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자금 담당 임원(CFO)들은 금고 같은 사람들이다. 외부인이 회사의 자금 흐름을 제대로 안다는 건 몇 겹의 자물쇠와 암호로 무장한 미로를 푸는 것만큼 어렵다. 취재를 위해 비밀번호 다이얼을 돌려보더라도, “지금 우리 회사 자금 사정은 좋다”는 건조한 목소리만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요즘은 중견·중소 기업 CFO들로부터 “불안하다” “속이 탄다”는 고백을 듣는 게 어렵지 않다. 내수기업은 원자재값 상승을, 수출기업은 ‘키코’(KIKO) 같은 환헤지 파생상품에 따른 환차손 탓이라고 한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에는 은행들이 돈줄을 막고 있다는 하소연도 들려온다. 정말 그런가?
지난 10월15일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중소·벤처 기업 CFO 3명의 ‘취중진담’을 들어봤다. 3개사는 매출액 규모가 500억원 이상~ 3천억원 이하인 코스닥 상장업체들로, 수출 비중이 높은 까닭에 이명박 정부 초기 원-달러 환율 올리기 정책에 찬성 의견을 밝혔던 기업들이다. 이 가운데 2개사는 키코에 가입해 홍역을 치르고 있는 업체들이며, 엔화 약세 때 엔화 대출을 받은 탓에 최근 이자부담이 커진 기업도 있다.
밤 9시. 통성명을 마치고 첫 번째 술잔이 돌았다. 안줏거리 삼아 처음 올린 주제는 ‘키코’였다. 수출기업들은 원-달러 환율이 내려가면(달러 약세) 환차손을 보게 되는데, 키코는 이를 만회해주는 파생금융 상품이다. 그러나 올해처럼 환율이 약정 범위를 벗어나 급등할 때는 기업들에 엄청난 환차손을 안겨주도록 구조화돼 있다. 소주는 쓰고, 안주는 쓰디썼다. CFO들은 은행들을 원망하고, 자신들의 판단을 자책했다. 은행들의 ‘접대’에 취해 키코에 가입했다는 양심선언도 나왔다.강 장관 덕에 옷벗은 CFO 수두룩할 것ㄱ이사=지난해 10월 외환은행이 일본 여행을 보내주더군요. 골프와 온천관광 프로그램이 제공되는 환 관련 세미나였어요. 은행 쪽에서 금융공학팀 부·차장과 마케팅팀장 등 5명이 왔고, 중견기업에서 각사당 한 명씩 30명이 왔습니다. 은행들이 공격적으로 키코를 팔던 올해 3월에도 한 번 더 이런 ‘접대성 외유 세미나’가 진행됐고요. 그때 은행들이 왜 ‘생돈’을 퍼부으면서까지 키코 영업을 하는지 알아채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
ㄴ상무=우리는 원래 에너지 기업인데 올 초에 자동차 부품업체를 인수했어요. 그런데 지난 6월에 환율이 치솟자 인수한 회사에서 덜컥 키코가 터졌습니다. 열두 달 동안 100억원 정도 손실이 나게 된 거죠. 8월이 되니 은행에서 전화가 왔어요. 키코 손실이 크니까 상품 구조를 다시 바꿔보자더군요. 그래서 환차손이 발생하는 ‘녹인’(Knock In) 환율을 당초보다 올리는 대신, 계약 기간을 2년으로 늘리기로 했고요. 그런데 환율이 1천원, 1100원으로 계속 오르면서 전체 손실액이 200억원으로 늘어났습니다. 키코에서 떼인 돈을 그보다 더 무서운 파생상품인 ‘피봇’으로 메우려다 법정관리까지 내몰린 ‘태산엘시디’ 꼴이 된 거지요.
ㄷ부사장=저는 키코와는 무관한데도 웃기는 ‘대미지’(피해)를 입었어요. 1년에 2억달러 정도를 수출하는데, 지난해 말에 1달러당 930원에 1년짜리 선물옵션을 걸었어요. 당시엔 환율이 800원대로 내려간다는 소문이 돌던 때잖아요. 달러를 930원에 살 권리를 확보해두면 환차손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2탄은 더 웃깁니다. 올해 초 환율이 들썩일 때도 ‘1천원대는 정상이 아니야. 950원쯤이 적정 환율이지’ 생각하고는 980원에 8천만달러를 걸었어요. 이익도 손해도 보지 말자는 발상이었지요. 그런데 환율이 내려오지 않으면서 400억원 손실이 났어요. 사장한테 깨지고 주주들도 난리나고. 저는 CFO로서 보수적인 자금운용이라는 원칙을 지켰다고 자신하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죠. 강만수 장관 덕에 옷 벗은 중소기업 CFO들 적지 않을 겁니다.
