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계산 빠른 부자들 “이참에 증여”

재벌가 손자들 지분 늘어… 고가 아파트도 명의 변경
등록 2008-11-28 16:19 수정 2020-05-03 04:25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청약을 받은 사람들에게 ‘프리미엄’은 당연한 권리처럼 보였다. 일단 당첨만 받으면 높은 시세 차익을 누릴 수 있어서였다. 2005년 말 분양된 경기 판교신도시는 경쟁률이 3500 대 1까지 치솟아 아예 ‘판교 로또’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올 들어서는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분양값보다 낮은 수준에서 시세가 형성되는 ‘마이너스 프리미엄’ 시대가 도래해버렸다. 주가도 마찬가지다. 최악의 시기에 중국에 ‘몰빵’했다가 ‘반토막 펀드’를 양산해낸 대외 증권투자는 말할 것도 없다. 2007년 10월 2000을 돌파했던 코스피 지수도 지난 11월20일 현재 948.69로 내려앉아버렸다.
거래가 실종되고 시장 참여자들의 한숨만 늘어가는 ‘마이너스 프리미엄’의 시대. 그러나 한편에서는 낮아진 자산 가격을 활용해 자녀들에게 ‘부’를 물려주려는 활발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재벌가에선 그룹 오너가 자녀는 물론 손자·손녀에게까지 주식을 증여하면서 두 살배기 ‘아기 주주’가 탄생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의 종합부동산세 일부 위헌 결정을 계기로 고소득 자산 계층을 중심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아파트를 미리 증여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당장 세금도 줄이고, 앞으로 부동산 가격 상승의 혜택까지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율을 낮추는 상속증여세법 개정 움직임까지 더해져 불황기임에도 ‘부의 대물림’은 ‘대목’을 맞을 전망이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퍼스티지’의 전경.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퍼스티지’의 전경.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와 재벌닷컴이 낸 자료를 보면, 주요 그룹과 중견 기업 오너 가문의 미성년자들이 최근 잇따라 주식 매수에 나서고 있음이 확인된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손자·손녀인 2002년생 1명과 2006년생 2명이 지난 10월31일과 11월3일 주식 3710~3910주를 증여받아 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명목상 이 3명의 어린이가 주식 매입에 들인 돈은 1인당 1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효성 관계자는 “회장이 손자·손녀들에게 주식을 사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심팩 최진식 대표이사의 1991년생 딸은 10월28일 주식 5만5450주를 장내매수했다. 매입 당시 주가로 따져보면 1억1천만원 정도를 들여 주식을 사들인 것이다. 현대시멘트 정몽선 회장의 1994년생 손녀는 10월29일 주식 500주를 장내매수해 보유 주식을 2120주로 늘렸다. S&T그룹 최평규 회장의 1995년생 장남은 11월14일 그룹 지주회사인 S&T홀딩스 주식 4만여 주를 매입하면서 보유 주식을 17만 주로 늘렸다. 문배철강 배종민 대표이사의 1999년생 아들도 지난 10월28일 5천 주를 사들여 지분을 6만1050주로 늘렸다. 배군은 문배철강의 계열사인 NI스틸 주식을 포함해 2억원어치의 주식을 보유한 상태다.

자산가격 하락으로 과표 낮아져

주식증여 공시를 낸 기업들도 많다. 이필웅 풍림산업 회장은 10월15일과 17일, 보유 주식 505만 주 중 115만 주를 아들 이윤형 전무 등 친인척 8명에게 증여했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도 11월8일 주식 4020주를 보령중보재단에 증여했다. 곽노권 한미반도체 대표는 11월12일 가족 5명에게 130만여 주를 증여했는데, 증여받은 사람 가운데에는 두 살배기도 포함됐다. 이처럼 주식 등 자산이 저평가된 시점에 낮은 평가액으로 증여세를 신고하면, 추가적인 세금 부담 없이도 미래의 가치 상승분을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다.

부동산 시장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한 경제신문 10월24일치에 발표된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퍼스티지’ 청약 당첨자 명단을 보면, 전체 400여 가구 가운데 20대가 48명에 이르렀다. 238㎡(72평형) 이상에 당첨된 20대도 4명이나 된다. 20대의 경제력으로는 현실적으로 수억~수십억에 이르는 서울 강남권 아파트를 구입하기 힘들기 때문에, 실제 자금을 댄 사람들은 부모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아파트를 통한 증여가 여전함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취득·등록세 신고 수다. 부동산 거품 붕괴에 대한 경고 신호가 잇따르면서 아파트 거래는 아예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상황이지만, 아파트를 사거나 상속·증여받을 때 내는 취득·등록세 신고는 비교적 활발하다. 서울 송파구청 세무과의 한 관계자는 “재건축단지 조합원들이 신고를 한 특수한 사례를 빼더라도, 주택의 경우 최근에도 하루 10건꼴로 취득 신고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면서 “최근엔 헌법재판소에서 종부세의 세대별 합산 과세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나면서, 증여와 관련한 문의가 부쩍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은행 프라이빗뱅커(PB)들을 찾는 강남 아파트 보유자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최근 한 시중은행 PB사업단을 찾은 김기철(58·가명)씨의 사례를 보자.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103평형에 살고 있는 그는 1990년대 초부터 보유하고 있던 서울 개포동 우성1차아파트 55평형을 내년 봄 아들에게 증여하기로 결심했다. “팔기엔 양도 차익도 너무 크고 거래도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아예 부인과 아들의 명의로 바꿔버리겠다”는 것이다. 재건축 단지를 매입하겠다는 경우도 있다. 배희정(56·가명)씨는 대학생인 아들이 나중에 신혼집으로 쓸 수 있도록, 송파구의 한 재건축단지 13평형을 곧 구입할 생각이다. 13평형은 재건축이 끝난 뒤 33평형 정도를 분양받을 수 있다. 배씨는 “한때 6억~7억원이던 시세가 5억원 밑으로 떨어진데다, 당장 전세를 놓을 수도 있기 때문에 증여세 부담도 적다”고 설명했다.

세율까지 인하되면 봇물 이룰 듯

전문가들은 강남 부동산 부자들 중 상당수가 내년 초를 증여 시점으로 잡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의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현행법은 자녀에게 3억원을 증여할 때 20%의 세율이 적용돼 6천만원의 증여세가 부과되지만, 개정안에서는 세율을 7%로 낮추었다.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 하락기에 고소득 자산 계층의 증여가 활발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전세계적인 경제위기 여파로 한국도 수출·내수의 극심한 동반 침체가 예견되는 상황 속에서, 정부가 종부세의 완전한 무력화와 상속·증여세 인하에 ‘올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당 일각에서는 증여가 쉽도록 아예 취득·등록세를 한시적으로 면제해주는 방안까지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의 이상민 간사는 “상속·증여세 인하는 적용 대상이 전체 인구의 0.7%에 지나지 않는데, 이들을 위해 1조2천억원을 감세하겠다는 게 정부·여당의 입장”이라며 “서민·중산층과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정책과 자금 마련에 힘을 쏟아야 할 판에, 부자들을 위한 감세에만 매달리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