹었다. 일부 투자자는 “운용사가 중국에 몰빵 투자한 책임이 있다”며 소송에 나설 움직임을 보였다. 물론 세계적인 금융위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자본 수출’이 아니라 ‘원금 손실’을 맞아야 했다.

“투자 실기 말라”던 GS 막판 인수 포기

허창수 GS 회장도 자신이 말한 신년사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허 회장은 연초 150여 명의 계열사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신년모임에서 “필요한 투자를 두려워하거나 실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당부했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GS는 그동안 굵직한 인수·합병(M&A)에 뛰어들었다가 번번이 실패했다. 그룹 출범 바로 뒤인 2005년엔 인천정유 인수전에 나섰으나 SK에너지에 무릎을 꿇었다. 하이마트 인수전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올해 초 대한통운 인수를 검토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기도 했다. 이번에도 대우조선을 인수하기 위해 포스코와의 컨소시엄에 합의한 GS는 마감 당일 인수 포기를 선언했다. 포스코가 입찰서를 제출한 지 3시간 만에 인수전을 포기한 것이다. 가격 차이가 너무 컸다는 것이 GS 쪽의 해명이다. GS그룹의 한 임원은 “포스코가 인수금액으로 7조원을 써내려 했다. 풀베팅할 계획이었다. GS로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었다. GS는 4조~5조원 정도로 봤다. 결국 금액차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M&A 결렬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는 말도 나온다. ‘회장님 말씀’과 다른 결과가 나왔지만, ‘승자의 독배’가 될 수도 있는 M&A를 한화그룹에 떠넘겼다는 얘기다.

허창수 GS그룹 회장. 한겨레 이정용 기자

허창수 GS그룹 회장. 한겨레 이정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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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래 회장의 ‘7·4·7’ 따라하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올 초 ‘비극태래’(否極泰來)를 강조했다. 비극태래는 ‘사물이 막혀 통하지 않다가 극에 달하면 천운이 순환해 다시 뚫리게 되는 것’을 뜻한다. 꽉 막혔던 일들이 술술 풀릴 테니 신사업과 해외 사업을 과감히 추진하자는 다짐과 희망을 담았다고 한다. 김 회장은 대우조선 인수전을 앞두고 “최소한의 리스크(위험)는 감내한다는 각오로 임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애착을 드러냈다. 비극태래처럼 우여곡절 끝에 대우조선을 인수했지만 앞으로 자금조달이라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업계 1등이 되지 않고서는 500년 영속 기업이 될 수 없다”며 “기업의 가치가 주가로 반영된다는 점에서 그룹 주가 10만원을 만들어가자”고 밝혔다. 하지만 금호아시아나는 올해 M&A 후유증에 시달렸다. 금호아시아나는 2006년 시공능력 1위인 대우건설에 이어 올해 초 물류업계 1위 업체인 대한통운을 잇달아 인수했다. 재계 순위도 10위에서 8위로 뛰었다. 하지만 두 회사 인수에 10조원 이상의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그 후유증으로 부채 비율이 급상승해 금호생명 매각에 나서는 등 현금 확보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지주회사인 금호산업의 주가는 지난해 말 8만원대 후반까지 치솟았으나 현재 1만4천원대까지 급락했다.

박용성 두산 회장은 신년사에서 “지난해 밥캣 등 잉거솔랜드 3개 사업 부문 인수 작업을 완료하고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두산도 금호아시아나와 함께 유동성 위기설에 내내 시달렸다. 결국 두산은 대우조선 인수 입찰에 불참을 선언한 데 이어, 주류 부문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현대가 남북경협 사업에 나선 지 벌써 10년째를 맞는 해다. 2008년을 ‘적극적 사업기반 확대’의 원년으로 삼고 현대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자”고 강조했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현대그룹의 주력사업인 대북사업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 7월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뒤 재택근무 등을 통해 비상 경영을 실시한 현대아산은 지난 11월28일부터 개성관광마저 끊기면서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아산은 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긴급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통일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남중수 전 KT 사장. 한겨레 김태형 기자

남중수 전 KT 사장. 한겨레 김태형 기자

이명박 정부 들어 집요하게 밀어붙인 사정 한파에 걸려든 사장의 신년사는 이랬다. 남중수 전 KT 사장은 “기업이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 조건이다. 기업의 윤리성을 높이는 노력도 사회적 책임 활동과 함께 미래 성장을 위한 확실한 기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윤리성을 높이는 노력은 부족했던 것 같다. 납품업체로부터 중계기 납품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남 전 사장은 공판에서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가성은 없었다”라며 억울함을 눈물로 호소했다. 조영주 전 KTF 사장도 중계기 납품 등을 지속적으로 하게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조석래 전경련 회장(효성그룹 회장)은 자신의 신년사를 다시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것이다. 조 회장은 신년사에서 “올해는 국민소득 4만불 시대를 여는 원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4% 성장률을 7%로 끌어올리고 50만 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우리 모두가 합심 노력한다면 5년 이내에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의 ‘747 공약’(연간 7% 경제성장, 4만달러 소득, 세계 7대 강국 진입)처럼 지나친 장밋빛 전망을 한 셈이다.

“투자·일자리 확대” 앵무새 합창으로 끝나

재벌 회장들이 무더기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놓기도 했다. 30대 그룹 회장들은 4월28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 합동회의’에서 올해 신규 채용 7만7500명, 연간 투자액 95조6천억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회장님들의 말씀’은 공허한 말이 됐다. 삼성전자·포스코·SK텔레콤·한국전력·현대중공업·KT&G·LG전자·현대자동차·KT·신세계 등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의 고용은 2007년 말 29만1810명에서 올해 11월 현재 29만2763명으로 0.33%(953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주요 그룹 회장들은 내년에는 어떤 약속을 내놓을까? 아마 지금쯤 회장들은 최악의 경제위기가 닥쳐올 것이라는 2009년 신년사를 준비하느라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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