자기 패 보여주니 투기꾼 끼어들 수밖에ㄴ상무=정부와 은행들이 키코 피해 중소기업들을 구제해주겠다는 것도 솔직히 믿기 힘듭니다. 오늘 신한은행에서 ‘중소기업 유동성 자금지원 신청서’를 보냈는데, 키코 관련 소송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1년간 최대 50억원을 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염치가 없는 겁니다. 정부는 지난 8월까지 키코 누적 손실이 전체 1조원 안팎이라고 발표를 해왔는데, 지금 태산엘시디가 2800억원, 성진지오텍이 1500억원씩이라고 공개됐잖아요. 수백 개 업체들이 키코의 덫에 걸린 상황이니, 전체 피해 규모는 이제 5조원이 될지 10조원이 될지 모르겠어요.
밤 9시40분. 주제는 다시 적정한 원-달러 환율로 옮겨갔다. 연초부터 ‘환율 상승’을 암시하는 발언들을 수차례 반복해놓고서도 국정감사에선 외환시장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잡아뗀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정책에 대한 날선 비판이 쏟아졌다.
ㄷ부사장=솔직히 우리는 환율이 오르면 수출이 잘돼서 좋습니다. 가격 경쟁력이 생기고, 또 원화로 따지면 채산성도 좋아지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970~1050원 정도 환율이면 적당하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가 800원, 900원 환율에도 수출을 했거든요. 원화가치가 지금은 그때보다 50%나 떨어진 셈이니 큰 문제이긴 합니다. 내수기업들은 아예 감산에 들어갔을 테고, 수출업체라도 부품 수입 비중이 높은 곳은 부도가 날 가능성도 배제 못해요. 초기에 (외환시장의) 문을 잘 잠가야 하는데, 이제는 투기세력들에게 안방 열쇠를 내준 꼴입니다.
ㄴ상무=환율은 그 국가의 값어치입니다. 그런데 수출을 늘린답시고 1970년대 논리로 환율을 올려버린 겁니다. 지금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서 달러를 1조달러씩 찍어내면서 국제적으로 달러가 휴지가 됐는데, 우리는 그 휴지를 벌어들이려고 이렇게 고생하는 셈이에요. 고환율 정책, 얼마나 웃기는 겁니까. 그런 논리대로라면 환율이 1800원, 2천원씩 갔던 외환위기 때 한국 경제가 제일 잘나가야 되는 것 아닙니까.
ㄱ이사=강만수 장관은 노름을 하면서 자기 패를 다 보여준 겁니다. 자, ‘나는 고환율 갈 테니 따라오려면 따라와’라는 신호를 준 거지요. 올 초 환율이 1천원 선을 돌파했을 땐 이미 투기세력이 끼어든 겁니다. 1030원, 1050원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는데도 용인한 것이지요.
ㄷ부사장=요즘 환율 불안에는 참여정부 탓도 있습니다. 돈이 시중에 막 넘쳐나고 기업들도 달러가 많다 보니, 달러 차입을 억제하는 조치들을 취했거든요. 외국계 은행에도 손을 댔고요. 그러다 보니 달러 외채가 전부 단기부채로 바뀌었고, 이게 금융위기 국면에서 수급에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키운 원인이 됐습니다.
ㄴ상무=그런데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는 지난해 5~6월부터 계속 불거져나왔거든요. 지금 정부는 노무현 정부 탓만 하는데, 경제현장을 모르면서 무리한 정책을 편 게 문제입니다. 경제가 중요하다며 당선됐으면 대통력직 인수위원장도 경제학자를 앉혔어야 해요. 현 정부는 ‘오륀지’가 경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거 아닙니까.
납품 대금 넉 달째 결제 안 해줘ㄱ이사=저는 관료들을 생각하면 더 화가 납니다. 강만수씨는 긴 공백 기간 때문에 그렇다 치고, 전세계적인 금융시장 불안 상황을 뻔히 아는 관료들이 고환율 정책을 왜 막지 않았을까요. 또 기업들이 환투기를 했다며 을러댄 것도 이해가 안 갑니다. 우리 외환시장은 국내총생산(GDP)이나 수출액에 비해 그 규모가 매우 적은 ‘천수답’입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요즘처럼 가뭄이 들면(달러공급이 불충분하면) 자기들이 가진 달러를 내놓으려 하지 않지요.
밤 10시30분. 금융은 혈관이다. 돈줄이 막히면 경제는 산소와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없다. 금융위기의 여파로 ‘돈맥경화’가 오는 상황을 기업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른바 ‘흑자부도’는 영업이익이 나는데도 대출금을 못 갚거나 원자재 대금 결제를 해주지 못하는 등의 상황을 일컫는다. 자금 담당 임원들의 얼굴이 불콰해졌다.ㄱ이사=우리 회사는 10월 들어 수출 규모가 감소세로 돌아섰는데,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내수는 아예 캄캄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부품은 자동차·조선·플랜트 쪽으로 들어가는데, 조선은 좀 낫지만 다른 부분은 하향세가 뚜렷해요. 올해 3조원을 투입한다던 한 석유화학 대기업은 투자를 내년으로 넘겼다고 하더라고요. 내 경우엔 지난 6월에 2억원어치를 납품받은 한 중견기업이 넉 달째 결제를 해주지 않아서 속이 탑니다. 압류를 들어갈까 싶은데 상거래 의리상 그것도 쉽지 않고요. 확실히 시중에 돈이 말랐습니다.
ㄷ부사장=부동산을 담보로 잡고도 대출이 안 돼요. 우리는 에비타(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가 350억원씩 나는 회사입니다. 차입도 없고요. 최근 전세살이를 청산하고 사옥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몇 십억 차입을 해보려고 하니 중소기업은커녕 대기업한테도 못 빌려준다는 거예요. 이건 은행이 은행 구실을 포기한 겁니다.
ㄴ상무=우리는 10월31일에 엔화 대출 9억엔이 몰려 있습니다. 100엔이 1천원 할 때 빌려서, 한때 750원까지 내려갔으니 휘파람을 불었지요.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엔화 대출을 해준 주거래 은행에서 30%를 갚으라는 겁니다.
ㄱ이사=키코 계약 때문 아닙니까?
ㄴ상무=왜 갑자기 회수를 해가냐고 물으면 키코 때문이라고 말은 안 합니다. 그냥 너희들 영업외 손실이 커져서 신용등급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다른 이유를 대지요. 정부가 대출 만기 연장을 해준다, 자금 투입을 한다 떠들지만 내년 상반기엔 키코 때문에 무더기 부도 사태가 찾아올 겁니다. 키코 계약을 맺은 해당 은행은 정부 압박이 두려워 대출 연장을 해줄지 몰라도, 다른 은행들은 신용등급을 핑계로 대출 연장을 안 해줄 게 뻔해요.
ㄷ부사장=제가 외국계 은행에서 20여 년을 일했던 사람입니다. 올해 4~5월에 이미 중소기업 자금난은 예견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때 시중은행들이 직원들에 대한 평가 방식을 바꿨는데, 10억원을 대출해주면 마이너스 1점을 주는 식이었어요. 여신담당 부장이 밑에 있는 직원에게 ‘네가 관리하는 회사에 나간 대출이 5천억이다. 이걸 10% 줄여라’ 이렇게 지시하게 되는 거지요. 전체 대출에서 10%를 일괄적으로 줄일 수는 없으니, 힘이 약한 중소기업에서 돈을 다 빼가는 겁니다. 지금 키코에 당한 중소기업들이 타깃이 되겠지요.
ㄱ이사=지난주 우리 회사 사옥 근처 은행 지점의 영업담당 팀장이 갑자기 찾아왔어요. 지난해 사정하다시피 대출을 해가라기에 20억원을 빌렸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돌려달라는 겁니다. 우리가 키코 손실에 대해 공시를 내니까, 은행 쪽에서 부실을 우려해 대출 연장 심사를 통과시키지 않은 것이겠지요.
ㄷ부사장=금융권의 최대 문제가 심사역들이에요. 은행은 대출심사를 6~7명이 하는데, 나머지가 모두 오케이 해도 한 명만 반대하면 대출이 막혀요. ‘니가 (부실) 책임질 거야’ 이러면 끝입니다. 심사역도 팀장급은 나이가 50대고, 20여 년을 그렇게 일해온 사람들입니다. 우리 금융권 체질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단면이지요.
밤 11시. 여러 번 비운 재떨이가 다시 수북해졌다. 누군가 키코로 사고치고 잠적한 CFO를 낚시터에서 잡아왔다는 한 중견기업 사장의 ‘무용담’을 소개했을 땐 잠시 대화가 끊어지기도 했다. 코스닥 간판 우량기업으로 꼽히는 회사들답게 이들이 몸담은 회사들의 영업이익은 올해 크게 개선됐다. 그런데 풍년에도 곳간지기가 한숨만 푹푹 내쉬는 형국이다.ㄱ이사=저는 삼성 출신이라서 그런지 MB노믹스가 마음에 안 듭니다.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검증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 같아요. 경제가 내년 상반기에 최저점으로 떨어질 것을 생각하면 이제 악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나 싶습니다. 솔직히 외환위기 때는 제조업, 특히 수출기업들은 오히려 기회가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반대입니다. CD 금리가 떨어졌는데도 대출이자를 올려서 먹는 은행들은 고리대금업자들과 다를 게 없어요.
ㄴ상무=저는 키코 연쇄 부도 사태가 올까봐 걱정됩니다. 키코 계약을 맺은 당사자 은행은 대출을 연장한다고 쳐요. 그런데 다른 4~5개 거래 은행들은 대출금을 회수하겠다고 나설 게 뻔해요. ‘야, 가서 키코에 물린 회사 조사해봐. 대출 좀 줄여봐’ 이러면 무너지는 겁니다. 외환위기 때 국가 신용등급이 하루아침에 A에서 C로 떨어졌듯, 키코 피해 업체도 두드려맞겠죠.
ㄱ이사=대통령이 키코 업체를 A부터 D까지 나눠서, A·B는 살려주라고 했잖아요. 제가 은행이라면 무조건 C등급을 때릴 겁니다. 겨우 목숨만 붙여놓고, 대출이나 예금 캠페인(판촉활동)할 때 부려먹겠지요. 은행은 칼 손잡이를 잡고, 기업들은 칼날을 잡고 있는 겁니다.
빈터 늘고 땅값 떨어져 ‘공단불패’ 흔들ㄷ부사장=저는 부동산 가격 하락이 걱정입니다. 내수까지 죽어버리면 외풍을 견디기 힘들거든요. 또 강남 불패라지만, 사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공단 불패’이기도 했어요. 중소기업들이 영업이익이 안 나도 땅값이 올라 돈을 버는 식이었지요. 그런데 아직 폭락은 아니지만 수도권 공단 땅값이 조금 떨어지는 분위기고, 반월공단 같은 데는 빈터가 늘고 있어요. 기업들도 부동산을 담보 잡고 대출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잘못하면 ‘서브프라임 사태’ 같은 게 터질 수 있어요.
ㄴ상무=현 정부에 비판적이지만, 아직 그런 시나리오는 지나치다고 봅니다. 오늘 모인 분들이 다니는 회사들은 모두 외환위기의 파고를 뚫고 고속 성장을 이어온 회사들 아닙니까. 다만 정부가 시장의 신뢰뿐만 아니라 중소·중견 기업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건 분명해요. 우리는 공장이 창원에 있는데, 솔직히 새 정부 출범 때 그쪽 기업인들은 기대가 많았어요. 이젠 모두 등을 돌렸지만. 지금이라도 경제 사령탑을 바꾸고, 기업들이 마음 놓고 글로벌 경쟁에만 집중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내년 국내와 세계 경기는 비관적이다. 그래도 술자리가 파할 무렵에는 희망을 얘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기술력·영업력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다. ‘우리 회사 주식은 지금이 바닥이니 사야 한다’는 말들도 빠뜨리지 않았다. 비관도 낙관도 말라는 것일까? 밤 11시40분께 자리를 파하기 전 3명의 CFO들은 마지막 담배 한대씩을 피웠다.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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